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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 성경본문 : | 마3: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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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 | 주님의교회 |
예수님의 관점(Jesus' point of Perspective)
마3:16-17
2.2016.4.27. 주님의교회 수요
3.2020.8.16. 들꽃피는교회 주일
16.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그에게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로부터 d)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d. 또는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다) (마3:16-17)
1.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2.유대인들의 관점(시각)은?
3.예수님의 관점(시각)은?
4.오늘날 우리들의 관점(시각)은?
5.어떻게 예수님의 관점을 따를 수 있나?
1.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각(自覺)’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각이란 스스로 깨달아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기도를 끝냈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였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 자신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 깨달은 것을 담대하게 전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당시 전통 종교인 유대교의 교리와 완전 달랐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유대인만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전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전도를 해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기준이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발언이었습니다. 그래서 난리가 났습니다. “도대체 네가 누군데 그런 위험한 얘기를 하느냐?” 실감이 안 나실 분들을 위해 오늘날의 현상으로 비유를 하자면(진짜가 아니고 비유입니다) “예수가 아닌 석가모니나 공자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발언입니다. 그래서 격분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유대인의 관점(시각)을 벗어나 예수의 관점(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과 같은 관점을 가진 것 같지요? 정말 그럴까요? ‘성경’ 자체가 유대인의 관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가 유대인의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유대인들의 관점(시각)은?
에스라가 바사 왕의 포로이면서도 성실히 왕을 섬기며 율법을 연구하여 율법에 익숙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의 귀환을 지도하게 하셨습니다(스7:6-28).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백성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하나님 앞에 신실한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스8:21-13; 9:3-15).
에스라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귀환할 때에 그의 지식이나 왕의 군사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손에 의존하여 금식하며 도우심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 간구에 응답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려움 당하지 아니하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스8:21-34).
에스라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기원전 538년은 우리나라의 1945년 8월 15일 ‘광복절’과 같습니다. 양쪽 모두 해방의 순간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50년간의 바벨론 식민시대에서 벗어났고, 우리나라는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모든 게 잘 풀릴 줄 알았으나 실제의 역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538년의 바벨론 포로귀환은 유대인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낸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패망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해방을 맞아 나라를 세울만한 능력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습니다. 만약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으면 이스라엘은 영원히 나라를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대 근동에 그런 운명에 떨어진 나라가 무수히 많습니다.
유대는 기원전 538년부터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성전을 재건축하기 위해서 매진했습니다. 무너진 성전 돌무더기 아래서 양피지로 된 성경을 발견하였습니다. 에스라는 그런 성경 양피지를 전부 모으고 학자들을 모아서 성경 편찬 작업을 합니다.
에스라는 포로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메시아’(구원자) 사상을 중심으로 성경을 편집합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젠가 다윗과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나타나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회복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눅2:38)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세기 동안 외세의 침략과 정복에 의하여 신음 속에 고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들에게는 선조들로부터 이어온 ‘메시야 사상’에 의한 시온니즘 적 대망(이스라엘의 해방)이 있었고, 그 날을 학수고대하여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그러한 자신들의 열망을 충족시켜 줄 줄 알고 처음에는 구름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호산나’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이들의 열망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적 시온니즘 열혈 지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고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허약하고 나약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위인일 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야훼(하나님)가 세계의 하나님으로 전파되는 것에 분노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선민)은 오직 히브리민족 이스라엘 뿐 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만의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살아온 그들에게 세계적 하나님을 주장하는 예수와 그 무리들은 이제 더 이상 동족이 아니라 매국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에스라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쓴 구약의 예언서에는 다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읽었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3.예수님의 관점(시각)은?
자각이란 스스로 깨달아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세례가 아닙니다. 강물 속에 푹 잠기는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물에서 올라오셨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예수님 위에 덮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또는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다” 하는 소리였습니다.(마3:16-17)
예수님의 정체성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비로소 자각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신 것입니다. 30세까지 유대인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는 이제 유대인들과는 완전 다른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로부터 온갖 기적과 이적을 수반하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죽는 순간까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의 메시아였으며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부활 승천한 왕중왕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오시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강력한 힘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줄 다윗과 같은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가르치셔습니다.(마5:41-44)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어디론가 숨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요12:12-13)하지만 상황은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그 주간에 예수는 체포되어 허망하게 처형을 당해버리셨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예수가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행1:6)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했을 때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예수는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늘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혼의 통치자’가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로 베드로와 요한은 새로운 복음인 예수의 부활에 관해 담대하게 전파했고, 직접 기적을 행함으로 그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행3:1-9, 13-15) 예루살렘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반대했듯이 사도들과 제자들도 역시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예수님의 관점은 사탄의 권세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 택한 자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권세로 살아감으로 이 땅에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즉, ‘천국’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4.오늘날 우리들의 관점(시각)은?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은 유대인의 관점입니까 예수님의 관점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관점을 따른다고 생각할 것이고 부디 그러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각(自覺)’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면서 실제로는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바리새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지금 마귀에게 끌려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뱃속에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모태신앙이든 아니면 전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든 우리는 누군가에게 복음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연수가 늘어나면 직분도 받게 되고 교사나 성가대 같은 부서에서 봉사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에 적응을 해서 대충 신앙생활을 이어나갑니다. 가끔가다 영적인 갈급함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적당히 넘어갑니다. 보통은 교인들의 신앙 수준은 담임 목사의 영적, 지적 수준을 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유대화(化) 된 전형적인 우리의 모습이라니까요.
전에부터 그래왔으니까, 내가 소속된 교단 교파의 교리가 그러하다니까, 관례대로, 습관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동안 해 왔던 신앙생활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5.어떻게 예수님의 관점을 따를 수 있나?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하고 ‘신경영’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 삼성은 ‘양(量)’위주의 경영에서 ‘질(質)’위주로 완전 탈바꿈했고 오늘날 초일류 기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의식 속에서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겠다’고 다짐하는 것보다 더 강도 높은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관점을 따라 살 수 있을까요? 크게는 ‘내면적인 변화’와 ‘외면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내면적인 변화는 첫째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성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거하면서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것을 밖으로 흘려보낼 만큼 영적 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
둘째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그 말씀을 실제 내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면적인 변화로는, 첫째로, 예수는 구세주이시며, 예배의 대상이신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과 참다운 교회 모습과 사회 참여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신분이라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강조하신 제자도, 형제애, 공동체, 비폭력과 무저항 평화주의 등등 기독교 교회의 본질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둘째로, 교회가 세상 적 지위, 부, 권력과 습관적으로 결탁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는 부적절할 뿐 아니라 증인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므로 스스로 이에 대해 경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 기득권, 이스라엘 정치 기득권, 로마 국가 기득권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은 기득권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득권자들에게 고통 받는 민중에게 있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핵심은 평화이기에 이 세상에 비록 분열과 폭력이 난무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로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비폭력적 대안을 찾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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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The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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