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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비밀

마태복음 문지영 자매............... 조회 수 193 추천 수 0 2021.01.08 22: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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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8:23-35 
설교자 : 문지영 자매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tong/media_board/read.asp?board_idx=1&sub_idx=22&seq=898&lef=02 

“용서의 비밀”

(마태복음 18:23-35)

 

2014년 8월 10일 주일예배

문지영 자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올해 들어서 제가 가장 많이 고민하고 씨름하는 문제입니다. 그 배경에는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아이가 있습니다. 제 아들아이는, 부모의 반대를 꺾고 축구 특기생으로 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저나 남편, 또 누나까지 운동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아들아이의 선택을 이해하고 응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아이는 사춘기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이리저리 부딪치고 관계가 삐거덕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머리가 덜 큰 중1이다 보니, 적당한 선에서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라며 굽히고 들어옵니다. 그래 알았다, 용서해주마, 란 대답을 곧바로 듣지 못하면 반성문을 써서 책상 위에 올려두기도 하고 하트를 붙인 문자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아이가 구하는 그 ‘용서’가 뭔지, 용서를 한다는 게 뭘 어떻게 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약속한다, 거절한다, 부탁한다, 명령한다, 등과 같이 말을 하는 것이 동시에 어떤 일을 수행하는 것이 되는 동사들이 있고, 일상생활에서 별 어려움 없이 그런 표현들을 사용하곤 합니다. 저 역시, 용서한다는 말도, 용서해달란 말도 그간 숱하게 사용해왔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어떻게 하는 게 용서하는 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뭘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용서한다고 말했고 또 용서해달라고 말해왔구나, 하고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용서한다는 건 누군가 용서를 비는 그 잘못을 잊어주는 일일까요 그렇다면 저는 한 번도 제대로 누군가를 용서한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잘못한 일을, 용서한다고 말은 했지만, 시간이 오래 흘러 자연히 기억이 안 나게 된다면 모를까 의도적으로 잊은 적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했다, 잊어줬다 생각하지만, 비슷한 유의 잘못을 또 경험하게 되면 어김없이 옛날 일까지 떠올려서는 곱절로 화를 내게 되니까요.

 

혹은 용서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화가 나는 그 순간을 꾹 참아주는 걸까요 만일 그렇다면 저는 꽤나 용서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워낙, 벌컥 하는 다혈질 성격은 아닌 편인 데다가 일단 화가 많이 나면 그 자리를 떠나서 어디 조용한 데로 들어가버리는 스타일이거든요. 하지만 그 순간을 참고 넘겨준다고 해서 그게 꼭 용서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걸로 상대방이 용서받았다고 느끼지 않을테니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용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한 가지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부터 35절까지의 말씀은,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께서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는 대답에 이어서 하시는 비유입니다. 오랫동안 이 본문 말씀은 제게 상당한 부담이었습니다. 일흔 번은커녕 일곱 번을 용서하기도 쉽지 않은데, 형제자매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니 말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은 다시, ‘하늘 아버지께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다른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전달되어, 누군가가 쉽게 용서되지 않을 때 마음이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고 죄의식도 갖게 되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체 메시지는 흔히 ‘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받은 우리는 백 데나리온 정도 되는 이웃의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마땅하다’, 즉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자가 이웃의 사소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늘 아버지의 용서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말씀에 기대어,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 나를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려 애씁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따라 외우며 주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저이를 용서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말 용서했다고 믿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 내 죄가 얼마나 심각하며 그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가 얼마나 감사한지 가슴 벅차게 깨닫게 되는, 흔히 말하는 ‘은혜가 충만한’ 어느 날, 용서 못할 잘못이 없다고 자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눈을 떠서 현실에 발을 내딛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무릎이 꺾이고 맙니다. 여전히 미운 사람은 밉고,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은 용서가 안 되는 거죠. 그러면 또 “주님, 저는 역시 죄인입니다. 제 연약함을 용서해주십시요”하고 다시 기도 자리로 돌아가는 허무한 순환이 반복됩니다.

 

이것이 비단 저만의 약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저로서는, 하느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은혜를 아는 것이 곧바로 다른 이에 대한 용서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하느님의 은혜를 아직 제가 진실로,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저 역시 그런 생각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는 걸텐데요, 그렇지만, 솔직히 고백컨대, 기도와 말씀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타인을 용서하고 화평케 지내려는 노력을 언제나 성공적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과 남을 내가 용서하는 건 다른 문제였던 거지요.

 

