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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37:3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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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석 목사 |
참고 : |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
미래는 있는가?
시37:34-40
(2020/08/30, 성령강림 후 제13주)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의 법도를 지켜라. 주님께서 너를 높여 주시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니, 악인들이 뿌리째 뽑히는 모습을 네가 보게 될 것이다. 악인의 큰 세력을 내가 보니, 본고장에서 자란 나무가 그 무성한 잎을 뽐내듯 하지만, 한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흔적조차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그 모습 찾아볼 길 없더라. 흠 없는 사람을 지켜 보고, 정직한 사람을 눈여겨 보아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으나,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할 것이니, 악한 자들은 미래가 없을 것이다. 의인의 구원은 주님께로부터 오며, 재난을 받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주님이 그들을 도우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그들이 주님을 피난처로 삼았기에, 그들을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어둠이 지극한 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현존 앞에 서 있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아래 신을 벗고 무릎을 꿇었던 모세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깨우치심을 기다립니다. 장마는 그쳤지만 우리 마음에 드리운 먹구름은 걷히질 않습니다. 오히려 더 짙은 구름이 다가오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별로 하는 일이 없어도 몸과 마음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습니다. 저도 그럴진대 정말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는 이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난감한 상황에 처한 우리 국민들을 하나님께서 꼭 붙들어주시기를 빕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심각한 수해를 입은 화개장터 인근 주민들과 철원 주민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니 물이 침대 가장자리까지 차 있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오니 물이 더 차올랐고 아무 것도 건질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빠진 후에 집으로 혹은 가게로 돌아왔지만 남은 것은 떠밀려온 토사와 쓰레기뿐이었습니다. 망연자실茫然自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뭘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주민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조금씩 집과 마을을 정돈하기 시작했습니다. 토사들을 밀어내고, 벽지를 뜯어내고, 세간살이들을 물로 닦고, 버릴 것은 버렸습니다. 넘어진 벼들을 일으켜 세우고, 끊긴 길들을 복구했습니다. 난감하지만 새로운 삶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때이지만 그들 곁에 다가서서 복구에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현실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수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웃들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예배의 현장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또 그것을 참 믿음으로 포장하는 이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당신의 온 몸으로 받아 안으셨습니다. 정결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규정된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부정을 당신에게로 옮기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마음을 잃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던 예수님의 분노가 자꾸 떠오르는 나날입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
비교 종교학자인 로드니 스타크는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의 책 <기독교의 발흥>에는 주후 165년과 251년에 로마를 뒤흔들었던 역병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로마의 급격한 쇠락이 도덕적 타락 때문이었다고 보는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역병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 감소의 결과가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그 강고하던 로마의 군대조차 무용지물로 만드는 역병이 제국의 토대를 흔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앙이 닥쳤을 때 기독교인들은 사랑과 선행을 통해 그 시대를 치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로마에 성행하던 다른 종교들이 역병 앞에서 무너지고 있을 때 기독교는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에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른 이를 돌보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한 기독교인들의 노력을 치하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도맡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병이 옮자 그 아픔을 자신에게로 끌어와 기꺼이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를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았습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옮김│이현수 감수, 좋은씨앗, 2016, p.129)
아픔을 자신에게로 끌어와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고,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 속에 복음의 본질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려 교회는 맛 잃은 소금처럼 길바닥에 버려져 짓밟히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의 허장성세에 집착할 것 없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척박한 땅을 갈아엎고 거기에 씨앗을 심는 농부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싹이 돋아나지 않으면 그 위에 움씨를 뿌리던 그 끈질김을 배워야 합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극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홍해 바다의 갈라짐, 구름 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솟아난 샘물, 가나안 정복과 땅의 분배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성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그 모든 사건들의 개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정착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과정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벗어난 사람들,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렸던 ‘아피루’라 불리던 계층 사람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지주들의 억압과 착취를 견디다 못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던 이들이 함께 형성한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끈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셨습니다. 초기 철기 시대에 이들은 유다 산지, 곧 가나안 고지대에 새로운 거처를 세웠습니다. 주중해변의 저지대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큰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올리브나 포도와 같은 과일과 채소 등의 농작물을 재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산비탈에 계단식 농지를 만들어 테라스 농법을 시작했습니다. 다랑논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돌과 자갈들을 걷어내고, 그것으로 울타리를 쌓았습니다. 식량을 여퉈두기 위해 곳곳에 사일로Silo를 만들었습니다. 돌로 쌓아서 곡식들을 오래 저장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10월부터 4월까지 내리는 비를 모아두어야 1년을 지낼 수 있었기에 수조Cistern을 파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바위 안쪽을 잘라내고 회반죽을 발라서 물이 새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리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사는 새로운 세상을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내했습니다.(참고/윌리엄 G. 데버, <이스라엘의 기원>, 양지웅 역, 삼인, 2020).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마음입니다.
