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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마태복음 김선민 자매............... 조회 수 162 추천 수 0 2021.01.08 22: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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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8:21-22 
설교자 : 김선민 자매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tong/media_board/read.asp?board_idx=1&sub_idx=22&seq=899&lef=02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마태복음 18:21-22)


2014년 8월 17일 주일예배

김선민 자매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영광이지만, 교회의 어른들 앞에서 말씀증거를 하는 일이 여전히 두렵고 떨립니다. 많이 부족하고 어쭙잖은 이야기다 싶어도, 평신도 간증이니 너그럽게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시작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지난 주일 문지영 자매님께서 저와 같은 “용서”라는 주제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그 사이에 다른 주제로 바꾸기는 어려웠습니다. 용서가 많이 필요한 시기라서 그런 것 같다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2012년 개봉된 피에타라는 영화 이야기로 말씀 증거를 시작하려 합니다.

이강도는 청계천 상인들이 빌린 사채 이자를, 갖은 악행으로 받아내며 살아가는 이십대 후반 남자의 이름입니다. 더 이상 이자를 받지 못할 것 같으면, 채무자들의 신체를 훼손시켜 상해보험금을 받아내는 것이 그의 마지막 방법입니다. 가족 친지 하나 없이, 분노에 가득 찬 일상 속에서 살아가던 그 앞에, 어느 날 자신이 엄마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이 나타납니다. 엄마는 그의 일상에 스며들어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 붓습니다. 이강도에게 조금씩 사람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일에 있어 한 치의 오차도 없던 이 강도에게 지켜야 할 사랑이 생기자, 냉혹하게 돈을 받아내는 일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엄마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이 된 어느 날, 그 소중한 엄마가 사라집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엄마를 납치했을 것이라 직감한 강도는, 그간 자신이 괴롭혀 왔던 이들을 찾아다닙니다. 이 때, 충격과도 같은 사실이 영화에 등장합니다. 알고 보니 엄마라는 사람은, 이 강도에게 괴롭힘을 받다 스스로 목을 맨 상구의 엄마였던 것입니다. 악마 같은 강도에게, 가족을 빼앗긴 이들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죽은 상구의 엄마는 이 강도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엄마에 대한 이강도의 의존성이 충분히 높아졌을 때, 엄마는 스스로 납치되는 자작극을 벌입니다. 뒤늦게 강도는 용서를 구하지만, 엄마는 살해당하는 척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은 친 아들 상구를 위한 복수를 완성합니다.

 

엄마의 유언대로 소나무 아래 시신을 묻던 강도는, 그때서야 그 여성이 자기의 엄마가 아니라 자신의 박해로 목숨을 끊은 상구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강도는 구렁텅이에 빠진 다른 피해자를 찾아가 참회하듯 스스로 목숨을 버립니다. 죽음을 앞둔 강도의 얼굴은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면밀한 통찰과 상징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세상의 문제들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복수 영화 가운데 가장 완벽한 복수극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찜찜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상구야. 조금만 기다려. 이제 곧 놈의 영혼은 죽을 거야. 제 눈앞에서 내가 죽으면 똑같이 가족을 잃은 고통으로 껍데기만 미쳐서 살아가겠지.......

죽은 아들을 향해 이런 독백을 하던 엄마는 이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상구야. 엄마가 미안해. 너무 슬퍼서 제정신이 아닌가봐. 처음엔 이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자꾸만 강도가...... 강도 불쌍해 상구야. 너무 불쌍해......

 

죽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참아내며 세상 가장 영특한 복수극을 완성해가던 엄마의 마음이 강도 앞에서 왜 흔들렸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강도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휼함을 느꼈다면 왜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끊었는지, 또 출생 이후 처음 생긴 사랑하는 대상이 기실은 자신을 향한 복수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강도의 마지막 길이 어떻게 그렇게 평화로울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이제, 영화와 전혀 무관하게, 몇 달 후 제가 겪은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교우들께서 알고 계시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큰 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았는데, 결혼한 지 10년 만에 아이들 아빠와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 후 3년 만인 2004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어린 두 딸들을 아빠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고 또 3년 만인 2007년 큰 아이는 다시 데려왔지만, 둘째 딸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2013년 둘째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이제 저와 함께 살겠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숙제가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오기로 한 날부터 제 두려움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막장드라마와 값싼 유행가 가사들의, 정말로 외면하고 싶은 컨텐츠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구구절절 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이 말씀 뒤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지는, 특히 새길 살림회 소속 교우들께서 짐작하실 겁니다.


