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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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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29337 설교보기 :https://youtu.be/Owm72kZ_Q4o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3-9, 대림절 첫째 주일, 2020년 11월29일
퀴리오스
고전 1:1~9절 내용 중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일정한 호칭이 반복해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모든 구절마다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1절), 우리의 주 되신 예수그리스도(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3), 그리스도 예수(4) 등등입니다. 특히 7절과 8절에는 똑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입니다. 7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고 했고, 8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7절과 8절을 함께 묶어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예수’는 자연인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은 당시에 흔했습니다. 구약의 여호수아도 같은 이름입니다. 발음하기에 따라서 여호수아라고도 하고, 예수아, 또는 예수라고도 합니다. 본문은 자연인으로서의 예수님에게 두 가지 호칭을 덧붙입니다. 그 호칭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입니다. 주는 헬라어 퀴리오스의 번역입니다. 퀴리오스는 당시에 로마 황제에게만 붙는 호칭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안에 사는 사람은 황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황제는 로마의 행정 조직과 군사력과 그 유명한 로마법과 문화와 예술 등등, 전 분야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만인지상의 존재였습니다. 황제의 말을 들어야만 거기서 살아갈 수 있었고, 말을 듣지 않는다면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퀴리오스라는 호칭을 예수에게로 돌렸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생명을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로 대표되는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얻는다고 믿었다는 데에 그 답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제공하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와 오락과 교양이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대신 제국의 가치와 질서를 무조건 지켜야만 했습니다. 단적인 예가 황제 숭배입니다. 현대사회가 자본을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이 제공하는 것에서 참된 평화와 기쁨과 해방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역사학자들은 기독교인의 이런 태도를 무시했을 겁니다. 또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이비 집단으로 몰아갔을 겁니다. 실제로 당시 기독교인들은 교양 있는 로마 시민들에게 무신론자로 불렸습니다.
자연인 예수라는 이름에 따라오는 또 하나의 호칭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히브리어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언젠가 메시아가 와서 자신들을 구원하고 세상에 평화를 실현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사람이 만든 정치, 경제, 문화는 사람이 사는 세상을 조금씩 좋게 만들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새롭게 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세상의 질서에서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지배하고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할 뿐입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으나 전체적으로 그렇게 굴러갑니다. 지금 우리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표면적으로 살기는 편리해졌으나 실제로는 별로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야말로 구약 성경이 약속한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그게 기독교의 출발점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주장에는 어떤 근거가 있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대답은 많습니다.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장애인, 병자, 오병이어, 오병이어, 포도주 사건 등등입니다. 물 위를 걷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증거를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겁니다. 그런 증거가 말하려는 핵심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현대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양자역학 발견과 같이 하나님 인식과 경험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통해서 참된 평화와 기쁨과 해방을 경험했기에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바울은 7절에서 “너희가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며 구원자이신 예수가 나타난다는 말은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생명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일상에서 늘 경험합니다. 오는 목요일에 수능시험이 있습니다. 모두 좋은 점수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결과에 따라서 행복해하는 학생과 부모들이 있고, 힘들어하는 학생과 부모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오히려 걱정거리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좋은 차를 사거나 집을 샀으면 즐겁겠지요. 직장에서 진급했으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겠지요. 그런 즐거움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걱정거리가 더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집은 값이 많이 올랐는데, 자신의 집은 별로라서 실망합니다. 직급이 올랐는데, 자신에게 그럴만한 지도력이 없어서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생명 완성과 너무 거리가 멉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검찰 제도를 생각해보세요. 국회의원 제도나 대통령 제도도 마찬가지이나 일단 대표적으로 검찰 제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제도가 생명 완성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생명 완성이 관념적으로 들리면, 사회 정의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검사는 합법적으로 칼을 손에 든 사람들입니다. 칼로 세상의 정의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경찰도 마찬가지인데,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칼을 자주 쓰다 보면 정의는 뒷전이고 칼맛에 길들기가 쉽습니다. 칼을 휘두르는 자기 기술에 매료되는 겁니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칼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겉으로 보면 사나이다운 멋진 면도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그들은 할복까지 합니다. 할복의 태도로 그 사람의 내공을 평가한다고 합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은 옳고 그름을 완벽하게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입니다. 그 한계를 알고 정말 조심스럽게 칼을 사용해야 합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칼을 주면 그 칼은 생명을 세우는 게 아니라 무너뜨리는 데 사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검사와 사무라이는 정의롭게 칼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심에 기울어져서 사용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초기 기독교인들은 칼을 쓰는 로마 제국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에게 생명 완성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합니다. 잘못하면, 미래에 예수가 오실 터이니 지금은 대충 살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묵시적이고 열광적인 종말론자들에게 이런 경향이 종종 나타납니다. 예수가 재림하면 예수 믿는 자들은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갈 것으로 믿는 겁니다. 일종의 휴거 신앙입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1992년에 다미 선교회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핵심 구성원들은 직장과 학교를 포기했습니다. 