∙세상 탓 하지 말자
오늘 우리가 읽은 시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마음을 다잡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에 이 시의 핵심 메시지가 나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마치 우리의 속마음을 다 들여다본 것 같지 않은가요?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불평하고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기보다는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게 현명한 태도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해답 없는 삶이라 하여 함부로 사는 것처럼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2)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할 것 없습니다. 시인은 믿음의 사람들이 꼭 붙들고 살아야 할 것들을 열거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3)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8)
주님만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낯설고 황량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지속되고 있음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 근본적 신뢰가 바로 설 때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설사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선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며 사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불의한 이들을 보면서 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격분이 우리에게서 선을 행할 힘을 빼앗아 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여움, 격분, 불평을 멀리 하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제가 이 시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23-24)
바람이 불면 비틀거릴 수 밖에 없는 게 인생입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고사목 밖에는 없다지 않습니까. 이정하 시인은 ‘바람 속을 걷는 법’이라는 시에서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 “바람이 약해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 나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찬송가 373장 2절도 같은 진실을 노래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지향이 분명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틀거려도 하나님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라 믿기 때문입니다.
∙지켜보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악인들이 뿌리째 뽑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큰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보여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또 흠 없는 사람과 정직한 사람을 눈여겨 보라고 말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지만, 악한 자들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을 이루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실감할 때 우리 삶은 이리저리 떠밀리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다고 말합니다(히6:19). 함민복 시인의 ‘닻’(<말랑말랑한 힘>)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파도가 없는 날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밥“.
정말 그러합니다. 배가 흔들릴수록 닻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때로 상처와 시련은 우리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오히려 닻이 되어 우리를 붙잡아 줄 때도 있습니다. 시인은 “물 위에서 사는/뱃사람의 닻“이 무엇인지를 밝혀줍니다. 짐작이 되십니까? “저 작은 마을/저 작은 집”입니다. 저기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뱃사람의 마음을 붙잡아주는 닻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닻이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바로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절망의 땅에 희망을 파종합니다. 우리는 패배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한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나날이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잔해를 바라보는 것 같은 나날입니다. 아프고 쓰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시작할 겁니다. 지배와 억압과 수탈을 통해 유지되던 로마 제국에 속해 살면서도 섬김과 나눔과 돌봄을 통한 평화를 꿈꾸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꿈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파종의 노래를 부릅시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립시다. 아프고, 소외된 이들의 설 땅이 되어 주셨던 그리스도를 꼭 붙드십시오. 그것이 바른 예배입니다. 미래는 있는가? 이 질문 삶으로 응답하시기를 빕니다. 토사를 밀어내고 벽을 다시 바르고 가재도구들을 물로 씻는 수해민들의 끈질김으로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겁니다. 주님이 밝혀주시는 환한 빛을 보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십시오. 아멘.