아이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과거의 그 질곡들을 다시 겪을 것이 저는 두려웠습니다.

처음 제 의식에 떠올랐던 것은 사립대학 등록금과 대학생 용돈은 어떻게 하나, 둘이 살던 집에서 셋이 살 수 있을까 하는 등의 현실적인 문제들이었습니다. 사실, 평소의 저를 생각하면 그 불안은 비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집 좁아 못살지 않는다. 마음 좁아 못 산다”라는 저희 어머님의 말씀은 그대로 제 인생관이 되었고, 저와 같은 연봉으로 아이들 둘 사립대학에 보내는 분들 많다는 것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이들 아빠는 아이들에 대한 경제적 책임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이 대목에서 용기를 내서 말씀드리자면, 당시 제 마음 안에는 저보다 돈 더 많이 버는 애들 아빠, 그리고 노동 없이 그 소득을 누리고 사는 그 여성, 고생하면서 힘들었던 저와는 달리, 이혼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으면서도, 건강하고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영위해 온 그 여성에 대한 미움과 질시가 더 컸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어쨌든, 몇 주 동안 이 문제와 씨름한 끝에 저는 우아하게 행동하기로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제게 관대한 마음이 강처럼 흘러넘쳤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이제 성인이 되는, 제 소중한 두 아이 앞에서 품위를 지키고 싶었을 따름이었습니다.


품위를 지키기로 마음먹고 나니, 미처 깨닫지 못하던 사실이 보였습니다. 성인이 된 아이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그야 말로 저와 아이들의 문제이지 다른 누구와도 섞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둘이 함께 대학을 다니는 동안은 좀 빠듯하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말해주고 아껴 쓰든 다른 방도를 마련하든 그건 아이들의 몫이지 제가 아이들을 대신해서 다른 이들에게 얼굴 붉힐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내친 김에 좀 더 우아해지고 싶었습니다. 좀 오바한다 싶었지만, 둘째가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돌봐준 그 여성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진정으로 그 여성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여성은 이혼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서,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적 상처를 그동안 제게 참 많이도 주었습니다. 그 와중에 역시 상처받았을 딸에게 저는 이런 메시지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너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놨지만, 엄마의 딸이야. 네가 건강하게 자라 대학에 들어가고 결국 나에게 오게 되니 난 너를 위해서 이 정도는 쓸 수 있어. 그것도 엄마에게 가장 상처 준 사람에게 말이야. 이게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란다.” 하고 말입니다.

 

큰 돈을 들여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 여성을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당연했습니다. 선물은 그 여성에게 주는 것이기 이전에, 제 아이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으니까요. 이사 며칠 전에 집으로 와서 선물을 가져가 전해 달라고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약속했던 날 아이가 오지 않았습니다. 건강하던 아이가, 심한 독감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난감했지만, 저는 사놓은 것을 어쩌지 못하고, 이사 날 아침 제가 직접 들고 아파트 입구로 내려가 그 여자에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그 상황은 정확하게 묘사되질 않습니다. 대신, 그날 저 스스로에게 놀라 몇 분의 지인들께 쓴 편지 글귀를 읽겠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멀리서 그 여자가 걸어오는 몇 초 사이에, 제 마음이 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여자와 만나고 난지 만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지금, 무엇이 제 마음을 바꾸었는지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본 것은 볼품없는 얼굴을 하고,  저와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는 초라한 한 여자였습니다.

지난 10년간 더 많은 심적 고통을 겪은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 여자였다는 것을 그 몇 초 사이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 여자를 이제 해방시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 여자를 자유롭게 해 줄 사람이 딱 한 명 있다면, 그게 바로 저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은 분명하게 납니다.

 

몇 걸음을 걸어가서 그 여자와 가까워지게 되었을 때, 저는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미준이 이렇게 잘 키워줘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부터, 제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여자의 손을 잡았고, 성에 차지 않아서 허그를 했습니다.

