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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여호수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738 추천 수 0 2020.12.11 23: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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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수3:7-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27415 설교보기 :https://youtu.be/YZB9HPggQ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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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창조절 아홉째 주일, 2020년 11월1일

 

요단 도하 사건

여호수아 3:7-14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3백 년 가까이 소수민족으로 살던 애굽을 40년 전에 떠나 광야에서 정처 없이 떠돌이로 지내다가 꿈에 그리던 정착지인 가나안 코앞까지 왔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동 속도가 아무리 느리다고 하더라도 두세 달이면 충분했는데, 한 세대도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애굽을 떠날 때 스무 살이 넘은 사람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긴 세월을 기다리던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설렐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들이 사해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으로 우회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우회할 수밖에 없는 어떤 속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가나안에 사는 원주민 부족들이 동편은 요단강이 막아준다고 생각하여 주로 남쪽을 경계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해 우편으로 우회하는 게 전략적으로 옳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자리를 잡으려면 가장 강력한 부족을 먼저 정복해서 본때를 보여야 했을 겁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그들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이 부족합니다. 가나안에 첫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남쪽에서 곧장 직진해서 올라가면 예루살렘을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3km에 있는 여리고를 먼저 치는 게 최선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해를 우회해서 올라가야 합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서편 8km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모세가 지도자로 살아있을 때 진행된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계획했던 대로 올라가다가 모압 지역에서 죽었습니다.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요단강이 한강이나 낙동강처럼 큰 강은 아닙니다. 갈릴리에서 사해까지 지형에 따라서 넓어졌다가 좁아지기도 하면서 이어지는 강이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어른들만이 아니라 남녀노소가 다 모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려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습니다. 산모나 아픈 사람들은 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강을 건널 때 적의 공격을 받으면 낭패입니다. 강을 건넌다고 하더라도 피해가 너무 크지 말아야 합니다. 새롭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로서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단강을 어려움 없이 건널 방법에 관한 자세한 지침을 들은 겁니다. 그 지침이 오늘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긴 합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섭니다. 그들이 요단강물을 밟으면 위에서 흘러내리던 요단강 물줄기가 끊어질 것입니다. 아래에 있던 강물은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요단강이 바닥을 드러냅니다. 믿기 힘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이 된 강바닥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아무런 사고도 없었고 피해도 보지 않았습니다. 대대손손 전승될 만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요단강 도하 사건은 40년 전에 일어났던 홍해 사건과 맥을 같이 합니다. 홍해 이야기는 출 14장에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는 진퇴양난이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홍해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의 뒤에는 애굽 왕 바로가 보낸 기마병이 뒤쫓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든 손을 들어서 홍해를 갈라지게 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밤새도록 돌풍이 불어 홍해가 갈라져서 마른 땅이 드러났고,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거냐, 뭔가 믿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요단강 이야기를 조금 더 설명하면 그런 오해가 풀릴 겁니다. 성서주석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267년 12월7일 밤부터 8일 새벽에 요단강 협곡의 둑이 무너져 16시간이나 강물이 막혔다고 합니다. 1960년에도 이런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물이 범람해서 벌어진 현상입니다. 지진으로 인해서 강둑이 무너지는 일도 있습니다. 1927년 7월11일에는 지진으로 21시간 이상 요단강물이 멈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발생한 초자연적 기적이라고 말하는 성경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고대인들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크게 보면 오늘 우리의 과학도 신화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과학이 내일의 신화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궁극적인 비밀을 오늘의 자연과학이 다 밝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언젠가 지금 우리가 실재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들이 비(非)실재로 드러날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최선은 성경이 말하는 핵심 메시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궁극적인 실재를, 즉 진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언약궤를 짊어진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딛자 요단강이 멈췄다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이 사건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모세에게 홍해 사건이 일어났다면 여호수아에게는 요단강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는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표적을 구한 이유도(고전 1:22) 그들이 표적 자체에 호기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주변 종족에게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 이야기를 읽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거나 요단강이 멈추는 사건처럼 기적으로 보이는 일들은 우리의 삶에서 결정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보도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표적과 기적이 그치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그들의 신앙이 깊어지지 않았습니다. 홍해를 건넌 직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으나 조금 지나면서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서 처음 대결한 여리고 주민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으나,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가나안 토속 종교인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아무리 많이 경험해도 그것만으로 바른 신앙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는 게 분명합니다. 