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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에서 존재로!

갈라디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01 추천 수 0 2020.12.27 22: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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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4:4-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3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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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에서 존재로!

갈 4:4~7, 성탄절 후 첫째 주일, 2020년 12월27일

 

율법의 지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저는 터키를 가보고 싶습니다. 터키는 북쪽으로 흑해에 접해있고, 남쪽으로는 지중해에 접해있습니다. 서쪽 끝에는 그 유명한 이스탄불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습니다. 터키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그리스로 갈 때 통과해야 하는 지리적 특징이 있습니다. 동서 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주로 터키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이유가 이런 지리적 특징에 있을 겁니다. 지금의 터키 수도인 앙카라 지역을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갈라디아라고 불렀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바울이 쓴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그 일부가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그 본문의 첫 구절인 갈 4:4절은 이렇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이 대목에서 아주 독특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의 질서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정녀’라거나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냥 ‘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가 다른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며, 웃고 울면서 세상 질서의 제약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갈 4:5절에서 바울은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오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제가 공동번역으로 천천히 읽어볼 테니까 집중해서 들어보십시오.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은 세상살이 일반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몸으로 살기에 늘 먹고 마셔야 하고,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하고, 건강을 챙겨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습니다. 평생 경쟁의 질서에서 삽니다. 선의의 경쟁만 하는 게 아니라 악한 싸움도 합니다. 억울할 때도 있고, 통쾌할 때도 있을 겁니다. 걱정과 시름도 많고, 즐거움도 많습니다. 이런 세상살이 모두를 가리켜서 율법의 지배라고 표현한 겁니다. 예수가 우리와 똑같이 율법의 지배를 받은 이유는 우리를 속량, 즉 구원해 내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능력으로 사람을 구원하면 모든 문제가 간단히 해결될 텐데 왜 자기 아들을 인간이 되게 해서 구원하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이 왜 악에 쉽게 떨어지도록 인간을 만들었냐, 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그럴듯한 질문이지만 창조와 삶의 깊이를 외면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로봇처럼 창조했다면 그건 선한 창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간을 구원했다면 그건 선한 구원도 아니고 참된 구원도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자녀를 참되게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를 자신에게 예속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장 좋은 경우라도 자녀들은 마마보이나 마마걸이 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유산을 미리 받아 집을 나가겠다는 둘째 아들을 강제로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이 자유를 남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말입니다.


속량하거나 구원한다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아들의 명분”을 얻는 것이라고 번역했네요. 바울이 요즘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들이 아니라 “자녀의 자격”이라고 썼겠지요.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당연히 자격을 얻은 사람답게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격을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실제 삶에서 어떻게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의 대답을 찾으려면 자녀와 반대되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갈 4:1~3절에 바울의 설명이 나옵니다. 갈 4: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하였더니 … ” 초등학문이라는 단어에 “고대의 우주관과 운명론”이라는 각주가 달렸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자연숭배라고 번역했습니다. 자연숭배가 당시에는 나름 합리적인 생활방식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학벌, 재산,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 생활방식과 비슷합니다. 이런 데에 종노릇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보호받아야 합니다. 거기에 매달려 살기에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현대인들도 바울이 말하는 당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종으로 사는 건 아닐는지요.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절대적으로 매달려 있지는 않습니까.

 

존재의 차원으로!

놀랍게도 바울은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으로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가 5절부터 7절까지 이어집니다. 종에서 아들, 또는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말을 우리 삶에서 실제로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인생살이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도 우리는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외로울 때 외롭고, 아플 때 아픕니다. 종에서 아들로 신분이 완전히 바뀐 건데도 실제의 삶에서는 이를 절감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행위와 존재의 차이를 실제 삶에서 구분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확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난폭한 행동을 하다가 절제된 행동을 하면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나쁜 점수를 받다가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그 사실을 누구나 알아봅니다. 이 두 사람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어요. 난폭한 행동을 하다가 절제된 행동을 한 사람은 자기의 난폭한 행동으로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한 것뿐입니다. 속은 변하지 않고 겉만 변한 겁니다.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은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열심히 공부한 겁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나, 사람의 행동과 속은 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개의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치우쳐서 삽니다. 세상은 법으로 행위를 규제합니다.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줍니다. 이게 소위 법치입니다. 아무도 이런 체제와 제도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이런 질서로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사회에서 현재까지는 법치가 최선입니다.