팔로 안으니 한 줌도 안 되는 마른 몸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초 동안 안고 둘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여자는 고개를 잘 들지 못하면서, 제게 몇 차례나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하고 말하는데,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그건 기적이었습니다. 제가 그 여성을 만나서 허그 한 번 한 것이 무에 큰 일이겠습니까만, 10년 넘게 제 마음에 흐르던 미움의 강을 생각하면 그건 분명 기적이었습니다. 다시 돌아보니, 그 일 있고난 후 제게는 정말 그런 미움이 언제 흘렀나 싶을 정도로 아무 느낌이 없어졌습니다. 과연 어떤 요인이 그런 변화를 이끌었을까 하고 오래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세월이었습니다. 참 무책임한 말이지요 하지만 그 어떤 격정적인 사랑도 미움도 세월 앞에서는 색이 바랜다는 사실이 어쩌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미움이나 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만날 때, 도대체 이것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늘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지만, 일주일 지나면 무슨 일로 화냈는지를 잊어버리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일주일 지나면 잊을 일로 오늘 마음 고생하는 것은 참 어리석고 부질없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력이 현격하게 줄어드는 것이 이 점에서는 참 감사할 일 아닌가 합니다.

 

두 번째, 미움의 대상에 대한 일체의 표현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의 역사를 되짚어 보니, 그 여성과 관련해서 가장 어려웠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어느 순간 미움의 적극적 표현, 특히 언어적 표현을 중단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미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 여성을 당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오히려 철저한 보복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침묵하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상대방은 더한 미움의 언어를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대신, 그렇게 정작 미움의 대상은 피한 가운데, 저는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한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늘 정의로운 전사의 역할을 했지만, 기실은 약간의 틈을 보인 이들에게 부당한 심리적 전이를 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만일 상대방과 맞붙어서 계속 미움의 언어를 반복했다면, 그 과정에서 양쪽은 점점 더 파괴되고, 주변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더한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세 번째는, 상대방 개인에 대한 집착적 미움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나는 대신, 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성찰을 하는 것입니다. 접촉을 피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기로 결정한 후 제가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것은 심리치료를 받는 일,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는 일, 글을 쓰는 일, 미뤄두던 운동과 운전을 배우는 일들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모든 다른 이들과 비본질적인 것들을 미뤄두고 하나님과 독대해 씨름하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그건, 누군가를 용서할 목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외로운 고통의 시간 동안 그저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때로 저는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물건들을 집어 던지면서, 하나님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십니까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처음 알게 된 것은, 제가 그토록 미워했던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 스스로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제가 미워하던 사람들은 저의 고난을 촉발하는 요소가 되기는 했으나 그 누구도 명백한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지나가던 전혀 모르는 사람, 그것도 정신이 좀 나간 사람이 저에게 다가와 따귀를 한 대 친다면, 제 마음은 어떨까요 좀 어이가 없기는 하겠지만, 두고두고 미움의 강이 흐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데, 피하거나 제압할 수 없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에도 미움과 화의 종착역은 그 상대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자신, 그런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 많은 제 삼자들, 너는 못나게 맞기나 하냐고 오히려 저를 비난하는 주변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아이들 아빠가 없이도 잘 살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날들, 저는 그들을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이 복잡해졌던 것은, 아이들 아빠가 떠나고 나서의 생활이 예상보다 훨씬 더 곤고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제가 병이 나서 아이들을 키우지 못하고 그들에게 맡겨야 했을 때, 그 상황에 힘 있게 대응하지 못하는 찌질한 저를 발견한 때였습니다.

