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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물

누가복음 이영교 형제............... 조회 수 285 추천 수 0 2021.01.08 2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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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6:27-36 
설교자 : 이영교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tong/media_board/read.asp?board_idx=1&sub_idx=22&seq=901&lef=02 

“악어의 눈물”

(누가복음 6:27-36)

 

2014년 9월 7일 주일예배

이영교 형제(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뇌물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뇌물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아서 없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병사용 진단서를 써야 하는데 음료수를 들고 와서 잘 써달라고 하면 그것도 뇌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니면 제약회사 직원이 방문하면서 커피를 가져오기도 하고 과자나 초콜릿을 조금 가져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도 자기 회사 약을 사용해달라는 뇌물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누가 선물을 주는데 뭔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면 좀 더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무 큰 선물이거나, 받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주려고 하면 ‘이거 좀 이상하다’라고 느낄 것입니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아무 느낌이 없거나,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혹은 마냥 즐겁게 받는 분이 있으면 그것은 문제가 심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선물은 받으면서 정말 즐겁고 고맙게 느낄 것이고 방금 말씀드린대로 뇌물은 받으면서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들 것입니다. 주는 사람의 태도에서 구분해보면, 선물은 선량한 마음이 담겨있고, 뇌물은 불순한 의도가 담겨있다고도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3년 전에 ‘사랑’을 주제로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오늘도 다시 같은 주제를 가지고 말씀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인용했던 성서 내용 중에 요한 1서 3장 18절의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두 성서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그 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참 부끄럽습니다.

 

근래에 가슴 아픈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지난해 8월 경북 칠곡에서는 친언니가 여동생을 발로 차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계모가 의붓딸인 여덟 살 여아를 폭행해 숨지게 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습니다.

보도된 바에 의하면, 동생을 때려 숨지게 한 용의자로 몰렸던 12살 된 친언니는 그동안 자신이 여덟 살짜리 동생을 때려 숨지게 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는데, 그 친언니는 비공개 증언을 통해 자신이 계모의 강압에 의해 거짓된 진술을 했다고 밝히면서 동생의 죽음이 계모의 구타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계모는 두 의붓딸에게 청양고추를 먹이고,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계단에서 밀어 넘어뜨리고, 뜨거운 물을 몸에 부어 화상을 입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벌을 세우고 굶기는 등 잔혹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며, 아버지 김씨도 계모의 친딸은 두고, 자신의 친딸인 자매에게만 손찌검을 했다고 합니다. 폭행은 계속됐고 결국 여덟 살 막내 딸은 계모의 폭행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끔찍한 아동 학대를 하고 의붓딸까지 숨지게 한 계모 임씨는 자신의 죄를 친언니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친언니는 "너도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고 겁에 질려 "인형을 뺏기 위해 발로 차서 동생을 숨지게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동생이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자신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계모의 강요로 허위진술을 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건이 드문 것이 아닙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아동학대신고 건수는 2009년 9309건에서 지난 2013년에는 1만 3706건으로 47%나 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벌어졌고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또 임병장 사건, 윤일병 사건이 알려져서 온 국민을 다시 한 번 분노와 슬픔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 사건 기사를 자세히 읽지 않았는데, 잔혹하고 비참한 상황을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피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번에 윤일병 사건에 대한 보도를 찾아보았습니다.

사건이 알려진 것은 4월 6일이라고 합니다. 치킨과 냉동만두 등을 내무반에서 먹던 중 선임병사들에게 맞아서 기도가 막힌 윤일병이 군 병원을 거쳐 종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이튿날인 7일 새벽 끝내 숨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인은 ‘기도 폐쇄에 따른 호흡정지’였습니다. 그런데 칠곡 사건과 유사하게 실상은 후에 다른 모습으로 밝혀졌습니다. 사건은 왜곡되고 은폐되어 우발적 구타로 사망한 것으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군 인권센터의 발표를 계기로 밝혀진 실상은 윤일병이 3월 초 자대배치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죽어간 사건입니다. 그 가혹행위라는 것은 맞아 쓰러지면 포도당 수액 주사를 놓아 기운을 차리게 한 뒤 다시 때리고, 맞아서 다리를 절뚝거리면 다리를 전다는 이유로 또 폭행하며, 개 흉내를 내게 강요하면서 바닥에 뱉은 가래침을 핥아 먹게 하는 외에도 차마 옮기기조차 끔찍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자세한 발표 내용을 내키지 않아 자세히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군에 입대한 젊은이가 동료들에게 맞아 죽은 사건에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을 접할 때 흔히 하는 반응이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라는 것입니다. 그 표현은 ‘나는 안 그런데, 내지는 나하고는 다르게’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는 나와는 다른 ‘악마’와 같은 모습을 가진 어떤 사람을 상상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들 일련이 사건에서 여러 사람들이 아돌프 아이히만을 떠올렸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의 존재 여부 등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아이히만의 상황과 그 해석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어 살펴보겠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 장교로 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이었습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국제 전범으로 수배 중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여 이름을 바꾸고 15년 동안 숨어 살았는데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돼 이스라엘에서 공개 재판 후에 1962년 5월 31일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판과정에서 아이히만을 평가한 여러 전문가들이 그에게서 적개심, 광기에 싸인 냉혈한 혹은 악마성을 찾아낼 줄 알았는데, 그저 보통의 인간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나는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을 죽인 적도 혐오한 적도 없다… 심지어 어떤 유대인은 존경하기도 했다… 국가의 명령을 받아 ‘추방’과 ‘이송’을 수행했고, 복종하는 것은 나의 의무였을 뿐이다…”라고 항변했다고 합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아빠이자 남편, 자신의 총으로 고양이 한 마리 죽일 줄 모르는 이웃이었다고 합니다. 평범한 보통 사람인 아이히만은 단지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충실하게 행한 것뿐입니다.

