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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308 추천 수 0 2021.03.10 10: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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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9:27-30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927-30: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이 누구일까? 기본구원을 얻은 자들은 죽어서 다 천국에 들어가서 볼 것이고, 이룰구원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본문에 여기 섰는 사람 중에했으니 예수님께서 당시의 제자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지만 우리에게도 주시는 계시로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는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해서 먼저 죽을 사람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첫째는 인류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전체 성도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고 했으니까 예수 믿는다고 해서 다 보는 게 아니라는 말이 된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을 말함인데, 제자들 중에도 볼 자들이 있고 못 볼 자들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자들은 이 중에 즉, 제자들 중에,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자들 중에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하는데 예수님의 뜻대로 그 의사대로 따르는 자들이 있고, 자기 주관성대로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나 오늘이나 미래적으로나 그게 문제다. 따른다고 하면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게 따르는 건데 그게 아닌 자기의 주관성 주장성 소원 목적을 가지고 따르는 자는 따르는 게 아니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그건 따르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는 자들은 주님의 의중을 많이 알 것이고, 따르긴 따라도 자기주장 주관대로 믿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예수님의 뜻이 없다. 학교에서 공부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선생님 속에 든 실력이 배우는 그 학생에게 들어가지만 공부시간에 딴 짓을 하면 무슨 공부가 되겠느냐? 그런 것처럼 따라다니는 자들은 예수님의 뜻대로 따라다니는 자들이 있고, 자기 뜻대로 따라다니는 자들이 있다.

 

다 자기 성격과 성질대로 믿는 거겠지만 예수님 당신이 보셨을 때 어떤 제자들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인데, 누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죽기 전에? 제자 자기가 죽기 전에. 그런데 이걸 잘못 깨달아서 교인들이 눈을 감고 뭘 보는 것으로 안다. 앞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그런 말씀도 있고, 또 그 앞에는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라는 말씀도 있는데 이런 건 다 집어치우고 자기 욕심대로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식으로 하니 마귀가 귀신들린 짓을 보여준다.

 

이런 자들이 신앙이 바로 된 것을 보기 힘들다. 자기 스스로 옳은 정신이 반듯하게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귀신이 들려있으니 멍할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마음에 정착이 없고 신앙의 정착도 없다. 막 돼 먹었다. 귀신이 들려놓으면 자기 성질대로 소리를 지르고 한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적마다 토한다고 한다. 그게 무슨 짓이냐? 여기 있는 분들도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면 좋겠다.

 

어떤 제자들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누가 볼 때에? 주님이 보실 때에. 인간 너희들이 보는 게 아니라 주님이 보실 때에. 높은 차원인 그 분이 보실 때에 , 저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겠구나하는 게 있는 거다. 목사를 신격화 시킬 수는 없으나 목사도 진리본질의 실력을 가지면 이게 나온다. 점수는 실력자가 매긴다. 학교에서 시험점수는 공부 못하는 자기가 매기는 게 아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세계에서 제 멋대로들 한다. 오늘날 교회가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 중에도 배우고 깨닫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볼 자가 있고 못 볼 자가 있다는 말은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사람이 다 된 것이냐? 어떤 분은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육신적으로 성격 성질이 죽는 사람이 있다. 마음이 너그럽고 부드러워지는 사람이 있고, 어떤 분은 나이가 들수록 꼬장꼬장해지면서 더 심해지는 사람이 있다. 이건 나쁘게 말하면 빨리 죽으려고 하는구나그런 게 있다. 그거는 오래 살수록 욕을 얻어먹으며 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이 풍족해지면서 그러나 신앙 면에서는 꼿꼿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물렁 죽사발이다.

 

주님을 교훈적으로 본질적으로 바로 알고 그 교훈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된다. 본질적으로 알게 된다. 주님의 본질은 하나님의 본질과 같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러나 거짓 종들을 따르는 자들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해당이 안 된다. 예언 방언하고 입신하고 하는 건 아니다. 절대로 그런 말에 현혹되지 말아라. 그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은 말씀의 이치에서 밝게 이치적으로 보는 거다. 테레비처럼 보는 게 아니다. 쉽게 말하면 사상이 정신이 마음이 영화처럼 움직인다. 무슨 모양 형상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움직이는 게 어디로 움직이는지가 보인다. 그러나 거짓 종들을 따르는 자들은 이걸 못 본다. 볼 수도 없거니와 보여주지도 않는다.