그게 다른 문제로 여겨지는 게 못내 찜찜하던 차에 영화 <밀양>을 보고 내심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신애는 아들이 납치되어 죽임을 당한 현실의 고통을 신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스스로 치유되었다고 자신하게 된 어느 날,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찾아가서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며 그를 용서해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용서를 위해 유괴범을 면회한 그날 이후 신애는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괴해가게 됩니다. 자신이 용서하려 했던 그 유괴범이 이미 하느님께 용서를 받아 자신의 용서 따윈 필요 없이 평온과 구원을 얻은 상태라는 데 충격을 받은 탓이었습니다. <밀양>은 기독교적 구원과 용서의 의미를 놓고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꽤 큰 논란이 있었던 영화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비기독교인들은 유괴범의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모습에 분노하고 신애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며 기독교적 구원과 용서의 허망함, 가식을 비판하는 반면, 기독교인들은 신애도 유괴범도 기독교적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라며 그런 자들이 기독교를 대변하는 걸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 논란과는 별개로, 저는 용서에 대한 제 딜레마를 객관적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그 영화를 통해 가져보았습니다. 그 영화에서 하느님과 신애의 관계 또 하느님과 그 유괴범과의 관계가 진정한 것이었는지 아닌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들 편에서 볼 때, 그들이 하느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는 것이 거짓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용서하심에 힘입어 누린 마음의 평화가 단순한 착각이거나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이 타인에 대한 용서나 타인과의 관계 회복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와 나 사이에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 역으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가 주목하는 건 용서의 메커니즘입니다. 우선 여기 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습니다 → 주인은 그에게 빚 갚을 것을 명합니다 → 그 종은 참아달라고, 다 갚겠다고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줍니다. 이 비유에서 빚 탕감이 용서라면, 용서의 핵심은 ‘가엾게 여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받은 종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가 똑같이 참아달라고, 다 갚겠다고 간청하는데 들어주지 않고 감옥에 가둡니다. 이에 대해 애초에 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해주었던 주인은 그를 “악한 종”이라 부르며 애초의 탕감을 취소하고 벌을 내립니다. 여기서 그 주인의 진노의 포인트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는 만 달란트나 되는 네 빚을 없애주었는데 너는 고작 백 데나리온의 빚도 없애주지 못하느냐”가 아니고 말이지요. 얼핏 그 말이 그 말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두 표현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 비유를 통해 제가 배우는 예수님의 교훈은, ‘하느님의 크나 큰 용서를 받은 자는 이웃의 작은 잘못쯤은 당연히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 ‘하느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의 비밀은 빚의 크고 작음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얼마나 한 빚이든지 빚진 자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문제의 종이 주인에게 무릎 꿇고 한 애원은, 주인이 불쌍히 여기게 되었던 걸로 보아, 진정성이 있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빚을 탕감받았을 때 정말로 기뻤을 것이고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 또한 샘솟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은혜를 입어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자기 동료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곧장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주인과의 관계 회복과 동료와의 관계 회복은 다른 문제였으며, 그는 다만 주인의 마음을 본받아, 즉 주인과의 관계 회복에서 교훈을 얻어, 그 마음으로 동료와의 관계를 새롭게 가져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밀양>을 다시 보자면, 신애가 자신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각성으로부터 곧바로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까요. 문제의 큰 원인은 그 유괴범에게 있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설사 하느님의 은혜로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신애에게 진 백 데나리온의 빚을 덩달아 없애주거나 그 빚을 무시해도 되는 걸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데, 신애에게 지은 죄에 대한 용서는 구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네가 제단에 지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4:23~24)라는 말씀에 들어 있는 교훈과도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애 역시,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회복은 신앙의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그 관계 회복을 통해 이웃과 새로운 관계 맺음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는 점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요컨대, 용서는 잘못을 한 다른 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 그런 마음은 나를 용서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런 하느님 마음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예수를 본받아 살 때 자라나게 되리라는 것이 ‘용서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제가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가 나름대로 읽어낸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읽은 것을 정리하며 말씀증거 준비를 하다가 문득, 이제 며칠 후면 광복절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올해가 어느덧 광복 69해째인데, 그래도 여전히 식민지 시절의 상처로 고통 받는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에게 광복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분들, 또 요즘 여론을 들끓게 하고 있는 윤일병 사건과 김해 여고생 사건의 유가족분들... ‘용서’라는 단어를 영원히 사전에서 지우고 싶어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웃들이 주위에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이 당신들의 크나 큰 죄를 사해주셨으니 당신들도 당신들에게 죄지은 그들을 그만 용서하라고, 도저히 그리 말하기 어려운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하물며 아들이 제 마음을 상하게 해놓고 구하는 용서에도 고민하는 사람인 걸요...

 

용서의 메커니즘에서는 우선 잘못을 저지른 쪽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애원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가진 자라서 자기 힘을 믿고 그러는 거라면 우리가 힘을 보태 책임 있는 사과를 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타인과의 관계 회복을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받은 죄사함의 은혜를 기억하고 내가 받은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것은 예수 따르미가 되는 출발점이지 예수 따르미 활동의 전체 내용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 따르미로서의 삶은 이웃에게, 내 이웃의 작은 한 사람에게 예수의 마음을 실천하는 데 핵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본문 35절에서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하신 말씀을 “하늘 아버지께 용서받기 위해서 너희 형제자매를 용서하라”로 읽어서는 포인트를 빗나가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이웃을 내가 용서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셈이니까요. 그 말씀의 포인트는, 내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내가 하느님께 용서받기 위한 조건이라는 데 있다기보다는,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벌을 받을 거라는 경고에 있다기보다는, 하느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나도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에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결국 이 말씀도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하신 마태복음 25장 40절 및 45절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 있는 걸로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그 분의 마음을 본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 이런 진정한 예수 따르미의 삶을 우리 모두가 살게 되길 바래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용서와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 저희가 이웃에게 상처주고 죄를 지었다면 무릎 꿇고 애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누군가 저희에게 잘못을 범했다면 그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당신의 마음을 본받게 하십시오. 우리가 주께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우리 이웃에게도 그리 하게 하시고,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은 것처럼 우리 이웃에게도 그리 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면, 똑같은 정성으로 우리 형제자매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 얻은 용서로 인해 세상의 모든 용서가 다 쉽다 자만하지 말게 하시고, 용서가 필요한 이들에게나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이들에게나 다만 당신의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길 원합니다. 주께 받은 사랑이 그저 쉬운 자랑거리에 머물지 말게 하시고, 이웃의 형제자매에게 안성맞춤으로 실천되는 것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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