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빌3:4-14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26269 설교보기:https://youtu.be/-CU7DkRrLJk |
자기 의(義)와 하나님의 의
빌 3:4-14, 창조절 다섯째 주일, 2020년 10월4일
성경에는 예상외로 험한 이야기가 제법 많이 나옵니다. 자녀와 함께 읽기에 민망한 대목도 있고, 격한 논쟁도 나오고 독설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갈 1:9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일갈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빌 3:4-14절 바로 앞 구절인 빌 3:2절에서도 바울은 욕설에 가까운 말을 합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심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그가 개라고 부른 이들은 갈 1:9절에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부른 그 대상입니다.
바울이 비난하고 있는 그들은 부도덕하거나 파렴치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사람들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들은 오히려 매우 경건하고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몸을 상해하는 일”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의 할례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아이들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 의식을 행했습니다. 할례는 단순히 몸의 흔적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구약의 율법인 토라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바울이 할례파라고 부른 이들은 할례와 토라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스펙을 쌓듯이 경쟁적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개라고 부르고, 저주받으라고 독설을 날린 겁니다. 옆에서 듣기에 민망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까요? 작은 차이를 너무 부풀려서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건 아닐까요?
바울이 과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할례파들이 먼저 바울을 비난하고 배척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여러 편지에는 할례파들이 어떻게 바울을 곤란하게 했는지가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개척한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들로 인해서 어떤 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할례파의 주장이 결국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본질만 훼손되지만 않는다면 어떤 말을 들어도 바울은 참았을 겁니다.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는 건 참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 하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본질에 천착하느냐 혼합주의에 떨어지느냐 하는 문제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오늘 본문이 정확하게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기독교 진리 안으로, 그리고 삶의 중심 안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배설물
바울은 할례파의 주장을 육체 자랑이라고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가문, 도덕성, 학문적 업적, 구제와 종교 행위 등등이 다 포함됩니다. 속된 표현으로 “자랑질”에 속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추석 때 친인척을 만나서 대화하는 중에 그런 말들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육체 자랑이라는 점에서 바울은 꿀릴 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 내용이 5-7절에 열거됩니다. 할례,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바리새인, 과거에 교회를 박해하던 열정, 흠이 없는 율법의 의(義) 등등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당시 유대인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에 속했습니다. 다소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종교 면에서나 학문 면에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람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도 능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가 헬라어로 쓴 편지 중에서 최소한 10편이 신약성경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더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그런 길로 계속 나갔으면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유대 랍비로 살았을지 모릅니다.
바울이 열거한 육체 자랑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높이 평가되던 것들입니다.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내세우고 싶은 것이나 자식들에게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것들을 손에 꼽아보십시오. 우리 인생의 목표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8절에서 자기가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랑거리가 없어질까 노심초사하지 않습니까. 자랑거리가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삽니까. 그래서 없는 자랑거리도 만들어내고, 그걸로 서로 부러워합니다. 바울처럼 살려면 출가 수도승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말이 안 됩니다.
배설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성경의 “스쿠발론”을 번역한 겁니다. 헬-영 성경에서 이 단어를 찾으면 dung(똥), garbage(쓰레기)로 나옵니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rubbish(쓰레기)로 나옵니다. 우리말 공동번역은 “쓰레기”로, 새번역은 “오물”로 번역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배설물”이 가장 적당한 번역입니다. 배설물은 나쁜 건 아닙니다. 우리가 배설하지 못하면 죽으니까 배설물은 필요합니다. 배설물에는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배설물은 똑같습니다. 비싼 음식을 먹든지 값싼 음식을 먹는지 먹고 밖으로 나오는 배설물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착한 사람의 배설물과 나쁜 사람의 배설물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둘째, 배설물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배설물에는 아무런 영양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생물은 동물의 배설물을 먹고 살지만, 같은 동물들끼리는 배설물로 살지 못합니다. 필요 없기에 배설물은 버려야 합니다. 자기 배설물을 쌓아두면서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쓰레기 창고처럼 채워두는 사람처럼 정신이상자 외에는 없습니다.
