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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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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18절-22절: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헤롯은 사람들의 소문만 듣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존재적으로 궁금하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다 말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면 헤롯의 궁금증과 예수님의 궁금증을 대조해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는데, 이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녔고 보고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음도 전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예수 믿고 수 년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녔는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향해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대답을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신 것은? 1. 정확하게 알게 해 주시려고 물었다? 2. 예수 당신이 제자들의 신앙을 알고 싶어서 물었다? 3. 예수 당신을 높여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물었다? 정답은 1번. 사실 제자들이 그만큼 따라다니면서 그만큼 듣고 배웠으면 하나님 앞에서 속화되고 타락되고 사망적인 일반 세상개념은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면 예수님처럼 천국복음을 가르쳐야지 왜 땅의 복음을 가르치느냐? 교인들은 그것이 이단성이고 거짓성인 줄을 모르고 역시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고 세상 것을 구하고 있으니 그게 어찌 예수 믿는 거냐? 이건 예수를 이용해 먹는 거다. 물론 예수님은 이용당하지 않는 것이고 사실은 자기가 마귀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이다. 당하면서도 당한 줄을 모르니 그게 정신이 빠진 거다.
사건이 오면 하나님의 뜻을 잡고 헤쳐 나갈 자신을 세워야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준 것은 고치라고 때리고 있는 건데 도와주겠느냐? 더 얻어맞는다. 사람이 적으나마 일반적으로도 바른 정신을 가졌다면 이치를 생각하게 돼 있다. 그럼에도 예수 믿으면서 이치를 생각을 못하는 것은 자기 감정 자기 생각대로 믿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반 세상 사람들의 해석방식을 따라가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영이 거듭난 것도 모르고, 성령님으로 감화 감동된 말도 아니고 타락된 지식을 가지고 말하고, 일반지식을 가지고 생각을 하고 가치판단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되고 예수님의 가치판단 평가성을 따라가야 한다. 그래야 맞는 거다.
땅의 가치평가와 하늘의 가치평가가 어떻게 같으냐? 다 같이 교회에 앉아있어도 그 속의 신앙의 질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공이 있다. 허공은 통할 수가 없는 거다. 결과적으로 하늘로부터 벼락밖에 없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깨닫고, 사람과 관계를 짓고 하는 것이 타락된 일반 세상개념을 벗어나야 한다. 생활하는 것은 일반사람들과 똑같이 보일지라도 안 믿는 사람들은 부자 되려고 살고 돈 벌 목적으로 일을 하는 거지만 예수 믿는 우리는 그들과 한 자리에 같이 있어도 그 일을 통해서 그걸 매개물로 해서 참 사람으로 예수 닮는 사람으로 되기 위해 같이 하는 거다.
이방세계의 원인과 결과와 비진리적인 다른 복음을 외치는 거짓된 자들의 결과를 성경으로 다 보여줬다. 그런데도 오늘날 거짓교회의 거짓 인도자들과 거짓 교인들은 여전히 일반 세상개념으로 복음을 생각을 한다. 성령을 귀신처럼 생각을 한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주의 구복주의 국구주의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세례요한의 외침을 사회 정의구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회 정의구현을 하러 왔느냐? 못 사는 사람을 부자 되게 만들려고 왔느냐? 병에서 구원하러 왔느냐? 만능의 능력자가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느냐? 세상 속화된 교인들의 생각처럼 예수님께서 사회 정의구현을 위해 이 땅에 왔다면 정의롭지 못한 자들에게 당신의 만능의 능력으로 하루아침에 벼락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당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이다. 비진리에서 진리로 구원이다. 사망적 지식에서 생명적 지식으로 구원이다. 어떠한 사건 환경이 올지라도 진리로써 바로 대처해서 영능의 실력을 이루는 것도 구원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듣고 배우고 깨달은 제자들도 이런 능력을 행하는 예수님을 엘리야 정도로 생각을 했을까? 예수님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하시는 이 말씀에 여러분들은 대답할 수 있느냐?
베드로가 말하길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대답을 적중적으로 잘한 것이냐, 잘못한 것이냐, 비슷하게 말을 한 것이냐? 적중한 대답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과연 그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진리가 충만한 가운데서 그 신앙의 질에서 나온 답이냐? 그게 문제다.
