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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9:2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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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9장 29절-33절: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29절-32절: 산으로 올라간 제자들이 왜 졸았을까? 주일날 예배 때 왜 조느냐? 밤에 잠 안을 자면 졸 거고, 또 사람이 힘든 일을 많이 하고 피로가 안 풀리면 존다. 또 영양섭취가 잘 안 돼 있으면 존다. 영적인 면에서 말씀을 못 먹거나 하면 신앙 면에서 졸음이 온다. 눈을 뜨고 있어도 신앙 면에 졸음이 온다는 것은 분별을 못하는 상태다. 식곤증은 위에서 부담이 오는 것이다. 그러면 평소에 영양 면에서나 육신을 다스리는 면에서 잘못 다스렸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다고 해서 밥 먹고 졸음이 온다고 드러누우면 더 큰 일이 생긴다. 그걸 이겨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왜 제자들이 졸았을까?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오느라고 육신이 피곤해서 졸았을까, 세상을 소원 목적해서 따라다니느라고 곤해서 졸았을까? 어느 쪽이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라다니다 보면 육신이 곤해서 졸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영적인 면에서 충만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하늘의 영광을 보려고 주님으로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떨어질까봐 애써서 따라온 그 심정 그 피곤함, 우리가 이것을 무시하고 그들이 믿음이 없다고 하면 안 된다. 육신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거다. 그런 상태를 믿음 없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아무리 곤하여도 영광의 장면을 보니 잠이 싹 달아났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광 속에 두 사람이 함께 선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 주님을 보니 제자들이 여태까지 늘 보아오던 그 주님이 아니시더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외식자들이, 독사의 자식들이, 마귀의 자식들이 말하는 그 예수가 아니구나. 유대백성 전체가 알고 있는 그 예수가 아니로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거의가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봐야 되겠다. 다른 교인들이, 다른 목사님들이 보지 못하는 그 장면 그 예수를 봐야 한다. 오늘날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그 주님이 아니더라. 그 신앙차원으로 알고 있는 그 주님이 아니더라.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가 됐다는 것은 평소에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주님이 아니라는 것을 그 영광스런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본질의 실상적 인격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변화된 산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중에 나타나서 말씀하신 것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거룩한 역사 곧, 성역이다. 거룩한 역사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다. 신앙의 원리가 그렇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 앞에 제사할 때는 무엇이 있는 곳에 가서 드렸느냐? 예루살렘하고도 성전에서 드렸다. 그 성전은 하나님의 설계로 된 그 지음, 그리고 그 안에 제일 중심 되는 법궤가 있어야 한다.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루살렘이고 성전이라고 해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거룩한 역사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북조 이스라엘이 남조유다로 와서 성전이 있는 곳에서 예배를 했다. 그런데 북조의 여로보암 왕은 북조의 사람들이(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러 자꾸 유다 쪽으로 내려가니까 ‘이거 안 되겠다’ 해서 수를 쓴 것이 북조의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이다. 금송아지라는 이 말이 정신적 사상적으로 함유된 것은 ‘금’ 하면 물질이요, ‘송아지’ 하면 부지런히 열심이 충성봉사, 희생제물이다. 이게 좋은 뜻으로 들어가면 좋은데, 남조유다 성전 안에서 그렇게 된다면 좋은데 그런데 북조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성전 안이 아닌 성전 밖이다.
그래서 교회란다면 반드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이치가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제시해주신 기준이 있어야 되고 터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목사님들의 설교가 그렇게 질이 들어가 있어야 그 다음에 성도들의 속에서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는 법이다. 성역이 일어나는 거다.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란 예언 방언하고 펄펄 뛰는 게 아니라, 그 중심이 아니라 진리이치를 깨달아서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 인격적으로 속사람으로 들어가서 성장이 되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라면 많은 종들의 설교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교회의 흐름을 판단해야 하고 시대의 흐름을 판단해야 한다. 이런 신앙 자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거고, 그 삶 자체가 성령님의 사람이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 가는 것이 하나님의 번제단에 놓여지는 번제물의 신앙사상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하나님 앞에 놓여지는 번제물인데, 성경대로 보면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놓여지는 것은 흠과 티가 없어야 한다. 현재 ‘허물투성이이고 죄 투성이인 이것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하는 이걸 번제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번제가 아니다. 흠과 티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드려지지를 않는다. 우리 성도들의 번제물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흠이 있는 걸 전부 고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히 만들어지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걸 받으시는 거다.
