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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1:2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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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석 목사 |
참고 : |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
두려움 없이
빌1:27-30
(2020/06/28, 성령강림 후 제4주)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이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은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으며,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지금 소문으로 듣습니다.]
∙가슴에 하늘을 품은 사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시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도 우리는 주님의 돌보심과 은총 속에서 살았습니다.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바칩니다.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일, 우리 속에서 생기를 빼앗아가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부여하십니다. 주님 앞에 선 이 시간 생각의 속도를 늦추고, 불안감과 초조함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는 주님의 은총 속에 머물면 좋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옥중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감옥이라는 격절의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그는 불안감이나 우울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불편함과 고통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1:21). 살든지 죽든지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사람을 누가 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했던 자기의 수고가 허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느긋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1:6). 이런 고백이 주는 자유함이 참 큽니다. 이 마음으로 살 때 실적 혹은 결과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신실한 태도로 임했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바울의 마음은 온통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있습니다. 고통은 가끔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고, 전망을 협소하게 만들어 주변을 살필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만 바울은 바깥에 있는 이들을 믿음 가운데 우뚝 세우는 데 마음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드넓은 하늘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간략합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이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풍부하게 하는 일에 우리를 초대하셨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 할 때 ‘살라’라는 단어는 헬라어 ‘폴리튜오마이politeuomai‘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뜻하는 ‘폴리스’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폴리스에 속한 사람은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말은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들어온 사람답게 그리스도적 삶의 양식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속적인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유혹과 맞서야 하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울해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생명을 풍부하게 하는 데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 불화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존엄함을 일깨워주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요구 앞에 서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 상처를 싸매기에 급급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라는 소명 앞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 군병 되어서
하나님은 그 선한 싸움에 우리를 홀로 내보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동료들을 주십니다. 위험에 처할 때 나를 지켜주고, 지쳐 쓰러질 때 일으켜 세워주고, 의기소침할 때 생기를 불어넣어줄 동료 말입니다. 바로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유기체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격려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빌1:27b-28a).
‘한 마음으로 굳게 서서’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는 사람들,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젊은 날 비장하게 부르던 찬송가가 떠올랐습니다. “십자가 군병 되어서 예수를 따를 때 무서워하는 맘으로 주 모른 체 할까/뭇 성도 피를 흘리며 큰 싸움하는 데 나 어찌 편히 누워서 상 받기 바랄까/이 죄악 많은 세상에 수많은 원수들 날 유혹하고 해치나 내 주만 따르리”(353장). 예수를 따르는 삶은 세상 물결에 떠밀려 가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삼키려 하는 그 거센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삶입니다. 적당히 평안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힘겹더라도 생명과 평화를 선택하는 삶입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라도 그리스도적 삶을 포기하지 않는 삶입니다. 홀로는 외롭지만 그 선한 싸움을 지속하는 동료들이 있음을 확인하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대적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려는 이들을 조롱하거나 노골적으로 훼방을 할 때도 있습니다. 조롱과 혐오, 적대감에 찬 시선에 노출된 채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믿는 이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기억이 스러지지 않는 한 우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위축되면 하나님을 잊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동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기억을 일깨워주는 사람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주님이 그의 깃으로 너를 덮어 주시고 너도 그의 날개 아래로 피할 것이니, 주님의 진실하심이 너를 지켜 주는 방패와 갑옷이 될 것이다“(시91:4). 이 말이 얼마나 든든한지요? 구름에 가려 보이진 않아도 하늘 저 위에 별들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우리가 느낄 수 있든 없든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선한 이웃들의 손을 통해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기도 하십니다.
“Vacatus atque non vocatus, Deus aderit“(Bidden or unbidden, God is present). 우리가초대하든 초대하지 않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는 가끔은 비틀거려도 아주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특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특권이라는 번역어는 오해를 자아내기 쉽습니다.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우월적 지위나 권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하리조마이charizomai’는 기본적으로 ‘혜택을 받다’, ‘호감을 사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용서’, ‘구원’, ‘은혜’와 연결되어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29절은 차라리 개역개정판 번역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것도 은혜이지만,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다가 겪는 고난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쓰라린 것이지만 그 고난이 의미가 있다고 느낄 때 고난은 유익한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하는 수고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대신 겪는 고통을 마다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다가 겪는 고난을 기꺼워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하늘 시민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기저질환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도 자기가 하는 것과 똑같은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격려입니다. 신앙생활은 일종의 투쟁입니다. 세속적인 사회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세상 논리에 동화되어 삽니다. 드러내는 순간 그게 약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 질서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가 씁쓸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질병을 달고 삽니다. 특정한 병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영어로 질병을 뜻하는 단어 디지즈disease는 ‘없애다’, ‘벗기다‘, ‘빼앗다’는 뜻의 접두사 ‘dis’와 ‘편함’, ‘홀가분함’이라는 뜻의 ‘ease’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편함과 홀가분함, 자유로움을 빼앗아가는 것이 질병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모든 이들이 다 질병에 시달린다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기저질환자입니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대개 바깥에 있습니다. 적대적인 시선과 말의 폭력에 시달리는 우리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습니다. 실적에 대한 부담 또한 우리를 짓누르는 무게입니다.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현실 또한 힘겹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우리 현실입니다. 고립되어 살지 않는 한 우리는 타자들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로부터 도망치기 어렵습니다. 쓰리긴 하지만 그걸 내 삶의 일부로 통합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게 지혜입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혹은 현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는 나치의 수용소가 사람들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수감자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애써야 했습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58쪽)
사람을 비인간으로 몰아가는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저항의 시작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 내면에는 허섭스레기 같은 것들이 켜켜이 쌓이게 마련입니다. 원망, 적대감, 앙갚음하려는 마음, 불의한 분노, 심술궂음, 불친절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산물들입니다. 쓰레기장을 조사하여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실태를 알아보는 '가볼러지(garbology)'라는 사회학의 방법론이 있다고 합니다. 쓰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 집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분리수거함에 넣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쌓여있는 쓰레기를 내다 버려야 정신이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봉투에 담아 걸어둡니다. 그 감정의 찌꺼기들은 우리 속에서 발효되어 부글부글 끓기도 합니다. 가끔 그것을 꺼내 냄새를 맡아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진저리를 치면서 누군가를 원망하고 혐오하고 미워합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붙잡을 것은 든든히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마음은 굳게 잡으십시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근원적 믿음을 붙잡고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흐름에 합류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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