 

사단 마귀나 거짓 종들은 주여 주여하며 자기들의 소원대로 들어달라고 한다. 이들의 소원 목적은 종교적인 세상이니, 종교적인 업적을 많이 이뤄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한다. 성경은 진리본질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 우리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걸 묘하게 피해간다. 이게 마귀의 수법이다. 알면서 피한다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보니 그렇더라.

 

어떤 제자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가능성이 많을까? 어떤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속에서도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고 당당히 주장하고 나타내는 자이다. 진리본질의 신앙을 가진 자는 그렇다. 그 앞에 볼 수 있는 그 이유들을 다 써 놨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그런 정신으로 사는 자들이 많지 않다.

 

28: ‘너희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지가 8일쯤 되었는데 제자들 중에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 주 설교내용이 뭐였느냐? 일주일 전에 자기가 어디에서 누구를 붙잡고 말한 것이 기억이 나느냐? 그런데 돈 받을 게 있으면 그거는 안 잊어버리려고 달력에 표시를 해 놓느냐? 여행 가는 날도 표시를 해 놓느냐? 그런데 전화요금이나 전기요금이나 관리비 내는 건 잘 까먹고 있다가 이자까지 붙여서 내느냐?

 

그런데 본문을 보면 세 제자는 기억을 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하는 게 너 너 너 나와 같이 가자한 것이냐? 아니면 그게 아니라 이 세 제자는 예수님이 몸만 움직였다 하면 곧 따라붙으니까 세 제자를 데리시고그 말인지? 아니면 이 세 제자마저 아홉 제자들처럼 팔일쯤하는 그 생각도 없었는데 주님께서 너희 세 사람만 나를 따라가자한 것이냐?

 

만일 세 제자도 남겨진 아홉 제자들과 같은 차원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세 제자만을 뽑아서 가자고 한 것이라면 아홉 제자가 항의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차원이라면 이룰구원 차원에서 문제가 또 달라진다. 그런데 세 제자의 머릿속에는 예수님께서 팔일 전에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야 이룰구원 차원에서 행한 대로하는 이것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정확해진다.

 

만일 세 제자도 아홉 제자들과 같은 차원에 있었는데도 주님께서 너 너 너하고 세 제자만을 부른 것이라면 해석이 또 달라지는데,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니 평소에 어떻게 살았구나하는 게 나온다. ‘평소 누구를 가까이 하고 살았구나이게 나온다. ‘주님의 기억에 남아 있었구나. 주님이 생각을 하고 계셨구나이게 들어간다.

 

세 제자는 자기들 나름대로 주님의 말씀을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걸 잘 본다. 그러니까 무슨 마음이냐? ‘내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걸 봐야지하는 게 항상 들어 있었다. 그건 예수님을 떠나서는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몸만 움직여도 제자 세 사람은 온 몸이 눈이 된다. 전 신경 전 인격이 그리로 쏠린다.

 

스승목사님이 하는 집회는 언제 한다는 걸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 집회 정보를 스스로 얻어서 어디로 가시나하고 알아서 따라 붙어야 했다. 그러는 것을 보고 스승목사님은 당신의 마음에 생각을 하는 거다. 그래서 어떤 제자에게는 말하자면 발로 차봤다가 끌어 당겨봤다가 하신다. 그걸 보는 내 생각에도 , 그렇게 하시는구나하고 내 느낌의 눈으로 보여졌다. 내가 보기에는 , 정말 잘 하신다.’ 어느 인도자가 제자들을 기르는데 그렇게 기를까? 대부분 보면 돈 많고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올려주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 제자의 마음을 모르실까? 아신다. 우리들의 마음도 아신다. 그러면 나머지 아홉 제자들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이 아홉 제자들은 어떤 마음을 가졌기에 남겨졌을까? 1.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산으로 기도하러 가자고 했는데 다리도 아프고 귀찮아서 안 갔다? 2. 아홉 제자는 세 친구와 친하지 않고 항상 떨어져 있었다? 3. 아홉 제자는 예수님이 없는 틈에 귀신을 쫓아내려고 일부러 안 따라갔다? 꼭 그렇다기보다 어느 것이 가장 가능성이 있겠느냐?