그런데 소위 사명자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의 속은 전혀 못 보고, 신앙의 질적 성격 성분적인 면은 못 보고 그냥 무조건 목숨을 내대면 이게 번제물인 줄 안다. 그건 네 신념적 신앙이다. 너에게서 나온 하나의 종교적 사명적 의미이다. 우리는 종교적 사명이 아니라 신앙적 사명이다. 그래서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는 그 면으로 목숨을 거는 것이고, 그 일에 수종드는 것이다. 이게 바로 된 것이다.
그런데 소위 사명자들은 이게 아니라 자기 속에서 주격이 돼서 ‘내가 이 길을 가겠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이건 착각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가고자 할 때 성령님께서 돕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그 뜻에 적중성으로 걸어가니, 그렇게 살려고 하니 성령님께서 하나님께서 다각적인 면으로 도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될 사람은 속사람이 자꾸 만들어져 가야 한다. 그래야 성령님께서 잡고 역사를 하신다. 그런데 속사람은 하나도 안 된 채 안수 받고 나서 ‘나는 이제 하나님의 종이다’ 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걸로 알고 있다. 그건 네 수단 방법대로 밥 먹고 사는 거다. 이렇게 되면 교회 한답시고 인간의 수단 방법 다 나온다.
모세가 광야에서 불과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갔다. 홍해를 건너기 전에도 하나님의 인도하는 대로 가는 거다. 그런데 모세의 지식으로 보면 그 홍해 쪽으로 가면 안 된다. 블레셋 길로 가면 가나안까지 얼마든지 한 달음으로 갈 수가 있는 거다. 단순히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만이라면 한 달이면 충분하게 들어갈 수가 있다. 그러나 들어가는 건 나중 문제이고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들어갈 수 있는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지자는 것이다. 속사람이 만들어지자는 것이다.
안 만들어진 것은 광야에서 다 죽었다. 광야생활 중에 태어난 자녀들은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계시적으로 보면 속사람이 되어서 자란 것은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치가 그렇게 들어가 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애굽성이 들어있어서 그 껍데기는 광야에서 죽고, 그리고 만들어진 속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게 계시다.
우리도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옛사람은 죽어야 한다. 옛사람의 속성은 광야에서 죽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죽어야 한다. 그리고 새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된 것은 약속의 땅 신령천국으로 들어가는 거다. 이런 예수 믿는 이치를 모르면 밥 먹고 하루하루 살게 된다.
그러면 그냥 하루하루 무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보호대로 사는 거냐? 이건 일반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체험하면서 가는 것이다. 즉 깨닫는 체험, 사건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가는 거다. 우리는 이걸 보고 가야 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걸 다 보여줬다.
번제물이 되는 신앙사상을 바로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죽었다고 해도 개죽음이다. 하나님께서 개죽음의 신앙을 알게 해 주시려고 이방 세상에 복날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돼지 잡는 날도 있다. 돼지 잡는 날은 잔칫날이다. 사람 잡는 날도 있다. 사람을 잡아서 새의 먹이로 주려고. 하나님께서 다 역사하고 키우시는 면을 보면 누가 새의 먹이가 되려고 밥 먹고 자라고 있을까? 새의 먹이로 사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만 아시는 거지만 전쟁이 났다 하면 비행기라고 하는 새에게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살면서도 결과가 거기에 놓여지는 삶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계:를 봐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자기를 표면으로 보듯이 역시 자기의 신앙차원이 그런 일반적인가? 하나님만 아시고 나도 알고 남이 전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기의 참 실상이 있느냐? 남이 자기를 보는 것처럼 그냥 그런 것인가?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하나님만 아시는 하나님의 실상으로 자란 그게 자기 속에 있느냐? 하나님의 온전으로 주님처럼 닮아간 게 있느냐?
