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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 성경본문 : | 마2:1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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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 | 주님의교회 |
나사렛 사람 예수 Jesus of Nazareth
마2:13-23
1.애굽으로 피난을 가다
2.이스라엘로 돌아오다
3.나사렛에서 살게 된 이유
4.예수님의 어린 시절
5.예수님이 왜 인간으로 살았나?
6.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유
마태복음 2장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은 마태복음만의 전승입니다. 1-12절은 동방박사 이야기이고, 13-18절은 요셉이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한다는 이야기이고, 19-23절은 애굽에서 돌아와 나사렛에 거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1.애굽으로 피난을 가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오늘 설교 본문에 속하지 않으니까 간략히 짚고 건너뛰겠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예수와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에게 동방박사들이 와서 경배를 드리면서 세 가지 예물,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고 떠난 뒤에 요셉은 천사가 나타나는 꿈을 꿉니다.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고 하니 가능한 빨리 이곳을 떠나서 애굽으로 피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만나기 전 도움을 받으려고 헤롯 왕을 찾아갔을 때 헤롯은 속으로 예수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따르면 악몽을 꾸다 잠이 깬 요셉은 그 즉시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요셉 가족은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머물렀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런 일이 구약 호 11:1절에 의한 것이라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예수의 운명이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 헤롯은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예수가 태어난 날짜를 계산해서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헤롯은 원래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유대인 로마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헤롯은 자신의 세 아들을 반역으로 몰아 처형했고, 자신의 장례 때 사람이 슬퍼하도록 각 가정에서 한 사람씩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요세푸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 실제로 그런 살인사건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애굽의 바로는 산파들에게 명령하기를 유대 산모가 출산하는 아이들 중에서 남자 아이는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예수의 운명이 바로 유대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모세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마태가 추가했을 수도 있습니다.
2.이스라엘로 돌아오다
세월이 흘러 헤롯이 죽자 요셉은 다시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마 2:20).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애굽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감히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같습니다. 성경은 간단하게 묘사했지만 그 안에서는 수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습니다. 요셉이 꿈에서 천사를 만나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애굽을 당장 떠날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활 근거지를 포기하기도 어렵고,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요셉은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내와 아들 예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유대 지역에서 왕위를 계승한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는 아버지 헤롯 못지않게 난폭했습니다. 요셉은 유대 지역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의 북쪽 변방인 갈릴리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도 작은 마을인 나사렛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나사렛에 지인이 있었을까요? 친인척이 있었을까요? 요셉의 직업인 목수 일을 할 만한 조건이 들어맞은 걸까요? 그 숨은 사연을 우리는 아는 게 없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는 ‘가버나움’이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대부분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나사렛까지는 약 50km 걸어서 하루가 조금 더 걸리는 더 깊숙한 산악지대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사렛까지는 약 150km 거리인데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는 걸어서 3-4일 거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중앙정치에서 벗어나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목수이신 아버지를 따라 의자나 책상을 만들면서 당신의 때를 조용히 기다리신 것입니다.
3.나사렛에서 살게 된 이유
마2:23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복음 기자는 당시 예수님에게 붙어 다니던 호칭인 ‘나사렛 사람’이 구약 선지자의 말에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표현이 구약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11:1절이 이에 해당된다는 각주가 달렸습니다. 사11:1절은 이렇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한 가지가 나온다고 하는 표현에서 이 ‘가지’는 히브리어로 ‘내체르’라고 합니다. 그 발음은 구약이 말하는 나실인(삿13:5)과 비슷합니다. 나사렛도 이런 발음과 연결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여기서도 다시 예수가 유대 민족의 역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말해도 충분할 텐데, 왜 나사렛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일까요?
요1:43절 이하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은 별로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마을입니다. 거기서 위대한 인물이 나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마태복음을 비롯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 자체를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세상 마을에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인성, 인간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예수님의 어린시절
어렸을 때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를 따라서 나사렛에 간 예수님은 그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았을까요? 소년이 되면서 산과 들을 돌아다니고, 계절에 따라서 친구들과 여러 가지 놀이를 했겠지요. 다른 이의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서 포도나 무화과를 따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춘기가 되면서 같은 또래의 여자들을 보면 마음이 뛰었겠지요.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는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던 몇 시간 동안 의식이 혼미해질 때 그런 유혹이 찾아온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예수가 받은 최후의 유혹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가정을 꾸리고 사는 거였습니다.
그 소설에서는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사는 것으로 나옵니다. 목수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예수에게 제자들이 몰려들어서 따지고 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전하던 우리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쓰러뜨리고 머리를 발로 밝습니다. 예수는 고통을 느끼면서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고 외치면서 다시 정신을 차립니다. 예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을 나사렛이라는 지명과 일치해서 부르는 이유는 그가 우리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 발도르따 라는 수녀가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이 현현하여 받아 적으라 해서 예수님의 일생을 받아 적었다고 하는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일독했는데 예수님이 사셨던 집의 울타리 밑에 핀 꽃의 모양까지 자세하기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살았던 삶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5.예수님이 왜 인간으로 살았나?
만약 예수님이 인간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면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하는 우리들은 인간들과 동떨어진 신화 속에 나오는 먼 예수님을 따라 살지는 못하고 우상으로 ‘숭배’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으로서 독재자가 무서워 숨기도 했고, 불의를 보고는 화를 내기도 했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 눈물도 흘렸습니다. 우리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현실정치에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과는 전혀 다른 위선적인 삶을 사는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불같이 화를 내며,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독설을 날렸으며, 종교의 본질을 벗어난 성전에서 장사에 눈먼 사람들의 좌판을 뒤집어 엎으시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삽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배설합니다. 모든 게 흙에서 와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만 지금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소중합니다. 소중할 뿐만 아니라 거룩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시면서 오늘날 우리가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해야 한다는 주장도 간혹 듣습니다. 정치도 구체적인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정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른 정치를 위해서 투쟁할 때는 투쟁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건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그 안의 역사와 인간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마저 나사렛 동네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삶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는데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지요.
6.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유
나사렛 예수가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서 세상에서 살았다면 그를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지, 즉 그를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취미생활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을 한 후 결혼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파혼할 생각을 합니다. 그때 요셉에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는 부정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임신한 것이며,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18)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이 사건을 사7:14절을 인용해서 해명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은 28:20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계 전도의 사명을 내리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출생 순간과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장면에서 똑같이 하나님이, 또는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을 시공간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건 아닙니다. 성찬예식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영적으로 거기에 임재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절대 생명으로의 변화인 부활이 성찬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경험되는 겁니다. 그런 경험으로 우리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생명을 얻는 경험입니다. 기쁨과 자유와 평화의 영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신출귀몰하는 마술사나 인류 역사를 쥐락펴락하는 전쟁 영웅, 또는 노벨상을 받는 위대한 학자가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촌 동네에서 우리와 비슷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그 나사렛 예수가 이제 우리와 항상 함께 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과 그 일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통치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실제 삶에서 어느 정도나 분명하게 누리고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을 맞아하여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이시기에 인간들을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서도 언제나 주님을 경험하며 생명통치를 받는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고자료
1.The Renovare Spiritual Formation Bible(두란노)
2.정용섭 목사<나사렛 사람 예수>2017년 1월1일 설교 발췌
3.2017.12.24. 주님의교회 성탄주일낮예배 설교원고
4.2020.9.27. 햇볕교회 주일예배 설교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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