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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0:40-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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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21915 설교보기 :https://youtu.be/mr-kSfmzUAs |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2020년 6월28일
마태복음 10장은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시련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다른 공관복음에 산발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마 10장에는 한 묶음으로 나옵니다. 2-4절에 열두 명의 제자 이름이 나열됩니다. 그 뒤로 15절까지 제자들이 유랑 전도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16-23절에는 제자들이 받아야 할 박해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24-33절에는 세상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이 나옵니다. 34-39절에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말씀과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 자가 목숨을 얻는다는 역설적인 문장이 나옵니다. 맨 마지막에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0:40-11:1절이 나옵니다.
마지막 11:1절은 전체 상황에 대한 간략한 보도니까 남겨두고 주로 마 10:40-42절에 집중해서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본문을 대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해하기 까다로운 내용은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니까 우리도 상을 받으려면 제자답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결론도 이미 나온 셈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을 이 본문의 좀 더 깊은 세계로 안내해보려고 합니다. 저 스스로 기대가 됩니다.
1)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비장하게 들립니다. 예수 제자들은 온갖 어려움을 당해야만 합니다. 10:14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볼 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1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에는 제자들이 유대교 산헤드린 공회에서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 18절에는 로마 총독에게 끌려간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박해와 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의 앞 구절인 39절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박해와 고난은 마태복음이 기록된 1세기 후반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많은 제자와 기독교인들이 고초를 당했고, 급기야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유럽 역사의 1세기 말과 2세기 초까지, 그 뒤로도 상당한 세월에 걸쳐서 교회는 환영받지 못하는 집단으로 취급당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두고 40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졌을까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첫째, 제자들은 예수와 자신들의 운명이 같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인식이 없다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둘째,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뚫어봐야 합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 운명에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입니다. 즉 예수를 통한 궁극적인 생명 경험입니다. 이 두 사실이 전제될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까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시련에 근거해서 40절 말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 제자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는 것이고, 예수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믿을 수 있다면 배척당하는 자신들의 상황을 버텨낼 수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 제자는 단지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우리 모두를 가리킵니다.
2) 41절은 40절에 대한 부가설명입니다. 선지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기에 해당하는 상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겁니다. 그들에게 선지자와 의인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의 실질적인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지자와 의인들로 인해서 어두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진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선지자와 의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이 큰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자신들이 선지자와 의인처럼 살지 못해도 선지자와 의인들을 높이 평가하고 극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선지자와 의인들도 자신들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간접으로나마 선지자와 의인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이에 합당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 41절이 말하는 선지자와 의인의 삶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마 6:33) 예수 말씀에 해당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에게서 신탁을 받아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의인은 정의와 공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통치에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특징입니다. 예수 제자들은 선지자와 의인의 삶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을 배척한다는 것은 곧 선지자와 의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그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배척받는 자신들의 상황을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면 신세 한탄에 떨어지겠지요.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3) 40절과 41절 말씀으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큰 힘을 얻었을 겁니다. 자신들의 복음 사역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42절은 그 사실을 좀 더 직접 설명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작은 자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제공하는 사람은 상을 잃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말 그대로 작은 자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대접받을 위치에 앉아있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권력이 없고, 돈도 없습니다.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살아가는 데에 불편한 일만 그들을 기다릴 뿐입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시절에 기독교인들은 회당에서 출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회당에서 출교당한다는 말은 유대교와 척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박해로부터 보호해줄 제도적인 안전장치가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상황이 해결되는 기미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 떨어지면 사람들은 대개 주눅이 듭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여기 10년 동안 취업 준비를 했으나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청년이 있다고 합시다. 자신감은 사라지고 막막한 심정으로 살아갈 겁니다. 이런 일이 반복하면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보잘것없는 제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면 상을 받습니다. 41절에도 상을 받는다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루터는 상을 받는다고 하지 않고 보상을 받는다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영어 성경도 상이라는 뜻의 prize가 아니라 보상이라는 뜻의 reward로 번역했습니다. 상이나 보상이나 비슷하기는 하지만 보상은 거기에 합당한 대가가 강조되는 단어입니다. 상은 명예로 끝날 수 있지만, 보상은 아주 실질적인 겁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받는 우등상은 상장만으로 끝날 수 있지만, 보험회사에서 업적을 가장 크게 올린 직원에서 주는 보상은 거기에 합당한 돈을 받는 경우와 같습니다. 보상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대목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표현했습니다. 헬라어 “아멘 레고 휘민”의 번역입니다. 복음서에는 강조할 때 이 ‘아멘’이 사용됩니다. 어떤 문장에는 ‘아멘’이 두 번 반복됩니다.