 

제 마음과 일상에서 그 여성도, 아이들 아빠도, 심지어 아이들도 모두 한켠으로 치워 놓고, 한참동안을 그런 찌질한 저와 마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무의식에 깔린 수많은 다른 미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미움들 앞에서 웅크려 울고 있는 작은 아이 같은 저를 발견하는 일은,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미움보다 훨씬 더 아프고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미움의 한 가운데에서 쩔쩔 매고 있던 저 스스로를, ‘힘들었지 그럴만해’ 하고 감싸 안으려 했습니다. 그 찌질한 가운데 ‘이겁니다, 하느님!’ 하고 내세울 것들이 하나씩 둘씩 새로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혼과 오랜 투병으로 손상되거나 잊혀졌던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새롭게 재건되어갔고, 무렵 제 머릿속에서 그 여성이 잊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정말 미웠고, 다음번에는 도대체 나에게 왜 그러는지 이해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별로 궁금하지가 않습니다. 제가 세상 모든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그 시간 동안 만난 하느님은 오랫동안 울고 있는 저를 말없이, 하지만 안타깝게 지켜보시다가, 하나씩 깨달아 나갈 때마다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갈등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중단하고 자신과 본질에 몰입하는 침묵의 시간이 제겐 다름 아닌 기도시간이었습니다.

 

미움을 극복하고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네 번째 단계는, 문제의 보다 크고 근원적인 본질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연애와 결혼을 포함한 모든 사람과의 만남은 그 순간 이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영원히 함께 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단지 예상치 못한 시기에 준비하지 못한 방식의 이별을 맞이한 것 뿐이었습니다.


저는 원치 않는 방식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원인을 100 퍼센트 상대방에게 전가했습니다. 어린 나이 질병과 싸우는 과정에서 준비되지 않은 결혼을 했고, 그 결과 결혼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기를 원했습니다. 부끄럽지만 남녀 간의 사랑, 연애, 결혼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번도 깊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결혼을 환상의 피난처로 생각했던 것과 동시에, 이 시대가 가진 성차별적이며 억압적 결혼제도의 모순은 그대로 제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끓는 기름 같은 미움의 도가니를 벗어나기 위해서,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감히 말씀드린다면, 그 고민의 시간들 덕분에, 뒤늦은 50의 나이에 저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많은 교우 여러분들의 축복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 말씀 드립니다. 어려운 요소들이 많지만, 지금 저희는 새로운 형태의 다소 실험적인 결혼을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이제 어른이 된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사랑을 나눠주며 더 성숙해지기 위한 것인데, 우리사회에서는 다른 이들의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자세히 보니, 결혼이라는 것에는 사회적, 성적, 경제적, 공간적, 정서적, 법적, 문화적 등등 참 여러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모든 측면을 모두 한 번에 이뤄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뒤돌아보니, 만일 제가 사람에게만 천착해서, 한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는데 그쳤다면, 결국 그것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알고 보니 그 여성도 불쌍한 사람이더라 하고 이해하고는, 서로 사이좋게 살아가지만, 과거의 굴레에서는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는 신파드라마 만을 완성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움으로 괴로워하는 이를 주변에 둔 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상황에서 놓여나지 못했던 때에, 제 마음에 괴로움이 일면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하는 일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제게 필요했던 것은 공감이었습니다. 제가 원한 단 한 마디의 말이 있다면, 그건 “그래 힘들지 그럴 만해. 네 잘못이 아니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너무나 괴로웠던 제 마음을 가까운 이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친구들과의 폐쇄된 온라인 공간에서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멤버 중 한 명이 멀리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였습니다. 목사님인 친구로부터 어쩌면 일곱 번씩 일흔번 용서하라는 설교를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친구는 저 대신 마구 욕을 하면서 내가 태평양 건너가서 혼내주겠다는 좀 속물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순간 제 마음이 스르르 녹으면서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좀 풀리는 거였습니다.


반면, 어떤 경우 이런 제 마음을 이야기 했을 때 용서하라는 교과서적인 답을 내놓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준비 안 된 제게 용서하라 하는 말은 참 부질없었습니다. 펄펄 끓는 미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용서를 하라는 것은 그 미움이 부당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건 바로 책임을 미워하는 이에게로 전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이라 하더라도 그건 신호등을 지키듯이 인간이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로 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오랜 길을 가고 또 가야 도달할 수 있는 어떤 목적지입니다.


