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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년(2019)의 독립선언서는 기미년(1919)과 다르다

예레미야 허태수 목사............... 조회 수 54 추천 수 0 2020.10.26 22: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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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20:14-1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9.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기해년(2019)의 독립선언서는 기미년(1919)과 다르다

예레미야 20:14-18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 을사늑약(乙巳勒約-광무 9, 1905.11.17)입니다. 일본은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 역사, 사회, 관습, 종교 모든 영역에 대해서 일본화를 추진했습니다. 이에 무수한 예언자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섰고, 늑약이후 14년이 지난 1919년에 대대적인 독립만세를 부르짖는 민중운동이 일어납니다. 당시로부터 금년이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행사가 연일 선전되고 있습니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역사 복원주의정치적 향수에 머무르게 하는 결과만 갖게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해서, 우리는 이 시대의 을사늑약과 같은 삶의 침탈을 가져오는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역사를 복기함으로 교훈 받으려 합니다.

 

바벨론혹은 바빌론은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단어입니다. 성서에 보면 바빌론은 이스라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고대 근동 지방의 대제국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끝없이 침략하고 결국에는 예루살렘을 겁탈한 제국이며, 타락한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망치’(예레미야서 50:23)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거주민들을 사정없이 침략 강탈하였고, 예루살렘의 심장이자 야훼와의 언약을 상징하는 성전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심문하고, 그 자식들을 처형하고, 눈을 빼어 쇠사슬로 묶어 그들의 땅으로 끌고 갔습니다(열왕기하 25:6~7).

 

또한 성전, 왕궁, 성벽 등 건물이라는 건물은 다 부숴버리고 거주민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가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서 절대 보호받을 것만 같던 야훼 신앙의 상징인 성전 내에 있는 집기류들과 거룩한 물품들을 빼앗겼습니다. 열왕기하 25장에는 일련의 사태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두 번의 침공(BC597년 여호야긴 왕 때, BC 586년 시드기야 왕 때)으로 거의 대부분의 도시들이 불타 사라졌고, 수많은 농촌마을 또한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무려 85%의 거주지가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급부상한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은 한때 인구가 일 만 오천 명에 이르는, 요시아 왕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커다란 도시가 되었으나, 전란 후 오랫동안 그 십분의 일인 일천오백 명을 넘지 않는 소읍 정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농촌의 경작지들은 거의 쑥대밭이 되었고, 대다수의 주민들은 유민이 되어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마을은 거의 비어버렸습니다. 유대 지역은 이후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한 채 버려진 땅이 된 것입니다.

 

바빌로니아는 이방 세력의 침략과 위협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예루살렘의 성전, 궁전 등을 모조리 박살내었습니다. 과거 히스기야왕 당시 이방인들의 침략에도 야훼에 대한 신앙을 굳건히 하여 위기를 넘겼던 나라였습니다. 훨씬 부강했던 북쪽의 이스라엘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훨씬 약소국이었던 유다가 100여년 가까이 무너지지 않고 연명하는 걸 보고 과연 하나님이시로구나!’를 연신 내 뱉었겠지만, 바빌로니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유다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바빌로니아가 이렇게 유다를 처참하게 짓밟기 전, 바빌로니아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선포하다가 두들겨 맞고 구금되고 모진 고문을 겪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와 그 일단의 무리들입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시작한 것은 요시야왕 즉위 후 13년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에 의해 야훼 신앙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중흥을 위한 시도가 재차 모색되었지만, 강대국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이 상황에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분명 그는 자신의 예언으로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20:7) 예언을 해갔습니다. 왕실과 기존 권력의 입장에서는 숨기고 싶은 사실을 떠벌리는 예레미야가 눈엣가시일 뿐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핍절한 민중의 삶을 힐링해 줘야 할 예언자가 꼭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듯 쉬지 않고 파멸을 외치니 미움을 살 수밖에요. 불온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파멸을 선언한 댓가로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그 고문이 끝나고 나서도 그는 입을 쉬지 않은 모양입니다(20:3~6). 예레미야 입장에서도 피로감이 몰려왔습니다. 파멸을 선언할수록 유다국이 파멸하기는커녕 자신의 삶만 고달파졌습니다. 천천히 말려 죽인다고나할까, 도래하지 않는 파국에 대한 허탈함이 커져 갔습니다. 그렇지만, 그 신탁의 운명을 한편으로는 체념하고, 또 다른 편으로는 뜨거운 불에 달려드는 부나비처럼 뛰어들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두가 고통 받는 상황이 본문 20장입니다.

 

예레미야가 겪는 이 참담함은 1919년의 국가정치적인 운명보다는 기해년인 2019년의 우리의 사회적 운명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시대가 맞닥뜨린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바빌로니아에 의해 국가가 파멸당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의 바벨론이 아니라 쉽고 빠르게 돈을 빌려 준다는 금융자본제국의 바빌론(바빌Loan)’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있습니다.