헛물을 켜듯이 만족도 없는 세상의 맛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발버둥 치다가 세월만 허비하고 저주의 어두운 시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자인지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신령한 눈이 열려서 그 두 사람만이 아니라 나도 그 영광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느냐? 그 용기 그 결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느냐?
영광중에 나타난 이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라고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모두 이겨 나온 분들이 아니었더냐? 그리고 지금 나는 예수 진리 따라오느라고 피곤한 건지, 아니면 세상 영광을 따라다니느라고 피곤한 건지? 졸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졸음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는 졸음도 있다.
33절: 하나님의 영광중에 나타난 두 사람이 보는 이 장면을 우리도 제 삼자 입장에서 보고 있는데, 그러면 그 장면을 우리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게 환영이냐? 환상이냐? 실상이냐? 실상이다. 환상이 아니고 환영이 아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면 질적으로 그 장면 그대로 돼 있을까? 질적으로 그렇다. 하늘나라에 올라가면 즉시 흰옷을 안 입고 있느냐?
두 사람이 떠날 때 베드로가 무슨 말을 했느냐?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읍시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지읍시다’ 했다. 왜 이 소리를 했을까? 좋아서 한 것이냐, 나빠서 한 것이냐? 좋아서 한 말이다. 그 장면을 놓기 싫어서, 그 장면을 항상 보는 그 속에서 살고 싶어서 그런 소리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분들이 바람 불면 찢어지고 불나면 타버리고 낡고 퇴색되는 그 장막 속에서 살 분들이냐? 이 분들은 어디에 계시는 분들이냐? 신령천국에 계시는 분들이다. 예수님은 인간 보기에 가난하고 초라하게 보여도 신령계와 물질계를 다 지은 분이요, 만능의 능력자요, 신령계와 물질계가 다 예수님 당신께 순종을 한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을 백성을 위하여 성역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다.
인간 모세는 히브리인으로서 애굽의 왕자로 살 수 있었지만 보다 더 좋은 미래의 큰 영광을 위해 당신의 백성과 같이 고난 받기를 각오하고 고난을 선택한 분이다. 엘리야 역시 악한 이세벨에 빠져 있는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에 목숨을 다하였고 불말을 타고 승천을 했다.
오늘날 거짓 종들이 많은 이때에 어느 누가 주님의 백성을 자기의 동족으로 삼고 미래의 큰 영광을 위하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복음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살겠느냐? 거짓 종들이 많은 이때에, 교인들을 팔아먹는 이때에.
예배당을 팔면서 ‘교인들이 몇 명이 모입니다. 다 넘겨주고 가겠습니다. 얼마만 지불하십시오’ 하면 건물은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 예배당을 사려는 목사님이 은근히 그 교회의 교인들의 숫자를 생각하고 그 예배당을 사지만 그 교회 교인들은 발이 달려있으니까 예배당을 판 목사님과 같이 다 가버린다. 그런 사기꾼들이 참 많다.
그것만 있느냐? 교인들이 항상 교회에 모이기는 하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면서 교인들을 세상 넓은 길로 인도하는 것도 교인들을 세상에 팔아먹는 거다. 교회에서 세상을 외치면 세상물질이 많이 들어온다. ‘예수 믿으면 부자로 살고 축복 받는다’ 하면 헌금이 더 많이 나온다. 이건 교인을 세상에 팔아먹는 것이다. 마귀에게 팔아먹는 거다. 이건 마귀에게 절하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에게 세상의 평안과 축복을 달라고 하지,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연장하려고 살지, 예수이름을 이용하여 자기 볼 장 챙기려고 예수님을 믿지 변화된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는 그 이유를 그 때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영광중에 나타난 그들의 영광은 고난에서 성역으로 만들어진 영광이요, 없어지지 않는 영광이다. 백성들을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주님께 밀착시킨 영광이다. 사람을 하나님을 깨닫도록 한 영광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서 이뤄진 영광이다. 이 영광은 인간 자기의 주관성대로 종교적 사업을 일을 크게 이뤘다는 그 영광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읍시다’ 했지만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가 모른다고 했다. 성경을 보다가 보면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많이 있다. 성경에 ‘저들이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주님의 말씀도 있다. 우리가 듣기에는 이런 말들이 참 이상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분의 의중을 모르면 오해하기 쉽다.
