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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벧전2:1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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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성 목사 |
참고 : | 말씀의 숲 교회 네이버- 말씀의 숲 교회(서울 은평) |
예수그리스도와 나
(벧전2:18-25)
오래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은 왜 예수를 믿으세요?’ 물어 보셨어요. 그래서 그때 저의 대답은 ‘자유’하려고요. ‘많은 것에 자유함을 얻으려고요’ 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자유’는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지요. 무엇인가에 얽매어 있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지요?
여러분, 우리는 자유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많은 것에 묶여 있다는 생각해 보지 않으셨는지요? 모든 것에 자유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에 자유 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도 누군가가 저에게 ‘예수를 왜 믿는가?’ 라고 물어 본다면, 본질적으로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이지만, 이 땅을 살 때 많은 것들에, 억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을 누리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 주간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자유’를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저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 자유를 원하지만, 아직도 제 자신은 무엇인가 많은 부분에 묶여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오늘 본문은 표면적으로 들어 난 내용은, 이런 거예요. 종들이 있었어요. 그 종들이 주인을 섬길 때, 종에게 있어서 두 종류의 주인이 있다는 거지요. 잘해 주는 주인이 있고, 못된 주인이 있다는 거예요.
그 두 종류의 주인이 있는데, 그들이 어떠하든, ‘두 종류의 주인을, 좋고 나쁨을 따지지 말고 잘 섬겨라!’ 라는 내용 이예요. 이것이 표면에 들어난 내용 이지요. 잘해주는 주인에게는 당연히 잘 섬기는데, 정말 못된 주인을 만나도 잘 섬겨라 라는 내용 이예요. 왜냐하면, 너희들의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고,그 섬김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내용 이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나를 잘 대해주는 사람은 당연히 잘 섬기는데, 잘 못 대해주는 사람도 당연히 잘 섬겨야 하는 이유를,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21절부터 25절까지를 설명하고 있어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도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인데,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그는 의로우신 분이신데 억울한 고난을 당 하시면서도, 그들에게 반응하지 아니하시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담당하셨다는 거지요.
‘왜 함부로 대하는 주인에게도 순종하고 잘해야 하느냐?’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것에 반응하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길을 가셨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23절에 보시면,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줘요.
같이 읽어 볼까요? (시작)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뭐하지 아니하시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뭐하지 아니하시고? 맞대어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를 심판하시는 누구에게? 하나님께 부탁하셨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이인, 하나님께 심판을 부탁하셨기에 나는 어떤 상황과 환경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것에 대해 ‘자유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좋고 나쁨에 반응하지 말고, 우리의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안에는, 만약 그 주인에게 반응하는 순간 ‘너는 자유함을 잃어 버린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지요. 좀 더 쉽게 설명해 볼까요? 여러분, 고난이 오지요. 그런데 그 고난에 그대로 노출되어 내가 반응한다면, 우리는 그 고난이라는 것에 자유한 사람이 아니라, 고난에 대해 묶인 사람이 된다는 거지요.
좀 더 리얼하게 말씀드려 볼까요? 돈이 없으면 갑자기 슬퍼지고, 돈이 없으면 짜증나고, 돈이 없으면 낙심하지요. 반대로 돈이 있으면 기뻐하고, 돈이 좀 생기면 행복해요. 뭐예요? 돈에 반응하는 거예요. 돈이 있고 없고 그런 것에 상관없이, 내가 주를 위하여 더 만족한다면, 나는 좀 더 돈에 대해서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돈에 내가 반응하는 거지요. 그 반응하는 순간 나는 자유인이 아니라, 돈에 묶여 있는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돈이 있으면 감사하고, 돈이 없어도 감사하고!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내 안에서 ‘있고 없고’ 에 상관없이, 감사가 넘쳐 난다면, 이것이 예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는 사람이 된다는 거지요.
건강이 좋아지면, 할렐루야 콧노래를 부르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하고요. 그런데 건강이 안 좋아지면,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주시는 구나. 금세 시무룩하고, 꼭 내일 죽을 사람처럼 행동하지요. 그 건강에 내가 반응하는 순간! 나는 자유하지 못하고 건강에 매어 있게 되는 거지요.
자녀들도 그렇지요. 자녀가 잘 되면 기분이 업 되고, 행복하지요.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찾아오면 기분이 다운되거나 낙심천만하고 큰일 날것처럼 반응하지요. 그러니까 그것에 반응하는 순간,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이 주신 자녀에 대해서, 많이 자유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갑자기 저의 아들이 아팠어요. 어제 말고 지지난주 119를 타고토요일 입원해서 월요일 퇴원을 했는데도, 머리가 너무 아프고, 쓰러질 것 같고,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해서, 다시 밤에 응급실로 갔어요. 병원 주차장에 내렸는데, 걸을 수 없어서, 등에 업고 응급실로 뛰었지요.