자기 속에 진리가 충만한 가운데서 나와야 할 텐데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오는 얼렁뚱땅의 대답은 말 자체는 적중성이다. 특별히 우리교회 교인들은 진리 적중성의 말은 잘 하는데 과면 그것이 자기 속에서 진리가 충만한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 대부분 그렇지를 않다.
그리스도가 무엇이냐? 기름부음 받은 자라. 기름부음은 구약성경에서 왕 선지자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 세운다. 구약에서 이런 의식을 행하는 것은 신약에서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은 분이다.
신약에서 당신의 종들을 세우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서 인정을 하는 것이 기름부음이다. 그래서 오늘날 목사를 세우려면 안수를 한다. 이제 하나님의 종이니 평생 하나님 앞에 몸 바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살라고 안수를 해서 보내는 것이다.
안수를 하는데 교회 부흥시키고, 노후대책 잘 세우고, 큰 예배당 짓고 하는 그런 안수가 있느냐? 신학교에서 차마 그런 안수가 있을까? 그런데 있을 수 있다. 교회 안에서도 악령 받은 자들이 ‘너는 하나님의 종이 될지어다’ 하고, 처녀에게는 무조건 사모가 되라고 한다. 사모가 되려면 최소한 일반적인 때는 벗어야 한다. 남편이 목사라면 아내는 사모인데, 사모 소리를 아무나 듣는 거냐? 그런데 일반 세상 시장거리에서 노는 아주머니와 똑같은 차원이라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느냐?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 신약에 와서는 성령의 역사로 인정이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인정이 아니다. 안다고 해서 인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 등 모든 것이 성령님께서 붙들어 쓰심에 인정이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기름부음이나 신약의 성령으로 인정하심이나 모두 하나님의 세우심이다.
타락된 세상에는 서식이나 서류 또는 공증된 인증이 있듯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메시아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보냄을 입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즉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자격자라. 너희들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을 자요 그리스도처럼 만들어질 자인데, 이게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 된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처럼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는 것을 성육신으로 우리에게 눈으로 보여주는 거다. 인간들은 눈으로 안 보면 인정을 안 하려고 한다.
성령의 사람이라 함은 그리스도 당신이 당신의 사역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성질을 성품을 입힐 자라. 이렇게 해 주실 분은 하나님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으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그렇게 만들어져야 한다. 만들어 주려고 따르라는 것이고, 따르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왜 가룟유다처럼 돈에 욕심을 내서 그 돈 다 못 먹고 배가 터져서 죽느냐? 예수 믿으면서 주님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려면 교회에 왜 다니느냐? 성경에 분명히 제시했는데 왜 그렇게 되지 않느냐?
우리 모두가 자기가 참 사람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거냐? 나이가 많아도 어린아이만도 못한 어른이 많고, 나이가 젊어도 사람 앞에 옳은 행실을 가진 젊은이도 있다. 아무 교회에 가더라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라. 만들어질 수 있는 곳으로 가고. 교회를 옮길 때 세상의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있는 곳이면 가깝던 멀던 그리로 가라. 그게 하나님 앞에 옳은 거다.
교회는 자기 장기자랑 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자기 육신생활을 위한 곳이 아니다. 자기 직장이 아니다. 목사님들은 특히 이걸 알아야 한다. 교회가 옛사람을 키우는 곳이냐?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키우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는 곳이 아니다. 교회를 바로 알아야 한다.
현재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즉, 주님이 보혜사 성령으로 자기에게 와서 무슨 역사를 하고 계시는 것 같으냐? 이걸 몰라도 되느냐? 자기에게 귀신이 달라붙어서 역사를 하는 건지, 성령님께서 자기 속에서 좋아서 역사를 하는 건지 몰라도 되는 것이냐?
그리스도의 역사가 있는 순종자는 다양한 순종을 통해서 풍부한 성품의 사람으로 덕스럽게 잘 성장이 된다. 그러나 교만자는 순종은 할 줄 모르고 대립이 심하고, 아래 위를 잘 알지 못하고, 사람을 잘 알지 못하고, 자기 지도력만 펼치려고 한다.
사람은 순종으로 키워지고 자라게 된다. 순종은 안 하면서 명령만 하면 자라지를 못한다. 이러면 사람이 가시처럼 된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또 다른 곳으로 갔다가 또 마음에 안 들면 또 다른 곳으로 가고. 그리스도 밖의 신앙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없다.
