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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적인 그리스도와 평면적인 예수

고린도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77 추천 수 0 2020.10.26 22: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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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5:3-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9.1.15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입체적인 그리스도와 평면적인 예수
고전15:3-4, 막1:1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서 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각각 다른 두 이름, 예수와 그리스도가 합쳐서 된 이름입니다. 처음에 한 부류는 그냥 ‘예수’로, 다른 부류는 ‘그리스도’로 한 인물을 부르다가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의해 ‘예수그리스도’로 통합하여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뭘 의미하는가 하면, 신앙의 역사가 예수 쪽을 강조한 크리스챤들 세력과 그리스도 쪽을 강조한 크리스챤들 세력이 교차되고 점철되어 왔다는 뜻입니다. 그 교차는 바울과 마가시대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강조했다면 마가는 [예수]에게 집중을 했습니다. 이 말을 제게 적용해 보면, 어떤 교우들이 저를 한 ‘인간’ 태수로 보는가 하면, 다른 교우들은 인간적인 태수는 빼고 ‘목사’로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에는 마가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정교한 신학 작업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를 ‘그리스도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가능한 그런 신학화 작업을 거부하고 예수의 순수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베토벤과 모차르트에 견주어서 설교를 했으니까, 이번 주에는 바울서신과 마가복음을 세잔느(인상파)와 고갱(후기인상파)이라는 화가에 연결하여 설교하겠습니다.


바울서신=세잔느(인상파 1839-1906)
마가복음=고갱(후기인상파 1848-1903)


세잔느는 입체주의 화가입니다. 세잔느는 햇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대상의 특수한 양상을 포착하려고 했던 인상파 화풍을 담지하면서 질서 있는 구도나 균형 있는 화면구성이라는 전통적인 회화의 기법역시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잔느라는 화가는 전통과 현재를 구조적으로 조합하는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이렇게 세잔느는 전통적인 원근볍이나 소묘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질서 있는 입체감을 살려낸 현대미술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 세잔느와 영향을 받은 화가가 스페인의 피카소, 스위스의 클레, 미국의 피어닝 같은 화가들입니다. 그들은 세잔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방법의 입체주의를 지켜나가게 됩니다.


세잔느가 현대 미술의 단초를 놓았다면 그것을 주도한 사람이 고갱입니다. 고갱도 세잔느처럼 전통적인 회화의 기법을 거부하긴 합니다만, 그는 세잔느가 추구했던 질서와 균형 잡힌 구도도 거부합니다. 고갱은 당시의 미술 사조 전체를 거부하고, 단순하고 강렬한 것, 보다 소박하고 거친 것, 꾸밈이 없는 것이라야 진실을 담을 수가 있다고 하면서 원시적인 모습 그대로를 그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원시주의 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갱에게 그런 적격지는 타이티 섬이었죠. 세잔느의 그림이 세련되고 입체적인데 비해서 고갱의 그림은 야만적이고 솔직하고 평면적인 것입니다.

u1tled.png

세잔느의 <정원>

2tled.png
고갱의 <낙원>


그러니까 위의 그림 중 세잔느의 저 입체적이고 질서 있는 그림은 바울의 시선으로 대비된다는 것이고, 아래 고갱의 원초적이고 평면적인 그림은 마가가 바라보는 예수와 같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면을 배제하고 신성화된 ‘그리스도’를, 마가는 꾸며지지 않은 인간 ‘예수’ 그대로를 보여주듯이, 세잔느와 고갱의 회화법이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하면 그의 입체적인 신학사상이 먼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과 그리스도를 조화시키려 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율법을 부정하고 복음을 긍정한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율법을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의 유익성을 피력하면서 긍정합니다. 롬7:12에서 그는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합니다.  바울은 당시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을 이해하고 해석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해한 율법은 그리스도에서 목표가 되고, 유대인들이 이해한 율법은 그리스도에게서 폐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실현을 위한 배타적인 통로에 관한 한 그리스도는 율법의 폐기가 되지만, 하나님의 의의 실현을 위한 포괄적인 통로로서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이 자신이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마땅히 전주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갈2:8-9). 그 복음이 내용이 뭔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흘째 되던 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고전15:3-4)”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이미 ‘신학화’된 예수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해하지만 그리스도가 왜 죽었는지, 누가 그를 죽였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는 단지 ‘우리의 죄를 위하여’라는 신학사상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세잔느의 그림과 화풍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담아서 새로운 것을 도모하는 회화로서 말입니다.


그러면 마가는 어떻습니까? 바울과는 대조적입니다. 종합적이고도 입체적인 사상을 전개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화’하지 않습니다. 율법에 관한 마가의 입장은 단순하고 단호합니다. 막7:1-23에서 마가는, 율법의 기존 정신에 집중하지 않고 율법의 겉모습에 빠진 사람들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니까 마가에게서는 율법과 복음이 조화하지 않습니다. 마가는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아니, 다른 관점에서 예수의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사상적으로 채색된 ‘그리스도’ 예수를 ‘예수’그리스도로 환원시켜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달방식도 세련된 신학언어가 아니라 부탁하고 평범한, 원시적이라 할 만한 언어로 예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막1:1)에로 돌아가 있습니다. 여기서 ‘시작’은 원초적인 단순한 것, 가공하지 않은 것, 다듬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죠. 마가는 그 짧은 세월 동안 복음이 너무도 복잡하고 세련된 사상으로 채색되어 왔다고 생각하고 이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시작’에로 회귀를 한 겁니다. 마가에게 있어서 예수는 마치 자연사처럼 죽은 게 아니라(바울은 그렇게 처리하고 대신 의미지우길‘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다’고 입체적이고 사상적으로 전환함)더 살 수 있으셨음에도 강제로 생명력이 중단된 ‘죽음 당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상징이 아니라 처음의 형틀이라는 구체적인 현실로 그 자리가 매겨진 것입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바울의 종합적이고도 ‘입체적인 그리스도 신학사상’과 마가의 거칠고 ‘원시적인 예수 이야기’는 기독교 역사에서 두 줄기 큰 흐름입니다. 이는 마치 세잔느의 입체성과 고갱의 평면성이 현대 미술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한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세잔느와 고갱, 바울과 마가 중에 누가 더 위대한가(혹은 옳은가)의 질문은 적절치 않습니다. 바울이 예수 없는 그리스도만을 주장하지 않은 것처럼, 마가도 그리스도 없는 예수만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마가나 바울이나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인정합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바울은 ‘그리스도’예수를, 마가는 ‘예수’그리스도를 각기 강조할 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가 없는 ‘그리스도’는 신화로 변형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반대로 ‘그리스도’없는 예수는 단순한 인권 운동가 혹은 사회혁명가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요한일서 저자의 입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하겠습니다.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요일2:22).


세잔느의 입체적인 그림과 바울의 그리스도, 고갱의 평면적이고 원시적인 회화와 마가를 읽으면서 우리의 시선은 동시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사시(斜視) 즉 외눈박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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