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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린도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59 추천 수 0 2020.11.04 05: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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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13:11-1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21185 설교보기 https://youtu.be/GCZ615dQf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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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 2020년 6월7일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예배에서도 종종 나오니까 교우 여러분들이 자주 들었겠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거나, 또는 알려고 진지하게 노력한 분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삼위일체 개념을 깊이 아는 게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살이가 바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굳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깊이 있게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 삼위일체처럼 까다로운 신학 용어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입니다. 저는 담임 목사이며 설교자로서 삼위일체를 주제로 하는 설교의 책임을 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을 기독교답게 만드는 중심이 바로 삼위일체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삼위일체에 기초한 기독교 영성이 신자들의 삶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1)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 마지막 단락에서 편지를 끝내는 인사를 전합니다. 13:11절에 기뻐하고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고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하기를 바란다는 신앙적 덕담이 나오고, 12절에 간단한 문안 인사가 언급된 다음에 마지막 13절에 매우 특이한 문장이 나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문장이 보기에 따라서 무난한 인사말로 읽히겠지만,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는 의식문(文)입니다.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이라면 이런 문장으로 인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주제가 언급됩니다. 예수와 하나님과 성령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은 유대인의 인사 예법에 나올 수 있겠지만 예수는 곤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나 예수를 앞세웠습니다. 이와 비슷한 언급이 흔하지는 않지만, 신약성경의 다른 데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고전 12:4-6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면서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이지만 주는 같으며, 사역도 여러 가지이지만 하나님은 같다고 말했습니다. 성령과 주와 하나님이라는 삼중 구조로 설명한 겁니다. 벧전 1:2절도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와 평화의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오늘 ‘셋째말씀’으로 읽은 구절에도 비슷한 형식의 문장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마 28:19).


이런 몇몇 구절이 삼위일체의 성경적 근거라고 말할 수 있으나 성경이 기록되던 1세기 중반과 후반에는 아직 삼위일체 개념이 기독교 교리로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철학과의 오랜 대화를 거친 4세기에 이르러서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정리해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본질(우시아)에서는 일치하나 위격(휘포스타시스)으로는 구분된다.” 이런 신학 명제를 들으면 우선 골치 아프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를 설교 주제로 삼기는 망설여집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는 용기를 내서, 예수 사건으로부터 3백여 년에 걸친 장구한 삼위일체 신학 담론을 염두에 두고 바울이 그 실마리를 제시한 고후 13:13절의 영적인 세계로 여러분은 안내해보겠습니다.

 

2)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바란다는 생각으로 바울이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거론했다고 바로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보통 은혜를 받았다거나 입었다, 또는 은혜롭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설교가 은혜로웠다고 말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고맙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거나 하나님의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예수의 은혜라는 말은 예수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특별한 행위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의 출생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마 1:23)이라고 붙였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 사건이 은혜인 실질적인 이유는 예수로 인해서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구원해야 한다는 강요와 유혹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로마서 용어로 표현하면 자기의(自己義)라는 짐에서 벗어난 겁니다. 비유적으로,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올려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난 학생의 경우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도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과 비슷하게 굴러갑니다. 끝없이 경쟁해야 하고, 점수의 높낮이로 일희일비합니다. 그런 사회 구조적인 경쟁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개인적인 욕구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차고 넘칩니다. 소극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상대를 지배하면서 만족해합니다. 만약 삶의 완성이 예수에게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이런 일상의 문제로 과민해지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실제로 삶이 완성된 경험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통해서 우리 인생이 실제로 완성될 수 있을까요? 비유적으로 간략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마음이 별로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최고급 식당에 가서 10만 원짜리 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존경하는 사람과 재래시장 안의 허름한 식당에서 5천 원짜리 칼국수를 먹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요? 이게 딱 떨어지는 비유는 아닙니다만 삶의 완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판단하게 도와줄 겁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 가까웠기에 제자들은 그와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생명 완성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은혜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바울이 제시한 둘째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길거리나 지하철 등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의 가장 자주 쓰는 문장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을 듣는 대다수 행인은 별로 감동하지 못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의 신세가 형편없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받는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어떤 이는 “그래, 너희 예수쟁이들만 하나님이 사랑하실 거야.”라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면 예수쟁이들이 먼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교회 밖의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사랑의 능력을 느끼지 못하니 영적인 고아처럼 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이 와닿지 않으면, 자연의 사랑이라고 바꿔서 봅시다. 우리가 자연의 사랑을 받았다는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사랑의 힘에 붙들린 겁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사람도, 고아로 살아가는 사람도 자연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제외된 사람은 없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국내외적으로 많습니다. 사람이 잘못한 부분은 찾아서 고쳐나가야 하고, 서로 도와야 할 부분은 연대해서 해결해나가면 됩니다. 이런 전 지구적 재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쌀을 씻어서 밥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은총이자 사랑입니다.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은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사랑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순간마다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감수성이 더 예민한 사람은 자신이 지금 존재하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을 흘릴 겁니다. 하나님은 자연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자연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하는 만물의 근원이십니다.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궁극의 깊이에서 사랑하십니다. ‘탕자의 비유’가 말하듯이 그의 사랑은 우리의 허물과 방탕과 유치함까지 감싸 안고 기다리십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인사말을 하는 중입니다.

