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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에서

창세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84 추천 수 0 2020.12.01 18:41:30
.........
성경본문 : 창32:22-3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23158 설교듣기 :https://youtu.be/gJIIV3SIX4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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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에서

창 32:22-31, 성령강림 후 아홉째 주일, 2020년 8월2일

 

창세기에 나오는 대표적인 족장 세 사람을 손에 꼽으라면 아브라함, 야곱, 요셉입니다. 이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창세기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야곱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가서 20년간 타향살이를 했고, 늙어서는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 신앙은 하란으로 도망갈 때, 그리고 거기서 일가를 이룬 다음 돌아올 때 경험한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깊어졌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돌아올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씨름하는 야곱

야곱은 고향 브엘세바를 떠난 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많은 가족과 가축 떼를 끌고 오기에는 너무 먼 길입니다. 요단강 지류인 얍복강 앞에 이르렀습니다. 당시는 큰 가축 떼를 몰고 갈 때 주로 기온이 선선한 밤을 이용했기에 야곱도 밤에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먼저 건너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축 떼도 몽땅 보냈습니다. 염소, 양, 낙타, 소, 나귀 등등입니다. 이제 야곱 자신만 건너가면 됩니다. 그 순간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사람인지 천사인지 마귀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매우 특별한 존재가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그 어떤 사람과 씨름했다고 합니다.


야밤에 얍복강 나루에서 두 사람이 씨름하는 장면은 기괴해 보입니다. 야곱에게 힘으로는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 어떤 사람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관절이 어긋났지만, 야곱은 끝까지 버텼습니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날이 새려 하니 나를 가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보통 통속적인 귀신 민담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자신과 씨름한 대상이 누군지를 그 순간에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나를 축복하지 않고는 가게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대화가 이어집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이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원래 이 단어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기를!”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야곱은 자기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준 상대방에게 “당신 이름을 알려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목은 호렙산의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어본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에게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출 3:13)라는 이름 아닌 이름을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라는 대답만 듣습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존재에게서 축복을 받습니다. 본문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나오지 않지만, 야곱과 씨름했던 그 어떤 사람은 그 순간에 그 자리를 떴겠지요.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는 설명이 본문에 따라옵니다.


“브니엘”이라는 단어에서 “엘”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근동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하나님 호칭입니다. “이스라엘”의 “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니엘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 이야기에 나오는 또 다른 하나의 전승과 관련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다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모세는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출 33:18 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등만 본 모세와 비슷한 것을 경험한 겁니다. 모세나 야곱은 모두 절대 생명인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 경험을 모세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말로, 야곱은 “브니엘”이라는 단어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표현된 하나님 경험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의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와 씨름하고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곱과 비슷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 소나무 기둥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소나무 뿌리를 몇 개 뽑으면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열정적인 기도 행위 자체가 잘못은 아니나 그것보다는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게 훨씬 좋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에서 야곱이 브니엘에서 들었던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에서 핵심은 절대적인 생명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 절대적인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어서 우리가 아직도 다 알지 못합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삽니다. 어릴 때의 여러분과 지금의 여러분과 죽기 직전의 여러분 중에서 어느 시기의 여러분이 실제로 여러분 자신인지 모릅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절대적인 생명의 깊이와 신비는 하나님 안에서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명의 깊이와 신비를 경험하셨습니까? 거기에 실제로 관심이 있습니까? 그런 경험과 관심 없이 기독교 신앙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절대 생명의 깊이와 신비인 하나님을 경험했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물증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을 물증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거와 비슷합니다. 제가 아는 기준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절대 생명으로 경험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의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즉 하나님 이외의 것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상대적인 사랑에 머물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이를 더 절감하려면 죽음을 생각하면 됩니다. 일주일 뒤에 죽는다는 게 분명하다면 여러분은 집과 땅과 주식과 해외여행 계획을 비롯한 모든 일상의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인간답게 죽는 길이 무엇인지만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어질 영원한 안식만을 생각합니다. 이런 영원한 안식을 미리 당겨서 사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브니엘에서 바로 그 절대 생명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30(후)절에서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원하실 겁니다. 저도 이 한 가지만이 제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의 이 고백을 저의 버전으로 바꾸면 “내가 절대 생명과 안식을 하나님 안에서 이미 경험했으니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 그 경험을 안고 살겠다.”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브니엘 경험에 이를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뜬구름 잡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인지 신학생일 때인지 모르겠으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을 읽고 삶에 새로운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알은 세계다. 새는 알에서 깨어난다.” 헷세의 다른 책 『싯다르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젊은 싯다르타는 강물을 보고 만물의 이치를 깨닫습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도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일상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오늘 야곱 이야기는 그 깨달음을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의미의 브니엘이라는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홀로 남은 야곱