지난날 자신이 자랑으로 여기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바울의 진술은 정신적으로 수준 높게 보이려는 “공자 왈”이 아닙니다. 자신의 실존적인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고백입니다. 열거한 자랑거리에는 자신의 참된 생명을 유지해주거나 풍요롭게 하는 영양분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뚫어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훌륭하다고 칭찬받고 인정받아도 그는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 훈장을 받아도 우리 영혼이 자유로워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 성취에 매달릴수록 바울의 영혼은 더 경직되었습니다. 경직되면 불안하기에 더 매달리게 됩니다. 도박이나 마약처럼 악순환입니다. 바울의 이런 고백에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방향 전환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삶의 완전한 방향 전환이 없으면 안 됩니다. 대충 모양만 조금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중심을 바꿔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바닷가에 서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바다와 반대쪽만 바라봅니다. 그의 눈에는 들판과 산만 보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의 눈에는 물과 배와 갈매기와 수평선이 보입니다. 그 두 사람은 자기가 보는 방향을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을 아무리 크게 뜨거나 속도를 내서 걸어도 다른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방향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그 순간에 갑자기 세상은 다른 모습으로 들어옵니다. 그걸 가리켜서 성경은 “메타노이아”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의에 이르는 길을, 즉 구원의 길을 완전히 다른 데서 찾았기에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9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의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율법에서 온 의와 하나님에게서 온 의입니다. 여기서 의(義)는 구원, 또는 참된 행복과 같은 뜻입니다. 율법에서 온 의는 사람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가장 행복한 삶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자랑거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행복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1952년부터 여왕으로 산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인생은 어떻겠습니까. 현재 로마가톨릭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가수나 영화배우는 어떻겠습니까. 운동선수 중 세계에서 수입을 가장 많이 올리는 테니스 선수 페더러는 어떻습니까.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의술을 펼쳤던 장기려(1911-1995) 박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존경할만한 사람들은 곳곳에 많습니다. 저는 담임 목사로서 한편으로 여러분이 가능한 한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으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게 궁극적인 길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길은 하나님에게서 온 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의가 온다는 말은 구원이 율법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율법의 의는 산소호흡기에서 얻을 수 있는 산소라면 하나님의 의는 숲과 들판에서 얻을 수 있는 산소입니다. 율법의 의는 악기로 내는 새소리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의는 실제 살아있는 새가 내는 새소리입니다. 율법 의는 스마트폰을 통한 영상 통화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의는 직접 대면하는 대화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길에서 선봉을 달렸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경험한 뒤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즉 궁극적인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그는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지금 멀쩡히 살아있어도 언젠가 죽는 게 분명하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궁극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추석 전날 큰딸과 사위가 우리 집에 잠깐 다니러 왔습니다. 사진 작품을 찍으러 3박 4일 일정으로 서해안을 두루 다녀온다기에 유사시에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제가 갖고 있던 침낭 4개 중에서 두 개를 주었습니다. 승합차에서 잘 때 필요하겠지요. 그 침낭은 20년 전 유럽 여행을 다닐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20년 전 침낭을 창고에서 꺼낼 때의 느낌이 특별했습니다. 당시 저는 40대 후반이었습니다. 앞으로 20년 후에 다시 오늘을 생각할지 모릅니다. 20년 후가 이미 저에게는 현실입니다. “죽은 자”라는 표현은 우리의 가장 궁극적인 실존을 가리킵니다. 누구도 이런 실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착한 사람도, 위대한 예술가도, 영웅호걸도, 목회에 성공한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말은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자주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자주 들어도 그러려니 할 뿐이지 실감하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만 이 말씀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일상 안에 들어 있는 그 근본적인 차원에 관한 이야기에 여러분은 실제로 관심이 있으신가요?
뒤의 것, 앞의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한 사람은 율법의 의를 추종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공 콤플렉스에 눌리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의 노후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자식들의 앞날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설득력이 있나요?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나쁜 경우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십자가의 죽음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비유적으로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교를 나와도 서울의 가장 이름 높은 대학교를 나온 학생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면 어느 대학교를 들어가느냐로 더는 근심하지 않습니다. 즉 더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주어졌는데도 자기에 대한 연민에 떨어지는 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저는 여차여차한 과정을 거쳐서 경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주먹을 쓰는 깡패들이 여러 명 다니는 경주 상고입니다. 1972년 2월에 졸업했으니, 옛날입니다. 거기서도 정말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는 골고다 언덕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리였고, 예수를 십자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제사장들의 예루살렘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었습니다. 매춘부들이 활동하는 홍등가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하실 수 있는 반면에,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가 앉아있는 법정이 불의의 온상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호스피스에 생명의 능력이 충만할 수도 있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증권거래소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부활의 나라가,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에 이르고 싶다는 바울의 거룩한 갈망을 똑같이 느끼면서 살고 싶을 겁니다. 그와 똑같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흉내라고 내고 싶을지 모릅니다. 유소년 축구 선수들이 영국 토트넘에서 뛰는 손흥민 선수처럼 되고 싶은 심정처럼 말입니다. 이게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체력도 키우고 드리블 연습도 꾸준히 해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시간을 아껴가면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바울의 신앙 경험에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은 마음으로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선수인 손흥민 선수가 지금도 여전히 구도적인 태도로 훈련하듯이 바울도 역시 영적인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2절과 14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향해서 달려간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달려가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뒤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배설물입니다. 고후 5:17절에서 그는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들(old things)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들(all things)이 새롭습니다. 이를 경험한 사람은 자기가 직면하는 세상과 자기 실존을 더는 이전 낡은 기준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새롭습니다. 자기가 새로워졌으니 세상도 새로워진 겁니다. 마치 10년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처음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처럼 모든 것이, 방에 있는 작은 사물 하나마저 새롭습니다. 앞으로 자기의 운명 앞에 얼마나 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지 기대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 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시시한 율법의 의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의에 붙잡힌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특징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