 

그런데 우리가 만일 아홉 제자들에게 너 예수님이 없는 틈에 귀신을 쫓아내려고 안 갔지?’ 그렇게 묻는다면 절대로 그렇다고 하지를 않는다. 변명이 또 붙게 된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시고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다. 그런데 교인들이 기도하려면 보통 어디로 가느냐? 기도원으로. 어디서 기도하는 게 제일 담력이 필요할까? 공동묘지? 기도하러 어디로 가든지 문제는 뭐라고 기도하느냐이다. ‘내 세상살이 부자 되게 만들어 주십시오. 병 고치는 능력 주십시오. 예배당 크게 짓게 해 주십시오. 교인 많이 보내주십시오. 도시 전체를 나에게 주십시오. 하나님께 영광 돌릴만한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 천국과 지옥을 미리 보여주시면 확실하게 전하겠습니다이런 이것저것 달라고 하기 보다 제일 좋은 기도는 뭘까? ‘내 마음 아시지요?’ 문제는 어떤 쪽으로 기울어져 그 말을 하느냐이다.

 

기도가 뭐냐? 흔히들 하는 말이 기도는 호흡이라? ? 기도는 대화라? 그런데 기도할 때 왜 소리를 크게 지르는 거냐? 자기 혼자 기도할 때 말로 하는 기도는 말문을 여는 것이냐? 기도가 우는 거냐? 왜 우느냐? 스트레스 풀려고 기도하는 것이냐? 기도는 보고하는 것? 묻고 답하는 것? 하나님을 잠 깨우는 것? 기도가 뭐냐? 본문을 보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인도대로 올라가는 것이다.

 

29-30: 길과 진리와 생명의 이치를 따라 한참 올라가니, 이치를 깨달으면서 한참 올라가니 시간을 초월해서 선지자들과 주님을 한 자리에서 만나보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을 했다. 바로 이것이 기도이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자기가 이치적으로 깊이 들어가다 보면 선지자들의 대화 속에서 인격과 사상과 정신이 슥 나온다. 예를 들면 다윗이 예수님과 똑같은 사건은 겪지를 않았지만 다윗은 다윗 나름대로 사건을 만나서 기도를 하는 건데 예수님께서 다윗과 똑같은 기도를 하는 걸 볼 수 있다. 거기에서 , 바로 이 사상이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단일성의 신앙 사상이로구나하는 게 발견이 된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건은 다르지만 똑같은 말도 있다.

 

그런데 산기도를 많이 한 분들 중에는 한참 기도하고 있으면 자기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게 되니 용어적으로 말을 하면 무아지경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면 자기가 붕 떠서 가는 것 같다고 한다. 남이 볼 때도 붕 떠서 가는 게 아니라 자기가 기도하면서 그런 지경에 빠져서 자기 정신과 마음이 붕 뜨는 체험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성령이 붕 뜨게 한 것이냐?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당신이 하신 말씀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신다. 이게 성령님의 역사다. 자꾸 신체적 변화에서 정답을 얻으려고 하지를 말아라. 그건 속는 거고, 자칫하다가 그런 수를 쓰는 단수가 높은 사람에게 걸리면 어찌 되겠느냐?

 

교인들이 대부분 질적인 면에서 기도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무엇을 구하든지 기도의 횟수를 많이 하려고 한다. 횟수를 정하지 말고 무시무종으로 하라. 천일기도를 하며 교인들이 매일 헌금을 가져오면 엄청나게 많을 거다. 그렇게 해서 차 사고 교회 예배당을 지으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냐? 목적이 그렇게 가 있는 이방 종교인들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교회에 너무 많다.

 

예수님이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신 것인데, 예수님의 기도내용이 나왔느냐? 말로 한 내용은 없으나 기도의 내용이 이미 그 장면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산 위에서 세 제자에게 보여주신 그 장면이 기도의 내용으로 나온 거다. 이 세 제자는 이런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본 것이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랑 모세도 만나고 엘리야도 만나고 해서 주님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그러면 이분들이 그 전에는 예수님을 안 만났다는 말이냐? 그게 아니다. 누가 엘리야에게 그 일을 시킨 것이냐? 누가 모세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냐? 주님이시다. 그러니 그 전에도 주님께서 무형의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그 분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도 만나니 곧바로 대화가 되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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