작은 자와 냉수 한 그릇은 서로 통하는 단어입니다. 둘은 모두 세상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소소한 것들입니다. 비슷한 의미의 단어가 앞에도 나옵니다. 마 10:29절에 나오는 참새가 그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는 푼돈인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작은 자, 냉수 한 그릇, 참새 두 마리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 하나님의 일과 연관되고, 하나님의 보상을 불러온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여러분은 이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집니까? 고개가 끄덕여지긴 하겠지만 실제로 작은 자로 산다거나, 냉수 한 그릇이나 참새 두 마리에게 붙잡혀서 살기는 원하지 않을 겁니다.
4) 그렇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가리키는 어떤 궁극적인 세계가 손에 잡히지 않으면 예수 말씀대로 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자인 제자들, 냉수 한 그릇이라는 작은 사물, 그리고 ‘아멘’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보상에 얽힌 생명의 깊이를 모르면 공허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세상의 큰 힘과 비교할 때 작은 자에 속하는 예수 제자들은 사실 아주 특별하게 큰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냉수 한 그릇에 하나님의 보상이 따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특별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세상은 주로 밖으로 보이는 것들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자신이 처리할 수 대상이 크고 많을수록 능력이 큰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두 달쯤 전에 우리나라에서 3백 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21대 총선이 있었습니다. 의원이 되려고 나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각 당의 경선까지 계산하면 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은 수천 명이 넘습니다.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재량권은 엄청납니다. 각각의 국회의원은 작은 기업체를 운명해도 될만한 인적, 물적 재량권을 국가로부터 받습니다. 국회의원이 된 다음에는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또 경쟁합니다. 다른 직업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되긴 합니다.
생명의 본질에 속하는 하나님의 일에는 이런 세상의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작은 자가 큰 자일 수 있습니다. 큰 자는 오히려 작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내용의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어린아이와 같은 자는 오늘 본문의 작은 자이고 냉수 한 그릇이며, 참새입니다. 이런 말씀을 패배주의자의 자기 합리화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제자들은 당시 유대교 당국이나 로마 제국의 관점에서 작은 자였으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결코 작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 가장 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음의 사실이 중요합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은 냉수 한 그릇처럼 작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우주 전체의 시간에서 볼 때 다 한순간에 불과하듯이 말입니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저는 대구 샘터교회가 교인 수십만 명에 이르는 서울의 아무개 교회보다 작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는 크고 작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국이 가난한 북한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보면 다 도토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로마 제국이 지금 흔적도 없지 않습니까. 개인이나 나라 모두가 명함을 내밀 수 없을 정도로 작기에 누가 하나님 나라에 기대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냉수 한 그릇마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특별했습니다.
5) 오늘 본문 42절의 마지막 문장은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입니다. 이 말씀이 유대인의 전통에서 살았던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시간이 끝나면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은 ‘올드 에온’이고, 앞으로 올 세상은 ‘뉴 에온’이었습니다. 제국과 폭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참된 평화와 안식을 이뤄내지 못합니다. 장차 올 세상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기에 영원한 평화가 현실로 자리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할 세상에서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확신할 수 있다면 제자들은 사면초가와 같은 그 상황을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이에 관한 비유가 자주 나옵니다.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가 오기를 기다리는 신부와 같습니다. 신랑이 올 때 등불을 켤 수 있도록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처녀가 되라고 말합니다(마 25:1-13). 이런 희망과 설렘없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완성하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장 적나라한 문학 방식으로 묘사한 구절은 바울이 쓴 살전 4:13절 이하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예수가 재림할 때 살아남은 자들은 공중으로 올림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시적으로 멋지고 참된 묘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다음에 받는 상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받는 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훗날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게 될 터이니 지금 받는 어려움을 인내해야 한다는 말을 속임수처럼 듣습니다. 잘 보십시오. 앞으로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이미 여기서 받았다는 의미도 함축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제자들의 삶에 하나님의 보상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사람은 ‘이미’ 여기서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삶에서는 ‘이미’ 모든 것이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해당하는 그런 새로운 삶을 예수에게서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설교한 그대로 사느냐, 하고 저에게 묻는 분들에게 저는 큰소리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작은 소리로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작년 10월부터 저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서 물을 한 잔 마십니다. 그 물이 알프스 빙하에서 (택배로) 왔다는, 또는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서 왔다는 느낌으로 마십니다. 그 순간에 저는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오신 냉(생)수입니다. 그를 마심으로써 저는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충만해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데에 더는 보충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미’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보상입니다. 보상을 약속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받았으니 냉수 한 그릇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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