그들과 똑같지는 않으나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예수의 초자연적인 재림만 기다립니다. 빈부격차, 남북 분단, 생태계 파괴에 상관하지 않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만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교회가 오지랖 넓게 세상일에 미주알고주알 훈수를 놓을 필요는 없으나 이 세상에 생명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냉철하게 짚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기다림의 영성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면 개인과 사회의 생명이 완성되는 방향으로, 즉 예수가 재림했다고 말해도 될만한 세상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나아가는 것일까요? 그걸 알아야 기다림의 영성이 유지됩니다. 두 가지 차원이 여기서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는 제도적인 차원입니다. 제도적으로는 개인과 사회를 끊임없이 개혁해나가야 합니다. 교육, 의료, 연봉, 군대, 가족, 국가, 정치 제도는 더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 제도 역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무조건 바꾼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이 더 풍요로워지는 방향으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벽한 답을 모릅니다. 아니, 우리 힘으로는 그 완성이 불가능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표상되는 절대 생명이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는지 예의 주시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변혁의 노력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는 게 최선입니다.
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차원은 의식의 개혁입니다.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가장 큰 세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일단 가난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정말 두려운 세력입니다. 이로 인해서 온갖 다툼이 일어납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가난이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준 기도문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일한 조건이 바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걸 구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일용할 양식만으로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것을 구하면 우리의 삶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 코로나19 사태가 우리를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으로 끌어가는 것 같습니다. 몰려다니지 않으면서 일용할 양식만으로 영적으로 풍요롭게 살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19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한 징조가 아닐까요? 그 기다림을 준비하라는 신호는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날
바울은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날에 주께서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정말 위로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봐야 모범생이 될 뿐입니다. 모범생으로 사는 삶이 얼마나 부실한지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게 쓸데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손에 넣은 즐거움도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다 경험했을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실한 것이 없도록 끝까지 견고하게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들과 자식들이 다 떠나고 혼자 외롭게 살면 끔찍한 인생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더 풍요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생이 충분히 만족스럽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겁니다. 그 순간이 기다려지지 않으십니까?
지금 당신이 말하는 그런 생명 충만은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말하는 내용과 비슷한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노자와 장자에게서 무위자연 같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연주의를 주장하는 동서양의 성현은 많습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욕심부리지 않고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도의 깊이에 들어가는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꼭 믿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는 받습니다. 기독교인 중에서 일부는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더 인색하고 고집불통이고 탐욕스럽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부끄럽습니다. 예수 믿지 않고도 얼마든지 생명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주장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질문에 완전히 충족되는 대답은 아무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그들에게 말할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의 동의까지 받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동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과 믿음이 어떤지는 그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야겠지요.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예수님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분입니다. 에베레스트는 완전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생명은 곧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영적인 등반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만의 노력으로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설 수 없습니다. 거기에 올라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최선은 예수님을 바짝 뒤따라가는 일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구원 자체요, 생명의 정상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설명이 의미심장합니다. 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8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9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언급했습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 곧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날에 우리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단단하게 설 것입니다. 여기서 그와의 교제(코이노니아)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됨으로써, 즉 예수를 뒤따르는 제자가 됨으로써 생명 충만한 순간을 온전하게 맞이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코이노이아에는 이미 생명 완성이 일어났다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룬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것입니다.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이게 이해가 가지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이와 함께하는 사람은 실제로 정상에 오르지 못했어도 올라간 이와 마찬가지의 기쁨을 압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가 우리에게 없거나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그가 말하는 ‘아빠 아버지’가 누군지 실제로 알고 느끼십니까? 아니면 흉내만 내는 중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아니 그날은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놀랍게도 지금 이 땅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견고하게 지키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기에 저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처럼 여러분과 함께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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