21절에 당신이 하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1. 함부로 말을 하면 예수님께서 그 날로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죽기 때문에? 2. 베드로가 대답을 했지만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3. 그 말을 하면 예수님도 제자들도 모두 잡혀 죽기 때문이다? 4. 그 말을 함부로 하면 떡과 고기를 얻어먹지 못하기 때문에 경계한 것이다? 5. 베드로가 떡과 고기를 안 얻어먹었으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말이 안 나올 텐데 떡과 고기를 얻어먹고 나온 말이기 때문에 경계를 시킨 것이다? 정답은 2번.
22절: 베드로가 지금 주님이 말씀하신 그 사건을 알고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고 대답을 한 거냐, 모르고 대답을 한 거냐? 모르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니까 모르고 한 그 대답이 옳더라도 영적인 깊은 뜻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사건이 오면 베드로가 도망을 가게 되는 거다. 그걸 알아야 한다. 옳은 대답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사건이 오면 과연 그 대답처럼 네가 있겠느냐? 베드로는 도망을 가 버렸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죽임까지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난다’고 했을 때에 베드로가 이 사건을 듣고 얼마나 놀랐을까?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어찌 이런 일을 당해야 되는 건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여기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곧, 예수 당신 자신을 말함인데, 이는 참 사람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참 사람이다. 신령한 참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럴 때는 ‘신령세계를 유업으로 받는’이라는 뜻이 깔린 말이다.
이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받는다? 이 참 사람이 무엇 때문에 고난을 받느냐? 누구에게 고난을 받느냐? 장로와 대제사장과 서기관 등등 이들에게 고난을 받는다. 그렇다면 왜 이들에게 고난을 받느냐? 이들이 왜 예수님에게 고난을 주느냐? 참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은 옳은 일만 하고 좋은 일만 하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셨는데 왜 그들에게 고난을 받고, 그들은 고난을 주고, 예수님은 왜 죽고 살아나느냐?
이들은 이방인들도 아니고 모세오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 지도자들인데, 성경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종들인데, 세계적으로 그 어디에도 없는 그들만이 유일한 성경 학박사들인데, 그리고 모세가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인데 왜 그리스도에게 즉, 메시아에게 고난을 주는 것일까? 성경을 잘 아는 자들인데 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죽였을까? 그들은 메시아를 보는 관이 틀렸다. 성경을 이면적으로 보는 눈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지 못하고 죽였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일반생각을 가지고 읽고, 자기 기도를 들어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표면적으로만 보고 ‘나에게도 병 고치는 능력을 달라. 예언 방언을 하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러니 사람이 안 된 사람에게, 성경도 모르는 사람에게 성령을 달라고 하면, 능력을 달라고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불 보듯 빤한 건데 주시겠느냐? 어린아이에게 면도칼을 안겨주겠느냐?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뭘 받은 것이냐?
하나님 앞에 적중성의 신앙을 가진 자라면 주님에게 만능의 능력을 달라는 기도는 안 한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그 종을 적절히 잡고 쓰시는 거다. 그런데 안 된 상태에서 순 세상 육덩이만 들어있는데 만능의 능력을 달라고 하면 주겠느냐?
또 예언 방언하는 게 만능의 능력이냐? 귀신들의 장난이다.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눈알이 또렷해지고 머리가 영리해지고 지혜지식이 충만해진다. 그게 성령 받은 거다. 그러니 이게 없는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자면 예수 믿는 무당이다. 사실은 그건 믿는 게 아니라 예수이름을 이용한 것뿐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덤벼들었듯이 이 마귀는 교인들에게도 덤벼든다. 그러니까 요행이나 바라고 능력이나 행하려 하고 세상에서 붕 뜨기를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께 했던 마귀의 세 가지 시험 속에 이런 요소가 다 들어있다.
그래서 사람 안 된 사람이 그런 영웅성 허풍성을 가지고 있을 때 ‘너는 내 졸병이다’ 하고 귀신이 들어온다. 그래서 그 사람을 귀신 마음대로 부려먹는 거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머리통이 뭐가 되겠느냐? 사람노릇이 될 줄 아느냐? 자기 속에 성격이나 성질이 일반적으로 들어있는 데다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겠느냐?