 

4) 세 번째 주제는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교통한다는 말은 헬라어 ‘코이노니아’의 번역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친교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성령과 밀접한 친교를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어떤 교인들에게는 협의로만 인식됩니다. 방언, 입신, 신유 등등, 일종의 은사주의 운동으로만 여깁니다. 오해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으로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활동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라는 좁은 틀 안에 갇혀서 살다가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었다고 합시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신 겁니다. 어떤 사람이 허무주의에 떨어졌다가 다시 활기차게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합시다.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일어난 겁니다. 이런 영을 일상에서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과 같은 신록의 계절에 그 신록을 보고 가슴이 뭉클하여 생명 충만을 느끼는 사람이 있지만 무감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삶을 두려워하고 지루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고, 늘 새롭게 빛으로 경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에 사람이 만든 이념과 가치 체계에 의해서 제한받지 않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십니다. 예수 제자들이 감옥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있다면 당연히 악령이 있겠지요. 성경은 이를 사탄, 마귀, 바알세불 등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악한 영은 우리를 의심하게 하고 폭력적으로 만들고 불안하게 합니다. 성령과 악령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전 12:8절 이하에 나오는 은사 목록에 따르면 영 분별의 은사도 나옵니다. 요일 4:1-6절에는 영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아닌지를 분별하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갈 5:16-26절에는 성령의 열매에 관한 목록이 나옵니다. 전체가 아홉 가지입니다. 거꾸로 성령을 거스르는 일에 관한 목록도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은 성령과의 친교를 맺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악령을 따르게 됩니다. 악령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성령의 부재가 바로 악령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습니까. 빛이 없으면 어둡듯이 우리가 성령과의 친교가 없으면 삶이 위축되거나 과장되거나 파괴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과의 코이노니아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발생하기를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5) 바울이 고후 13:13절에 제시한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핵심 주제는 일단 구분되는 게 분명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자기의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명 창조주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만듭니다. 셋째, 성령의 코이노니아는 지금 생명의 힘을 충만하게 느끼도록 해줍니다. 여러분도 세 항목을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세 항목을 각각 잘 깨닫고 살아도 기독교가 제시하는 삶의 깊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세 가지 하나님 경험이 구분되지만 동시에 일치한다고 말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뜻입니다. 이제부터의 그 관계를 설명할 테니 잘 들어보십시오. 전달이 잘되도록 성령이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고, 성령과의 친교를 통해서 영적으로 생명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깊이 들어가고, 성령과의 친교로 인한 생명의 신비를 느낍니다. 셋째, 성령과의 친교를 누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에 더 가까이 갑니다. 이런 설명을 단순히 삼위일체 신학 이론으로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 삶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풍요롭게 하는 실질적인 삶의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을 이미 경험한 분도 있겠으나 경험하지 못한 분도 있을 겁니다. 경험했더라도 그 원리는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두 관계만 명확하게 하면 그 핵심 원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과의 친교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입니다.

 

6)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발생한 구원을 우리는 가장 궁극적인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게 은혜인 이유는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선물로 받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누가 왜, 그리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는 방식으로 이루셨다는 게 대답입니다. 여기서 예수와 하나님이 어떤 관계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즉 절대 생명을 본 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유일한 자입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온전하게 드러내실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율법의 주님이 아니라 복음의 주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알고 믿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영혼의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령과의 친교에서 현실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알고 경험하려면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각자의 인생에서 각자가 주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운명을 거들떠보지 않게 만듭니다. 성령만이 그 사실을 제대로 보게 하고 알게 하며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요한복음이 이 사실을 정확하게 해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했다고 전합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성령이 제자들을 가르칠 것이라는 설명이 요 14:26절에 이어집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여러분은 실제로 기독교 신앙으로 살고 있으신가요? 무늬만 기독교인은 아닌가요? 기독교 신앙이 여러분의 삶을 실제로 깊고 풍요롭게 이끌어간다고 확신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각자가 믿는 분량대로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다음의 한 가지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갈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의 영혼에서 하나 될 때 여러분은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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