미움이든 절망이든 사랑이든 희망이든 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 온당한 실체입니다. 미움이라는 사건에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미워하는 자신입니다. 사람이 미움에 휩싸여 있을 때에는 그 미움의 감정 자체를 공감해주어야 합니다. 미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깨닫는 순간 옆에서 박수쳐주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큰 미움에 휩싸인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제 경험에 의한다면, 이제 잊고 용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라 하는 말은 그분들의 상처 난 마음을 소금으로 문지르는 것입니다. 진정 그분들이 다른 이를 용서하고 궁극의 화해를 이루길 바란다면, 언젠가 그 대상에서 놓여날 수 있도록, 지금은 충분히 휴식하며, 일어난 사건을 돌아보고, 새로운 성취와 사랑의 대상을 찾을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박탈당해 채워지지 않은 이에겐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다시 제 말씀을 드리자면, 제가 그렇게 저와 씨름하며 지내는 시간 동안, 다행스럽게도 저는 안정된 새로운 직장과 성취들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애정을 쏟아 부을 많은 대상들을 만나는 동안, 미움의 에너지는 풍화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저 혼자 노력해서 된 것은 아니었고, 많은 분들의 도움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또, 가족을 잃은 분들은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심리적 자책에 시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의 책임이 아니며, 잘못한 이들은 따로 있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특히 고문이나 성폭력 등, 한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을 겪은 피해자나 가족들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책에 나와 있습니다. 이때, 법정은 가해자를 벌하기에 앞서, 가장 권위 있는 목소리로 이 엄청난 일의 책임이 따로 있다는 것을 피해자에게 각인시켜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저도, 남들이 보면 다 끝난 이야기를 다시 붙들고,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하고 번민하던 날들에, 이혼의 책임이 제게 있지 않다는 법원의 판결문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당연한 판결문은 언제나 생각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좌표가 되었습니다.


잘못을 밝히는 것도 개인을 찾아 단죄하는 것에만 초점을 둘 일이 아니라, 심층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명백한 잘못을 한 사람이 있더라도, 개인에게 초점을 두게 되면, 언젠가 그 대상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 복수라는 새로운 구렁텅이에 빠지거나, 아니면 그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그 고통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보다는 인간 역사의 허무함만을 느낄 것입니다. 개인적 문제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한계를 가진 자신과 미움의 대상을 넘어설 수 있을 테고, 그것이 진정한 용서가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그것을 찾는 것이 하느님이 주신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우아하게 말씀드렸지만, 제 미움이 완전하게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 사건이 결정적이었지만, 의식의 표피적인 부분만을 건드렸을 뿐입니다. 그 이후로 새로운 미움의 상대가 또 생겨났습니다. 어제 누군가를 용서해서 스스로 만족할만했다 해도, 오늘 방심하면 또 내일 미움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합니다.

용서라는 것은 어느 날 기적과도 같이 찾아오는 일종의 “상태”이기도 하지만, 그 상태에 이르기까지 매일 조금씩 부서지면서 연습해서 이뤄가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피에타로 돌아가겠습니다. 약하디 약한 여성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먼저 했던 일은 악마의 가족이 되어 사랑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애초 그 사랑의 몸짓은 용서나 자비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엽기적이기까지 한 사랑의 몸짓을 반복한 결과, 애초에 원한 바는 아니었으나, 결국 그녀는 악마까지도 긍휼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 참혹한 복수로 인해 악마는 괴로움을 느낀 동시에, 참회하고 반성하고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현실 세계의 극단적인 비극과 내면 세계의 사랑과 구원이, 그리고 잔인한 복수와 자애로운 용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모순되게 만나는 지점이 이 영화의 백미였습니다. 그래서 이 잔혹극의 제목은 “피에타”, 즉 “자비를 베푸소서”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거대한 시스템이 낳은 문제를 한 인간 대 다른 한 인간의 문제로 접근한 탓에, 그 복수와 용서가 만나는 지점에서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부지할 아무런 힘도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역사가 이뤄져, 자비의 역사를 실현했지만, 이 영화가 비극인 이유는 반복되는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가련한 이 여성의 복수는 참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잔인한 장면들을 참고 보실 용기가 있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 꼭 한번 보시라고 권유합니다. 우리의 역사가 원래 하드코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

 돌아앉아 외면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미움들로 오늘도 고통 받고 있습니다.

어제 한 바가지 미움 떠낸 마음에 다시 새로운 미움이 차오릅니다.