뛰면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머리가 아프다는데, 혹시 뇌에 종양이나, 문제가 있는거 아니에요?’ 젊은 나이에 이런 것 걸리면, 쉽게 죽는다고 하는데 너무 젊잖아요. 이 녀석 장가도 안 갔는데, 살려 주세요. 머리에 이상 없게 해 주세요.
그런 마음으로 응급실로 들어갔어요. 밤을 새워 새벽 4시쯤 되어 원인이 나왔어요. 머리가 아니라, 귀에 이상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귀만 잘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고 하는 진단을 받았어요.
저는 병원 응급실에서 꼬박 밤을 새면서, 가만히 보니까 밤새도록 하나님을 묵상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묵상했어요. 물론 기도도 했지만, 새벽에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나서고 집으로 올 때, 차 안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을 생각한 것 보다, 자식을 더 많이, 그것도 밤새도록 묵상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런 생각해 보았어요. ‘만약 하나님이 아들을 데려가시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어요. 그랬더니 쉽지 않았어요. 제가 밤을 새워 자식을 묵상한 것 보니까! 저는 아직 자녀에게 많이 묶여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데려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요. 살리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하나님께 모든 것 맞기겠습니다! 라는 기도는 않나오던데요. 그저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는 기도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직도 자녀에게 많이 자유하지 못한, 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지요.
여러분, 어떤 관계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때 좋게 반응하고,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서 나쁘게 대할 때, 나쁘게 반응 하는 것, 그것은 자유인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나에게 잘하고, 특별히 못하는 것에 내가 크게 반응하면 할수록, 나는 그것에 얶매어 있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를 보면 그런 것에 반응하거든요. 그런 것에도 반응하지 아니하고, 내 길을 가야 하는데, 아직 저는 그것이 안 되는 것을 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아직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나한테 잘하는 사람에게 잘 해주고, 못한 사람에게도 잘해 주고, 그것이 잘 되시는지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은혜가 나를 이끄시는 거예요.(아멘) 그 성령의 이끄심은 어떤 고난도, 어떤 어려움도, 어떤 아픔에도, 그것에 요동하지 아니하고, 자유하게 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 여전히 무엇인가에 매어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거지요. ‘자유’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인데, 우리는 지금도 무엇인가에 자신을 얽매어 놓고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안정감 있고, 흔들릴 수 없는 ‘자유함’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에 묶여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종 된 우리를 죄에서 사셔서,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는 예수로 인하여 모든 것에 자유 할 수 있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거지요.
우리가 죽을 것 같으면 죽겠다고 너무 반응하고, 너무 힘들면 힘들다고 너무 반응하고, 고난가운데 있을 그 고난 때문에 못살겠다고 너무 반응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요.
어떤 고난이 와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시고,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에, 그 고난 앞에서 묵묵히 믿음으로 서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와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문제와 어려움 가운데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나는 요동치 않겠다! 믿음으로 선포하고 묵묵히 버티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자유인이 되어가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우리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시작) 우리가 어떻게 되었다구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우리가 어떻게 되었다구요? 돌아왔다. 죄로 매어있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돌아왔다는 거예요. 죄의 종이 되었는데, 이제는 죄에서 해방된 자유인이 되었다고 선언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아무리 자유인이 되었어도, 우리의 환경은 바뀌지 않을 수 있어요. 그대로 일 수 있어요. 그 당시 베드로 전서를 읽는 사람들도 여전히 핍박이 올 수 있어요. 환경은 변함없이 그대로 일 수 있어요. 오늘날 코로나가 여전히 우리 앞에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베드로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너희들은 그런 상황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이 핏 값으로 너희를 사셨기 때문에 자유인이 되었다. 어떤 상황에도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억매여서 묶여있지 말아라.
어떤 상황과 환경에, 너희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붙들고 살아가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거라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티브 광고를 보니까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 그 옆에서 무거운 볼링공을 침대 위에 떨어트리는 거예요. 그래도 흔들림 없이 잠을 잘 자는 모습의 광고를 본적이 있어요.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흔들림이 적어진다는 것이고, 담대해 진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고 죄로 묶여있던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담대하고, 당당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 후로는 내가 끝까지 지켜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환경에 매여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만 바라보고 진정한 신앙이 되어가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세상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인생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매어 있지만,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자유함’ 을 주신다는 것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나를 연결시켜보는 것이지요. 사순절은 예수님 그리고 나를 다시 연결하여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예수가 죽고, 내가 살아나는 것은 이 자유함의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 예수님이 주신 그 자유함의 은혜를 얼마나 누릴 수 있는가? 를 물어 보시는 거예요.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취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저를 살려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에 ,어떤 것에도 억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라는 고백이,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 안에, 더 많이 고백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사순절에 그것을 배우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그 자취를 따라가면서, 나는 자유해! 나는 자유해! 를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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