시37:34-40
(2020/08/30, 성령강림 후 제13주)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의 법도를 지켜라. 주님께서 너를 높여 주시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니, 악인들이 뿌리째 뽑히는 모습을 네가 보게 될 것이다. 악인의 큰 세력을 내가 보니, 본고장에서 자란 나무가 그 무성한 잎을 뽐내듯 하지만, 한순간이 지나고 다시 보니, 흔적조차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그 모습 찾아볼 길 없더라. 흠 없는 사람을 지켜 보고, 정직한 사람을 눈여겨 보아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으나,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할 것이니, 악한 자들은 미래가 없을 것이다. 의인의 구원은 주님께로부터 오며, 재난을 받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주님이 그들을 도우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그들이 주님을 피난처로 삼았기에, 그들을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어둠이 지극한 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현존 앞에 서 있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아래 신을 벗고 무릎을 꿇었던 모세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깨우치심을 기다립니다. 장마는 그쳤지만 우리 마음에 드리운 먹구름은 걷히질 않습니다. 오히려 더 짙은 구름이 다가오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합니다. 별로 하는 일이 없어도 몸과 마음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습니다. 저도 그럴진대 정말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는 이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난감한 상황에 처한 우리 국민들을 하나님께서 꼭 붙들어주시기를 빕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심각한 수해를 입은 화개장터 인근 주민들과 철원 주민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니 물이 침대 가장자리까지 차 있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오니 물이 더 차올랐고 아무 것도 건질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빠진 후에 집으로 혹은 가게로 돌아왔지만 남은 것은 떠밀려온 토사와 쓰레기뿐이었습니다. 망연자실茫然自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뭘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주민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조금씩 집과 마을을 정돈하기 시작했습니다. 토사들을 밀어내고, 벽지를 뜯어내고, 세간살이들을 물로 닦고, 버릴 것은 버렸습니다. 넘어진 벼들을 일으켜 세우고, 끊긴 길들을 복구했습니다. 난감하지만 새로운 삶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때이지만 그들 곁에 다가서서 복구에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현실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수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웃들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예배의 현장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또 그것을 참 믿음으로 포장하는 이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당신의 온 몸으로 받아 안으셨습니다. 정결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규정된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부정을 당신에게로 옮기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마음을 잃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던 예수님의 분노가 자꾸 떠오르는 나날입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
비교 종교학자인 로드니 스타크는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분석한 바 있습니다. 그의 책 <기독교의 발흥>에는 주후 165년과 251년에 로마를 뒤흔들었던 역병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로마의 급격한 쇠락이 도덕적 타락 때문이었다고 보는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역병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 감소의 결과가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그 강고하던 로마의 군대조차 무용지물로 만드는 역병이 제국의 토대를 흔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앙이 닥쳤을 때 기독교인들은 사랑과 선행을 통해 그 시대를 치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로마에 성행하던 다른 종교들이 역병 앞에서 무너지고 있을 때 기독교는 오히려 성장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에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른 이를 돌보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한 기독교인들의 노력을 치하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도맡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병이 옮자 그 아픔을 자신에게로 끌어와 기꺼이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를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았습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옮김│이현수 감수, 좋은씨앗, 2016, p.129)
아픔을 자신에게로 끌어와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고,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 속에 복음의 본질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려 교회는 맛 잃은 소금처럼 길바닥에 버려져 짓밟히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동안의 허장성세에 집착할 것 없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척박한 땅을 갈아엎고 거기에 씨앗을 심는 농부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싹이 돋아나지 않으면 그 위에 움씨를 뿌리던 그 끈질김을 배워야 합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극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홍해 바다의 갈라짐, 구름 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솟아난 샘물, 가나안 정복과 땅의 분배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성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그 모든 사건들의 개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정착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 과정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벗어난 사람들,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렸던 ‘아피루’라 불리던 계층 사람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지주들의 억압과 착취를 견디다 못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던 이들이 함께 형성한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끈이 바로 야훼 하나님이셨습니다. 초기 철기 시대에 이들은 유다 산지, 곧 가나안 고지대에 새로운 거처를 세웠습니다. 주중해변의 저지대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큰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올리브나 포도와 같은 과일과 채소 등의 농작물을 재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산비탈에 계단식 농지를 만들어 테라스 농법을 시작했습니다. 다랑논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돌과 자갈들을 걷어내고, 그것으로 울타리를 쌓았습니다. 식량을 여퉈두기 위해 곳곳에 사일로Silo를 만들었습니다. 돌로 쌓아서 곡식들을 오래 저장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10월부터 4월까지 내리는 비를 모아두어야 1년을 지낼 수 있었기에 수조Cistern을 파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바위 안쪽을 잘라내고 회반죽을 발라서 물이 새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리지 않고 서로 존중하며 사는 새로운 세상을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내했습니다.(참고/윌리엄 G. 데버, <이스라엘의 기원>, 양지웅 역, 삼인, 2020).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 마음입니다.