바울은 지금 인간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좌우되는 종이 아니라 거기서 자유로운 아들로 그 존재가 변하는 겁니다. 겉모양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중심이 달라지는 겁니다. 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삶의 중심을 두는 겁니다. 행위의 변화는 눈에 확 드러나기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으나 존재의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행위의 차원으로 자꾸 돌아가려고 합니다. 오해 말라는 뜻으로 말씀드리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행위만이라도 인정받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이 기독교 신앙에서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교양의 차원으로 떨어뜨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선한 행위를 두고 세상과 경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경쟁을 가리켜서 바울은 앞에서 짚었듯이 초등학문이라고, 즉 고대 우주관과 운명론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의 명분을 얻었다는 게 무엇일까요? 우리의 존재가 변했다는 게 실제로 무엇일까요? 6절 말씀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아들의 영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셨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새로워졌다는 뜻입니다. ‘아빠’는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뜻이고, ‘아버지’는 헬라어 파테르의 번역입니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 아람어를 사용하던 신자들이 있었거나, 예수님이 직접 사용한 단어를 회상시킨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어쨌든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종이 아니라 아들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노심초사 평생 애를 써야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조금 못나도 아들은 아들입니다. 종은 아무리 잘나도 종입니다. 이런 표현이 너무 억지스럽게 들리시는지요. 기독교인은 아무렇게 살아도 다 구원받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인간과 그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겁니다.


사람은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그것만으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은 삶이 충만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거기에 매달릴수록 삶이 더 황폐해집니다. 이 대목에서 바리새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바리새인이야말로 누가 보더라도 존경을 받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기원후 70년에 함락된 뒤로 유대교와 유대 민족을 지탱하는 보루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제자 공동체를 유대교에서 축출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과 가장 크게 대립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종교적이고 애국적인 열정에서 나온 행위가 그들의 삶을 내면적으로 풍성하게 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문제를 개인의 일상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좋은 남편이 되려고 애씁니다. 좋은 아내가 되려고 애씁니다. 또는 좋은 교사가 되려고 애씁니다. 좋은 목사가 되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살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 자체가 우리를 내면적으로 풍요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더 좋은 아내와 남편이 되려고 계속 수고할 뿐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정말 존경스러워, 하는 말을 들으려고 계속 신경을 씁니다. 이게 우리 삶의 딜레마입니다. 당연히 모범적이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려고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와 그런 노력으로 내면세계가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 사이에서 힘들어합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대개는 보상 심리에 떨어집니다. 노력한 대가를 얻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인생을 삽니다. 종으로서의 삶입니다.

 

전혀 다른 길

바울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비슷한 길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입니다. 그 이전에 바울이 알았던 인생길은 그가 종이라고 부른 인생입니다. 그런 쪽으로 바울은 높은 성과를 냈습니다.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이제 예수를 알게 된 후로는 그런 인생길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경험했기에 좋은 점수는 아예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에 관심을 껐습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한가, 하는 문제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문제는 아들이 아니라 종에게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과연 말이 될까요? 바울은 지금 무엇을 실제로 경험한 것일까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는 분으로 인식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자기연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에게 아빠와 엄마가 계십니다. 무엇을 먹고살지, 하는 걱정을 그 아이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 걱정에 떨어진 아이라고 한다면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할 겁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사실만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겁니다. 완전히 평화와 안식이 주어지겠지요. 살아있는 동안에 100% 완벽하지는 않아도 조금씩 가까이 가겠지요. 하나님 신앙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겠지요. 이게 기독교인에게 최선의 삶이 아닐까요?


처음 수영을 배우는 사람은 물에 몸을 맡기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미 앞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초등학문의 종노릇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초등학문을 시대정신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뭔가 세상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강력하게 우리 인생을 지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아들의 영’을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아들의 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그의 운명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예수를 자기 삶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주 솔직한 말씀이에요. 억지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어요. 그냥 흉내만이라도 일단 잘하면 됩니다. 흉내를 내다가 진짜 믿음을 경험할 수 있게 될 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치 시인의 언어 경험처럼 그런 순간을 기다리는 분들을 위해서 제가 설교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구절인 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과감하면서도 단호한, 그리고 영적으로 우리를 살아나게 하는 발언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 즉 그가 행하시는 생명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가는 과정이 기독교인의 인생입니다. 종살이에서 아들과 자녀의 삶으로, 즉 행위에서 존재로 삶을 이해하는 차원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 달라진 삶이 여러분의 실제 인생살이에서 어떻게 전개될지를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책상 위에 놓인 연필 한 자루마저 사랑스러워질 겁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앞에서도 한 순간순간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곧 다가올 2021년에는 종이 아니라 자녀로서의 삶이 여러분에게 더 풍성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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