 

아주 비슷하게 윤일병 사건 공판을 보러 온 한 시민도 “가해자들이 너무 평범하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아이히만을 연구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평범한 악인 아이히만에 대해 ‘말하기의 무능, 생각의 무능, 판단의 무능’이라는 세 가지 무능을 지적했다고 합니다.

 

이들 ‘평범한 악인’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인을 연결하면 너무 비약일까요 타인의 입장을 생각 못한 무능한 점은 그리 다른 것 같지 않고, 출발점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돌보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랑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그들이 머리 속에 사랑에 대한 지식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상당히 성실하고 자기 일에 충실하고 주변에서 인정도 받고 자신의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확신을 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 내지 생각뿐이었던 것이겠지요. 이 비유는 이웃사랑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성서에 ‘사랑’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찾아보니 ‘사랑’이라는 명사에 대해 여러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등이 있습니다.

 

추석 명절입니다. 추석을 생각하면 추석빔을 입은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시골 할아버지 집을 찾아가면 오랜만에 여기저기서 모인 친척들이 모여 덕담도 주고받고 맛있는 음식도 나누며 화기애애하게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저를 찾아오신 분은 몹시 불안한 마음으로 명절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남편이 명절에 마주칠 시집 형제들과 한바탕 큰 싸움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드문 것은 아닌 것이 현실에서도 종종 마주치고, 명절이 지나면 싸움의 불행한 결과가 보도되기도 하니까요.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옆자리에 앉은 자매 형제들을 사랑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만일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하지 못한다면 이름도 모르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국어사전에서의 세 번째 설명인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정도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첫 번째 설명인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만 되어도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정도가 아니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성구를 읽을 때 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발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하여라’고까지 요구하십니다. 덧붙여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못박으셨습니다. 원수 사랑에 사전의 첫 번째 정의를 적용해 보면 더욱 힘들어집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만일 의붓딸을 때려서 숨지게 한 계모가 자신의 친 자식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쏟았다거나, 아이히만이 자신의 가족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런 사랑이 진짜 사랑인가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가족 이기주의’라고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실제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비슷한 의미이지 않을까요

 

그럼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인가요, 아니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인가요 고통 받는 이웃들이 주위에서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냥 가만히 있다면,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친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어느 순간 생각 없는 ‘평범한 악인’으로 전락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무엇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즉각적인 행동으로 연결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게 할까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다시 읽어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의 ‘측은한 마음’입니다.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무엇을 담아 주느냐에 따라, 즉 ‘선량한 마음’을 담아야 뇌물이 되지 않고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제사장, 레위인의 율법지식만이 아닌 ‘측은한 마음’을 담아야 말이나 혀가 아닌 행동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높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보았듯이 ‘마음’이 담기지 않은 눈물은 ‘악어의 눈물’에 불과할 뿐 감동도 없고 그리고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자동차는 직진성향을 가지도록 제작합니다. 그래서 주행 중 어느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손을 떼면 스스로 돌아와 정면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니 핸들에서 손을 놓아도 차는 똑바로 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기계가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바퀴의 상태나 도로의 경사 등으로 마냥 손을 놓고 간다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 반대편의 차와 충돌하거나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핸들을 단단히 잡고 놓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남의 처지를 살펴보는 ‘측은한 마음’ 혹은 ‘진정한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한 꾸준한 훈련이 없이 그저 명령에만 충실히 따르고 살아간다면 세월이 흘렀을 때 우리는 평범한 악인의 골짜기에 빠져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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