∙세상 탓 하지 말자
오늘 우리가 읽은 시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마음을 다잡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에 이 시의 핵심 메시지가 나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마치 우리의 속마음을 다 들여다본 것 같지 않은가요?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불평하고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기보다는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게 현명한 태도입니다. 인생의 의미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해답 없는 삶이라 하여 함부로 사는 것처럼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2)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할 것 없습니다. 시인은 믿음의 사람들이 꼭 붙들고 살아야 할 것들을 열거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3)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8)
주님만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낯설고 황량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지속되고 있음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 근본적 신뢰가 바로 설 때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설사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선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며 사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불의한 이들을 보면서 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격분이 우리에게서 선을 행할 힘을 빼앗아 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여움, 격분, 불평을 멀리 하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제가 이 시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23-24)
바람이 불면 비틀거릴 수 밖에 없는 게 인생입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고사목 밖에는 없다지 않습니까. 이정하 시인은 ‘바람 속을 걷는 법’이라는 시에서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 “바람이 약해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 나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찬송가 373장 2절도 같은 진실을 노래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지향이 분명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틀거려도 하나님이 우리 손을 잡아주시라 믿기 때문입니다.
∙지켜보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악인들이 뿌리째 뽑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큰 세력을 형성한 것처럼 보여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또 흠 없는 사람과 정직한 사람을 눈여겨 보라고 말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지만, 악한 자들은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을 이루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실감할 때 우리 삶은 이리저리 떠밀리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다고 말합니다(히6:19). 함민복 시인의 ‘닻’(<말랑말랑한 힘>)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파도가 없는 날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밥“.
정말 그러합니다. 배가 흔들릴수록 닻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때로 상처와 시련은 우리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오히려 닻이 되어 우리를 붙잡아 줄 때도 있습니다. 시인은 “물 위에서 사는/뱃사람의 닻“이 무엇인지를 밝혀줍니다. 짐작이 되십니까? “저 작은 마을/저 작은 집”입니다. 저기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뱃사람의 마음을 붙잡아주는 닻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닻이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바로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우리는 절망의 땅에 희망을 파종합니다. 우리는 패배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한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나날이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잔해를 바라보는 것 같은 나날입니다. 아프고 쓰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시작할 겁니다. 지배와 억압과 수탈을 통해 유지되던 로마 제국에 속해 살면서도 섬김과 나눔과 돌봄을 통한 평화를 꿈꾸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꿈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파종의 노래를 부릅시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립시다. 아프고, 소외된 이들의 설 땅이 되어 주셨던 그리스도를 꼭 붙드십시오. 그것이 바른 예배입니다. 미래는 있는가? 이 질문 삶으로 응답하시기를 빕니다. 토사를 밀어내고 벽을 다시 바르고 가재도구들을 물로 씻는 수해민들의 끈질김으로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겁니다. 주님이 밝혀주시는 환한 빛을 보며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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