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3:7-12 |
---|---|
설교자 : | 김기석 목사 |
참고 : |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
들사람의 외침
마3:7-12
(2020/09/13, 창조절 제2주)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광야의 사람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일들을 성심껏 감당하신 여러분들의 수고를 주님께서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여름내 눅진눅진해진 옷가지와 이불을 거풍하듯이, 가끔은 우리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일상의 일들에서 눈을 돌려 우리 삶을 높은 자리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의 환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희구했습니다. 속진에 묻혀 사는 우리들에게는 언감생심이지만 시인의 그런 고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맑음의 세계를 가리켜 보이고 있습니다.
힘겨운 날들이 계속되면서 우리의 양심도, 감성도, 신앙적 결의도 희미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부평초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것은 아닌지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가끔은 우리를 타격하는 말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말, 양심을 뒤흔드는 말, 위선을 벗겨버리는 말, 나약함을 질타하는 말을 멀리 할 때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예언자를 가리켜 어느 목사님은 ‘양심을 습격하는 사람들’이라 표현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세상의 불의 앞에서 적당히 눈감고 살면서 ‘그래도 이만하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지’ 생각하는 알량한 자기 위안을 가차없이 짓부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합니다. 인기도 없습니다. 영합(迎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언자의 반열에 선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열정에 사로잡혀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말하는 ‘들사람‘이었습니다. 들사람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고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사람들을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할 종교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보고 그는 분노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그는 광인 취급을 받을 겁니다. 교회는 그를 불경한 사람,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라며 내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주님 오실 길을 닦는 사람임을 말입니다. 그는 굽은 길을 곧게 하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유롭습니다. 체면이나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들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허위의식을 타격하는 사람, 껍질을 벗기는 사람, 옛사람의 낡은 옷을 사정없이 잡아채 발가벗기는 사람입니다.
∙독사의 자식들
세례자 요한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유력 인사일 수도 있었습니다. 유력자가 자기의 갱신운동에 공감을 표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내보일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그의 말은 고상하지 않습니다. 날 것 그대로입니다. 유력자의 비위나 맞추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요한에게 이끌린 까닭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기존의 종교에 절망감을 느껴 새로운 갱신운동에 동참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기야 어떻든 요한의 말은 과격합니다.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기존의 종교 질서에 대한 요한의 분노가 여실히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알량한 자존심, 허위의식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는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에게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감이지만 그 진실함은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입증되는 것이었습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회개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위임된 권한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선민이라는 헛된 자부심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낮춰본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살기 위해 확실한 것을 붙드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기 확신을 근거로 하여 다른 이들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종교적 확신이 때로는 교만으로 나타나고, 반사회적 행태를 부추기고, 타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으로 진행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사는 모습은 전혀 예수와 닮지 않았는데,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보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자가당착에 빠진 이들이 지도자연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기 신념을 믿음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노출이 많은 사람일수록 말을 아껴야 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또 다른 호는 일속자(一粟子)입니다. 왜 그런 호를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지긋이 눌러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서 제일 하잘 것 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 추스르는 거지.”(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이런 겸허함이 없을 때 종교적 자부심은 헛된 망상이 됩니다. 예수님은 헛된 미망에 빠진 이들을 향해 준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7:22-23)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정과 일치를 이루지 못한 이들, 오직 자기 확장을 위해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주신 준엄한 경고입니다.