성경 이야기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늘 그것을 경험합니다.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돈을 벌거나 이름을 떨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참된 행복을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표적과 기적은 그 일을 경험한 한순간의 황홀한 느낌으로 끝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10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는 일과 비슷합니다. 한순간은 하늘을 나는 듯이 기쁘겠지만 얼마 지나면 시시한 일상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하나님이 함께하심”이라는 사실에 관심이라도 있을까요? 여전히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나이가 들수록 더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고, 더 둔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요구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인식하거나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믿으니까 자기 인생이 더 좋게 풀리거나 기쁨과 평화가 크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런 신앙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보다는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더 많아 보입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는 기독교인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정의롭지 않습니다. 억울한 고난도 많고 죽음도 많습니다. 굳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기독교가 말하는 수준의 기쁨과 평화는 누구나 누릴 수 있습니다. 타종교에도 자비와 사랑과 평화가 있습니다. 자연을 친구 삼아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디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저도 이에 관해서 명백한 실체를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없어서 성경이 말하는 대답을 손가락질하듯이 전할 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뒤에 9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10절에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함께하시지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는 자녀들과 함께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살아있다거나 죽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을 존재의 심연에서 느낄 때 나오는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입니다. 삶의 신비를 느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한 뒤에 물러나 계시지 않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을 통치하십니다. 그분 덕분으로 우리는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혹은 하나님이 없어야 멋진 인생을 산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름으로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삽니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런 생물학적인 차원의 생명은 사람만이 아니라 강아지도 누립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강아지와는 다른 차원의 생명을 살기에 생물학적인 생명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강아지는 시간의 깊이를 모르지만, 사람은 시간의 깊이를 절실하게 느낍니다. 강아지는 삶을 평면적으로만 느끼지만, 사람은 생명을 입체적으로 경험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체적인 생명 경험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앙에 내세가 있습니다. 내세 신앙은 유치한 게 아닙니다. 삶에 대한 훨씬 심층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순간의 삶만으로는 생명을 충만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지금 지구에서 느낀 한평생의 삶도 기본적으로 한순간이기에 여기에만 묶여 있는 한 그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절정은 부활입니다. 죽음 너머까지 하나님의 생명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그는 실제로 살아있다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 경험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고백은 곧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이 점점 더 풍성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동네 낮은 산만 다니던 사람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는 경험과 비슷합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하여 오늘 성경 본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삶을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고 받아들이십니까?

 

임마누엘

‘임마누엘’이라는 성경 용어를 여러분은 들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용어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며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마태복음 기자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붙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이 파혼하려고 하자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는 부정한 방식이 아니라 성령으로 임신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마리아가 낳을 아이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사실의 근거를 바로 앞에서 읽은 사 7:14절에서 찾았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기에 예수도 역시 우리에게 생명의 수요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즉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 우리 기독교의 모든 신앙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실제로 알고 믿으며, 경험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이 믿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답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물리학을 깊이 알려면 물리학을 다루는 책을 자주 읽고, 그런 강연을 자주 들어야 하듯이, 예수의 말씀을 자주 듣고 그에 관한 신학책도 자주 읽어야 합니다. 예수가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혼의 떨림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임마누엘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가리키는 삶의 비밀에 대해서 거룩한 궁금증을 느껴보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서 실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채,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서 비치는 생명의 빛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살아있다.”라는 고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질문의 중심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을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살아내려면, 즉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막히는 기적을 중요하게 생각한 고대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임마누엘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믿음이 더 깊어져서, 실제로 “아, 나는 살아있구나, 생명을 얻었구나.”라는 고백의 중심에 이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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