공부시간(주-김경형목사님이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교역자 대상 성경연구 및 신학공부)에 나오는 여자목사가 있는데 그 분의 교회를 다른 사람이 맡도록 하게 하려고 갔다. 그런데 그 여자목사가 처음에 몰랐을 때는 자기도 그랬지만 다른 드센 여자들이 기도를 하면서 세상 것을 달라고 ‘주여’ 하며 고함을 지르고 그러니까 여자목사는 여기서 조금 배웠다고 반말을 해 가면서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한다. 기존의 성격 성질이 들어있어서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저주가 막 들어가는 거다. 그게 말은 옳은데 마음이 옳은 마음이냐?
성경에는 교회에서 여자를 세워서 가르치도록 되어있지를 않다. 문자적으로 봐도 그렇다. 물론 그 속에는 뜻이 있는 거다. 그러니까 여자는 성경을 많이 배워서 가정목회를 하는 거다. 무슨 말이냐? 자녀들을 잘 기르는 거다. 남편은 교회의 대외외적인 그 면으로 하고. 그렇게 수종 잘 들고 순종 잘 하면 손발이 잘 맞는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서로가 일반적인 성격 성질들을 못 고쳐놓으니까 ‘너 그럴 새냐? 나도 이럴 새다’ 하고 둘 다 하나님의 종이 된 셈이 되어 대립이 되니까 서로 떨어져서 교회를 하고 있다. 어째서 그럴까? 그게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냐? 뭐가 잘못돼도 보통 잘못된 게 아니다. 이건 마귀 짓이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부부가 돈 욕심이 나서 교회를 두 군데 차려서 붕붕 뜨는 집회를 하면서 안수한답시고 돈을 긁어모으는 것도 있다. 이게 뭐가 되겠느냐? 그런 교회가 한 두 교회가 아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아는 자들인데 왜 메시아 그리스도를 죽였을까?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는 죄에서 해방을 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온전이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죄에서 해방은 모르고 로마에서 해방을 해야 되겠다는 것이다.
사람을 죄에서 해방을 시키면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해결점이 다 따라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뒤따르는 것을 앞세워서 말을 하게 되면 목적관이 달라진다. 사람을 죄에서 해방을 시키면 그 껍데기는 자동적으로 벗겨지는 거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심이 죄에 붙들려 있어서 그걸 깨달으라고 로마라고 하는 강대국을 동원시켜서 자신들을 압제하도록 한 것인데 그들은 그걸 모른 채 메시아는 로마를 둘러엎고 자신들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아니 보는 관이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
속사람을 죄에서 해방하는 것은 없고 종교적인 행사만 크게 해서 세력을 키우고자 하면 그게 되겠느냐? 유대 종교인들도 예수님도 양쪽 다 성경을 놓고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 종교인들도 성경을 놓고 해석을 하는 거지만 껍데기로 말을 하고, 예수님은 알맹이를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가 다르다. 그걸 예수님이 지적을 해주면 깨닫고 알아야 하겠는데 그러지를 않고 예수님을 죽여 버린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직책과 신분만 알지 말고 그들의 직책과 신분 속에 무엇이 강하게 뿌리가 박혀서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죽이는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성격과 성질을 못 고쳐서 믿음으로 들어가지지 못하고, 성령님의 역사는 안 되고, 자기를 못 뜯어고치고 자기 성격 성질대로 나가니 귀신들린 짓이 나오는 것이다.
장로들은 나이가 많은 유대 공회원들이다. 대제사장들은 아론지파의 계열이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요 종교교사들이다. 이들 모두가 자기 고유적인 직분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가견적인 요소들이 강해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인 그리스도성이 자기에게 찾아왔을 때 자기 스스로가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성을, 하나님의 옳음성을 죽인 셈이다.
살인은 먼저 자기 속에서 선한 자기의 마음을 죽인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된다. 이치가 그렇다. 예수 믿는 건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치를 바로 알면 오각의 오감성으로, 옳은 진리지식으로 자기의 몸을 의의 병기로 써 나가게 된다.
옳다고 하는 데는 과감성을 가져야 한다. 옳은 것도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라야지 자기 마음에 제 성격에 옳다고 하는 것은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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