16세기의 현자인 몽테뉴는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안인희 옮김, 유유, p.110) 질문을 명령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늘 남을 가르치려 하고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49-407)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세례자 요한과 많이 닮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49-407)입니다. 사실 오늘은 그의 축일입니다. 성인들의 축일은 그의 사망일이니까 9월 13일이 그의 사망일이라는 말입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인 그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황금의 입’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역사상 최고의 설교자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정교회는 그를 매우 중요한 성인으로 간주합니다. 정교회의 중심 전례는 그의 이름을 따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거룩한 전례’라고 지칭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이 전례 음악(Liturgy of St. John Chrysostom)을 가끔 듣습니다. 악기 소리 없이 오직 사람의 소리만으로 그렇게도 장엄하고 거룩한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진리를 적당히 에누리해서 사람들 앞에 팔지 않았습니다. 예수 정신이 아닌 것을 검불처럼 여겨 내던졌습니다. 그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 곁에 서는 한편, 화려한 옷, 장신구, 금은으로 만든 식기에 집착하고 은요강을 사용하는 상류층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짓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계시는데 여러분은 그런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니 더 옳게 말하면, 그런 미친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당신의 동료 인간이 추위에 얼어 죽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세간살이 따위나 마련하고 있습니까?”(루돌프 브랜들레,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p.118)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내인 황후 에브독시아도 그의 비판을 비켜갈 수는 없었습니다. 에브독시아는 처음에는 크리소스토모스에게 아주 호의적이었고 그가 하려는 많은 일에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황후의 권세를 동원하여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크리소스토모스는 경고의 편지 보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황후의 권세를 주었다면 그것은 정의를 세우라고 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흙과 재, 풀과 먼지에 불과하고, 인생 또한 그림자와 연기 그리고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듯이, 황제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더 이상 고통과 불행을 지우지 마십시오. 당신은 포도밭과 무화과밭, 기름과 돈,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무덤에 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요아니스 엘렉시우 대사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요한 박용범 옮김, 정교회출판사, p.83)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에브독시아는 주교를 유배지에 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박차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뒤에 오시는 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회개하는 법
크리소스토모스는 성도들에게 다섯 가지 회개하는 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지음, 로버트 밴 더 웨이어 엮음, <단순하게 살기>, 이현주 옮김, 아침이슬, p.123-4 참조)
✓회개란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죄를 시인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다가오고, 용서의 은총이 부어집니다. 자기 죄를 시인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성도들에게 늘 자기 양심을 고발자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법정에서 다른 고발자를 만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잊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악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죄지은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이웃이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늘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판에 박힌 기도 말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놓는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가 필요합니다.
✓회개하려는 이들은 널리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은 것에 감사하면서 그 빚을 사랑으로 갚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회개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 자신에게는 아무런 덕도 없거니와 하나님께 바칠 것은 다만 지은 죄가 있을 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의 마음 가운데 머물 때 우리 삶은 조금씩 맑아집니다. 우리 영혼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은총의 빛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웃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도 여물지 않는 벼를 보는 것은 슬픔입니다. 속이 꽉 들어찬 낟알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잎은 무성했지만 열매는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껍질이 벗겨졌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선물임을 늘 명심하면서,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그런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으니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지금 일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일터에서 기쁨을 수확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마3:7-12
(2020/09/13, 창조절 제2주)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광야의 사람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일들을 성심껏 감당하신 여러분들의 수고를 주님께서 귀히 여기실 것입니다. 여름내 눅진눅진해진 옷가지와 이불을 거풍하듯이, 가끔은 우리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던 일상의 일들에서 눈을 돌려 우리 삶을 높은 자리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혼의 환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희구했습니다. 속진에 묻혀 사는 우리들에게는 언감생심이지만 시인의 그런 고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맑음의 세계를 가리켜 보이고 있습니다.
힘겨운 날들이 계속되면서 우리의 양심도, 감성도, 신앙적 결의도 희미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부평초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것은 아닌지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가끔은 우리를 타격하는 말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말, 양심을 뒤흔드는 말, 위선을 벗겨버리는 말, 나약함을 질타하는 말을 멀리 할 때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예언자를 가리켜 어느 목사님은 ‘양심을 습격하는 사람들’이라 표현했습니다. 예언자들은 세상의 불의 앞에서 적당히 눈감고 살면서 ‘그래도 이만하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지’ 생각하는 알량한 자기 위안을 가차없이 짓부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합니다. 인기도 없습니다. 영합(迎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언자의 반열에 선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열정에 사로잡혀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말하는 ‘들사람‘이었습니다. 들사람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고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사람들을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할 종교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보고 그는 분노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그는 광인 취급을 받을 겁니다. 교회는 그를 불경한 사람,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라며 내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주님 오실 길을 닦는 사람임을 말입니다. 그는 굽은 길을 곧게 하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유롭습니다. 체면이나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들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허위의식을 타격하는 사람, 껍질을 벗기는 사람, 옛사람의 낡은 옷을 사정없이 잡아채 발가벗기는 사람입니다.