 

동영상하나 보겠습니다(바빌론 저축은행, 터치)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게으름의 표식처럼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빚이 없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 결혼을 위해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다들 빚을 집니다. 처음에는 대단히 어색하게 느껴졌던 대출 회사 광고도 이제는 너무나 범람하다보니 어색한 느낌도 없이 무감각해져버렸습니다. 길거리에는 대출과 관련된 명함들이 가을철 낙엽처럼 온통 거리를 뒤덮고 있고 TV와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빚을 진다는 일이 삶에 큰 일이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거대한 채무관계의 거미줄에 촘촘하게 얽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요즘 사회에 대해 어떤 수식어를 붙이는 게 유행이라 한다면, 지금 사회는 부채사회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지 않을까요? 이 정도면 과거 전통적으로 인간을 연결시켰던 혈통, 우정, 사랑 등은 사치스럽거나 거추장스러운 관계이고, 오로지 채무 관계가 가장 우선적인 인간관계라고까지 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진술들은 단순히 개인의 직관이나 느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가지 경제 관련 데이터들은 채무 관계가 곧 우리 삶의 최우선적인 과제이며, 우리 사회의 절대적인 지배구조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간단한 하나의 예를 본다면,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1450조원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워낙 큰 단위의 돈이다 보니 이 금액이 얼마나 큰 돈 인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이를 한 사람당 빚으로 환산하면 7531만원이라는 수치가 산출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세상의 빛을 처음 보고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나는 바로 그 아기의 인생 또한 마이너스(-)’ 7531만원이라는 통장 잔고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갚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채가 왜 심각한 문제인가요? 사실 부채라는 것은 본래 그 개념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채란 미래의 소득을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당겨쓰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사실 부채가 증가하는 만큼 소득이 따라잡을 수만 있다면, 빚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전제가 무너졌다는 점입니다. 부채를 소득이 따라잡지 못합니다. 부채는 갚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부채는 또 다른 부채를 부추겨 그 고통을 눈덩이 굴리듯 불어나게 하고, 그 빠르기 또한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서민들이 대출의 악순환 고리에 얽혀 삶의 낭떠러지로 내몰리게 되자 전화기, TV, 라디오에서는 돈 빌리기를 부추기는 선전이 쉴 새 없습니다. 2년 전만 해도 TV(유선방송 포함)에서는 고금리 대부업체 광고가 하루에 1364건이 방영되었답니다. 하루가 1440분이니 거의 1분에 한 번꼴로 대출하라는 말을 우리는 들어야 했습니다. 국가가 규제를 해서 지금은 덜해 졌지만 그 대신 대출광고의 형태, 광고의 질은 세련되고 더욱 부드러워졌습니다. 달콤하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공격적이고 노골적으로 돈을 빌리라는 말을 했다면, 지금은 대출과 관련된 스토리를 만들어 대출을 할 수밖에없는 이유를 말하는 감성전략을 사용한다거나, 고정 수입이 없어 1금융권에서 대출이 어려운 전업주부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 전용 대출, 파산이나 할부 자동차를 담보로 하는 대출 등, 특정계층을 공략하는 전략적이고 공격적인 대출 마케팅으로 변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사회는 끝없이 빚을 권하는 흉측한 사회가 되었지만, 그 괴물은 우리 앞에 선량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 달콤한 말들로 사람들을 대출의 늪으로 계속해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고, 누구도 이를 예언자의 시선으로 경고하고, 예레미야처럼 욕을 얻어먹으며, 목숨까지 걸고 1919년에 일본의 압제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듯이 이 시대의 경제적 침탈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이들이 없습니다. 설사 금융자본제국에 의해 침탈당한 우리는 곧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레미야처럼 고발한다면 예레미야가 당했던 수치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돈을 빌려서 살지 말고, 새로운 삶의 형태, 축소성장을 기저로 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교한다면 성장과 축복에 매몰된 교우들에게 조롱당하기 십상일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 2019년의 독립선언은 1919년의 그런 독립선언이 아니라 바로 이 바빌론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달콤하고 짜릿하게 한 방에 가난의 슬픔과 고통을 끝내줄 것처럼 말하는 바빌론과 그 아류인 소비적 삶에 대해 파산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래야 하는 근거는 소비생활의 철저한 자제를 통한 축소성장운동이 삶의 모토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비생활이 제한되지 않으면 제한된 자원을 가진 지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메스컴을 통해 듣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나라 쓰레기 수 천 톤이 필리핀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갈 곳을 찾지 못한다는 기사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량소비사회에서 방 안에 계속 쌓아두는 물건더미와 쓰레기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소비는 자신을 과대포장 하려는 데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소비적 삶을 살면 개인은 사라지고 소비하는 집단의 성원으로 인간이 전락하게 됩니다. 지구화시대의 시민운동의 여전사인 나오미 클라인은 노 로고(No Logo)’운동을 펼쳤습니다. ‘No Logo’는 한마디로 브랜드는 꺼지라는 말입니다. 칼레 라슨은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을 주창하고 나섰습니다. 바로 이런 소비와 대출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는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서 소비와 대출의 바빌론으로부터 독립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시 예레미야를 읽는 이유입니다. 바울신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조르지오 아감벤이라는 철학자는 최고의 빈곤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삶을 소유하지 말고 신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면서 절제하는 삶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신학이며 신앙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새로운 () (려주는) (Loan, 대출)’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소비하는 집단의 성원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전 세계로 이어진 소비와 대출의 포로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빚지지 않고 있다 하여, 포로의 상태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미년(1919) 독립선언을 기억하는 기해년(2019)소비와 대출의 삶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낭독해야 합니다. 그렇게 개개인이 자각에 의한 선언을 하고 난 다음에는 서로 연대하여 최고의 빈곤으로 이루어지는 벌거벗은 생명-호모 사케르의 세상을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게 우리 시대 우리의 진정한 독립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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