언젠가 당신 앞에 서는 날, 버리고 오지 못한 미움 때문에 후회하지 않도록,

쉬지 않고 용서하는 저희 되게 하시옵소서.

저희에게 고통을 준 그 원수도 당신이 아끼는 소중한 자식임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미움을 미움으로 갚아, 고통의 역사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게 하시옵소서.

오늘 미움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진심으로 위로하여,

당신의 역사에 동참하는 저희 되게 하시옵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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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6991 에배소서 영광-찬송 (A glorious hymn) 엡1:3-14  최용우 형제  2021-01-09 194
16990 에배소서 영광-찬송 엡1:3-14  정용섭 목사  2021-01-09 222
16989 사무엘상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 삼상6;10-16  전원준목사  2021-01-09 335
16988 누가복음 악어의 눈물 눅6:27-36  이영교 형제  2021-01-08 285
16987 창세기 욕망의 윤리학, 하나님 안에서 욕망하라! 창1:26-29  백소영 교수  2021-01-08 198
» 마태복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마18:21-22  김선민 자매  2021-01-08 162
16985 마태복음 용서의 비밀 마18:23-35  문지영 자매  2021-01-08 199
16984 창세기 바벨의 언어에서 성령의 언어로 창11:1-9  정경일 형제  2021-01-08 241
16983 누가복음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눅9:3-5  김경형목사  2021-01-06 157
16982 마가복음 하늘이 열리는 세례 막1:4-11  강승호목사  2021-01-05 171
16981 신명기 말씀은 가까운 곳에 있다 신30:11-14  김기석 목사  2021-01-04 293
16980 욥기 모호한 삶 앞에서 욥29:11-20  김기석 목사  2021-01-04 172
16979 디모데후 기초가 튼튼하면 딤후2:14-19  김기석 목사  2021-01-04 298
16978 마태복음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 마15:1-9  김기석 목사  2021-01-04 198
16977 데살로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살전3:1-5  김기석 목사  2021-01-04 470
16976 창세기 사람을 보는 눈 창24:10-14  김기석 목사  2021-01-04 212
16975 빌립보서 두려움 없이 빌1:27-30  김기석 목사  2021-01-04 231
16974 창세기 에섹과 싯나의 시대를 넘어 창26:26-33  김기석 목사  2021-01-04 160
16973 누가복음 승리하는 삶 - 나의 강점을 조심하라 눅4:11- 13  김기성 목사  2021-01-03 329
16972 히브리서 믿음으로 살리라(신년 주일) 히10;38-39  전원준목사  2021-01-02 586
16971 누가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눅9:1-2  김경형목사  2020-12-30 132
16970 로마서 구원의 사역이 영원토록 롬16:25-27  강승호목사  2020-12-29 123
16969 갈라디아 종에서 아들로! (from servant to son) 갈4:4-7  최용우 전도  2020-12-27 238
16968 갈라디아 행위에서 존재로! 갈4:4-7  정용섭 목사  2020-12-27 208
16967 누가복음 하나님 앞에 다시 서다 눅15:11-24  김기성 목사  2020-12-27 344
16966 마태복음 내 안에 있는 헤롯을 밀어내라 마2:1-12  김기성 목사  2020-12-25 319
16965 누가복음 하나님의 구원 계획 눅2:22-40  강승호목사  2020-12-25 241
16964 시편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시107:19-20  김남준 목사  2020-12-24 308
16963 디모데후 주께서 하실 수 있나이다 딤후2:9  김남준 목사  2020-12-24 213
16962 시편 길 찾게 하는 연단 시119:67  김남준 목사  2020-12-24 271
16961 욥기 나의 믿음, 순금 같이 되어 욥23:10  김남준 목사  2020-12-24 275
16960 욥기 죄인을 건지심 욥22:30  김남준 목사  2020-12-24 83
16959 욥기 하나님이 낮추실 때 욥22:29  김남준 목사  2020-12-24 185
16958 욥기 화목을 이룬 자의 행복 욥22:28  김남준 목사  2020-12-24 177
16957 욥기 네 기도를 들으실 때 욥22:27  김남준 목사  2020-12-24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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