∙독사의 자식들
세례자 요한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유력 인사일 수도 있었습니다. 유력자가 자기의 갱신운동에 공감을 표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내보일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그의 말은 고상하지 않습니다. 날 것 그대로입니다. 유력자의 비위나 맞추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일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요한에게 이끌린 까닭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기존의 종교에 절망감을 느껴 새로운 갱신운동에 동참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기야 어떻든 요한의 말은 과격합니다.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기존의 종교 질서에 대한 요한의 분노가 여실히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알량한 자존심, 허위의식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합니다. 첫째는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에게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감이지만 그 진실함은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만 입증되는 것이었습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회개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위임된 권한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선민이라는 헛된 자부심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을 낮춰본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살기 위해 확실한 것을 붙드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기 확신을 근거로 하여 다른 이들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종교적 확신이 때로는 교만으로 나타나고, 반사회적 행태를 부추기고, 타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으로 진행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사는 모습은 전혀 예수와 닮지 않았는데,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보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자가당착에 빠진 이들이 지도자연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기 신념을 믿음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노출이 많은 사람일수록 말을 아껴야 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또 다른 호는 일속자(一粟子)입니다. 왜 그런 호를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지긋이 눌러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서 제일 하잘 것 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 추스르는 거지.”(최성현, <좁쌀 한 알>, 도솔) 이런 겸허함이 없을 때 종교적 자부심은 헛된 망상이 됩니다. 예수님은 헛된 미망에 빠진 이들을 향해 준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7:22-23)
두려운 말씀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정과 일치를 이루지 못한 이들, 오직 자기 확장을 위해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주신 준엄한 경고입니다.
16세기의 현자인 몽테뉴는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안인희 옮김, 유유, p.110) 질문을 명령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늘 남을 가르치려 하고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49-407)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세례자 요한과 많이 닮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349-407)입니다. 사실 오늘은 그의 축일입니다. 성인들의 축일은 그의 사망일이니까 9월 13일이 그의 사망일이라는 말입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인 그에게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황금의 입’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역사상 최고의 설교자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정교회는 그를 매우 중요한 성인으로 간주합니다. 정교회의 중심 전례는 그의 이름을 따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의 거룩한 전례’라고 지칭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한 이 전례 음악(Liturgy of St. John Chrysostom)을 가끔 듣습니다. 악기 소리 없이 오직 사람의 소리만으로 그렇게도 장엄하고 거룩한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진리를 적당히 에누리해서 사람들 앞에 팔지 않았습니다. 예수 정신이 아닌 것을 검불처럼 여겨 내던졌습니다. 그는 언제나 가난한 이들 곁에 서는 한편, 화려한 옷, 장신구, 금은으로 만든 식기에 집착하고 은요강을 사용하는 상류층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짓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계시는데 여러분은 그런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니 더 옳게 말하면, 그런 미친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당신의 동료 인간이 추위에 얼어 죽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세간살이 따위나 마련하고 있습니까?”(루돌프 브랜들레,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p.118)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내인 황후 에브독시아도 그의 비판을 비켜갈 수는 없었습니다. 에브독시아는 처음에는 크리소스토모스에게 아주 호의적이었고 그가 하려는 많은 일에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황후의 권세를 동원하여 불의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크리소스토모스는 경고의 편지 보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황후의 권세를 주었다면 그것은 정의를 세우라고 주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흙과 재, 풀과 먼지에 불과하고, 인생 또한 그림자와 연기 그리고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듯이, 황제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더 이상 고통과 불행을 지우지 마십시오. 당신은 포도밭과 무화과밭, 기름과 돈,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무덤에 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요아니스 엘렉시우 대사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요한 박용범 옮김, 정교회출판사, p.83)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에브독시아는 주교를 유배지에 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박차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뒤에 오시는 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과 불의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회개하는 법
크리소스토모스는 성도들에게 다섯 가지 회개하는 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이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지음, 로버트 밴 더 웨이어 엮음, <단순하게 살기>, 이현주 옮김, 아침이슬, p.123-4 참조)
✓회개란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죄를 시인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다가오고, 용서의 은총이 부어집니다. 자기 죄를 시인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성도들에게 늘 자기 양심을 고발자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법정에서 다른 고발자를 만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잊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악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죄지은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이웃이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늘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판에 박힌 기도 말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놓는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가 필요합니다.
✓회개하려는 이들은 널리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탕감 받은 것에 감사하면서 그 빚을 사랑으로 갚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회개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어, 자신에게는 아무런 덕도 없거니와 하나님께 바칠 것은 다만 지은 죄가 있을 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의 마음 가운데 머물 때 우리 삶은 조금씩 맑아집니다. 우리 영혼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이 걷히고 은총의 빛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웃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도 여물지 않는 벼를 보는 것은 슬픔입니다. 속이 꽉 들어찬 낟알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잎은 무성했지만 열매는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껍질이 벗겨졌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선물임을 늘 명심하면서,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그런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으니 희망은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지금 일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일터에서 기쁨을 수확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