오늘 본문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야곱은 20년 만에 금의환향하는 중입니다. 이제 얍복강만 건너면 고향 브엘세바는 한걸음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20년 전 자기를 죽이겠다고 벼르던 형 에서가 4백 명의 장정을 데리고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사실입니다. 형이 어떤 생각으로 자기를 맞으러 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형이 자기를 공격하면 어떻게 피해야 할지 방법을 짰습니다. 소위 플랜A와 플랜B도 세웠습니다. 그 내용이 창 32장 1절 이하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형에게 줄 선물을 넉넉하게 준비해서 먼저 보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더는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밤에 일어나 일꾼을 시켜서 자기 가족을 먼저 건너가게 하고, 나머지 가축도 건너가게 했습니다. 이제 야곱 홀로 남았습니다. 그 장면을 본문 24절이 이렇게 간략하게 묘사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하나님 경험의 출발은 “홀로 남았다.”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경험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보십시오. 대부분은 홀로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앞에서 언급한 모세도 그렇고 이사야와 예레미야도 그렇습니다. 야곱이 젊은 시절을 다 바쳐 모은 모든 재산과 가족은 지금 야곱 곁에 없습니다. 그 재산과 가족은 야곱을 확인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밤중입니다. 그야말로 절대 고독의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지구에서, 더 나아가 우주에서 혼자라는 사실을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으나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경험을 정면 돌파할 결기가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은 홀로 있는 걸 두려워합니다. 외로움을 불행한 거로 생각하여 계속 누군가를, 그리고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친구를 찾고, 오락거리를 찾고, 자식과 부모를 찾고, 돈을 찾습니다. 스마트폰이 보편화한 후로는 이런 현상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짧은 시간도 홀로 있지 못한다고 합니다. 평소에 죽음과 같은 절대 고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독자로서만 만날 수 있는 절대 생명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말은 너무 고상해서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인정합니다. 우리는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쫓기면서 삽니다. 지금 당장 출가 수도승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기에, 그리고 주기적으로 부동산 문제로 세상이 소란해지기에 야곱처럼 홀로 남아서 절대 고독 안으로 침잠한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로 들립니다. 여러분의 형편이 제각각이기에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처럼 재산과 가족과 경력과 오락거리로 뒤범벅된 일상을 부단히 끊어내는 순간을 붙들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경험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어떻게 일상을 단절해낼 수 있을까요? 이것도 각자의 형편이 다르기에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 말씀드리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인 차원에서 야곱처럼 홀로 남는 시간을 일상에서 확보하는 것입니다. 기도, 성경 읽기, 신학책 읽기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텃밭 가꾸기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산티아고 순례에 나섭니다. 자신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끊어내고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순간입니다. 일종의 수행입니다. 수행의 핵심은 “홀로”입니다. 홀로 남았지만, 전혀 외롭지 않은 경험입니다. 외롭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야곱의 고백처럼 생명이 보전되는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앞에서 말한 수행의 종합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성전에 모여서 제사를 지냈고,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회당에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시편을 읽으며 설교를 들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안식일 전통과 회당예배 전통을 약간 다르게 해서 이어받았습니다. 주일에 모여서 성찬식을 거행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바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며, 세상 마지막에 생명을 완성하신다는 약속을 찬양하는 겁니다. 오늘도 우리는 생명의 원초적 능력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외칩니다. 브니엘에서 야곱이 경험했던 바로 그 하나님을 예배에서 찬양하는 겁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사실은 그 어떤 사사로운 일도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사로움이 개입하지 말아야만 예배가 예배다워집니다. 천사와의 씨름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누군가에 관해서만 생각을 모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죽는 순간에 예배 때의 경험이 그대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총이 실제로 저에게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있을 때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수행하는 심정으로!

 

절뚝거리는 야곱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에 아주 특이한 표현이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야곱은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였기에 몸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해가 돋았습니다. 지난밤에 아무리 특별한 것을 경험했다고 해도 해가 돋았으니 야곱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일상에서는 다시 험한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걱정거리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 야곱이 겪은 일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불행한 사건을 맛보았습니다.


해가 돋아 길을 가는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다가 당한 장애로 다리를 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 건강해서 잘난 척하면서 뛰어다니기보다는 그런 장애를 안고 사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은 남은 세월 평생에 걸쳐서 다리를 절 때마다 브니엘에서 겪은 놀라운 일을, 즉 하나님의 얼굴에 대한 경험을 기억했을 겁니다. 그 장애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의 흔적(스티그마)이 아닐는지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브니엘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그런 경험이 여러분의 남은 인생 여정에서 더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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