‘초막 셋을 지읍시다’ 하는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가 모른다? 어린아이들이 말하는 걸 어른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저 녀석이 저렇게 말을 해도 그 다음이 뭐가 온다는 것을 모르고 저 말을 하는구나’ 하는 게 있다. ‘네가 그렇게 하면 반드시 어떻게 될 터인데 네가 그걸 모르는구나’ 그런 게 있다. 어른은 그걸 알지만 모르는 아이는 나중에 피해가 막심해진다.
‘초막 셋을 지읍시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가 알지 목하더라’ 한 이것이, 1. 베드로가 한 말을 야고보와 요한이 듣고 ‘베드로 형님, 지금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베드로가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런 식이냐?
2.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것 같기도 한데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야고보와 요한아,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 못 들었느냐’ 그건가? 그러니까 베드로가 생각할 때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지를 못해서 ‘야고보와 요한아,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하니까 ‘아따 형님, 초막 셋을 짓자고 안 했습니까?’ 하니까 ‘내가 그 말을 했나? 전혀 생각이 안 나는데’ 그 말이냐?
3. ‘베드로 형님, 무슨 말을 한 지 아십니까?’ “그래, 안다. ‘내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라고 너무 좋아서 내가 분명히 그 말을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한 그 말 자체를 ‘안다. 모른다’ 그걸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말을 한 의미가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안 벌어질지?’ 그게 들어있는 말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가 알지 못하더라’ 라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 그건 첫째, 원인도 모르고 결과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단순히 눈앞에 나타난 신비롭고 황홀한 장면만 보고 한 말이다.
두 번째는 두 분들이 영광중에 나타나서 주님의 고난을 말하고 있는데, 이 세 분이 베드로가 한 말에 동의를 할 사람들이냐? 안 할 분들이다. 이게 사건은 그 때 사건이지만 오늘날도 졸다가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베드로처럼 그런 장면만 보려고 애쓴 신앙자들이었느냐? 이게 누구를 염두에 두고 누구를 말하는 거냐? 이 장면에 나타난 인물들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다. 이 분들이 그런 분들이냐? 그렇지 않다.
세 번째는 베드로는 영광중에 나타난 그 분들의 신앙정신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네 번째는 베드로 자기가 한 말이 ‘미래적으로 졸던 교인들이 자신의 이 소리를 듣고 기도원을 지어서 신비로운 장면을 자꾸 보려고 하겠구나’ 하는 그 일이 벌어질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해 놓으면 들은 사람이 얼마 안 가서 어떤 식으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겠구나’ 하는 걸 생각을 하며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할 때 ‘보았네. 들었네. 꾸었네’를 자꾸 말을 하면 교인들이 그 소리를 듣고 기도원으로 가게 된다. 그걸 알아야 한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베드로가 정신없이 한 말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가서 미래의 교인들에게 어떤 열매가 맺히겠구나’ 하는 이걸 모르고 한 말이니, 그 결과를 모르고 하는 말은 정신없이 하는 말이다. 그걸 알아라. 말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다. ‘미래적으로 어떤 열매가 맺히겠구나’ 하는 걸 알고 교훈을 하든지 말든지 해야 된다.
교인들 속에 자기가 힘쓴 대로 열매가 맺히겠지만 주는 사람이 옳은 진리, 생명의 이치를 줘야 교인들 속에 성령의 열매가 열린 텐데 그게 아닌 세상 열매가 맺히게 하면 가르치는 자가 큰 책임이 있다. 맷돌을 목에 매달아서 물에 빠져 죽으라는 것은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앞뒤의 말이 죄다 틀린다. 그냥 들으면 그냥 말이지만 그러나 영의 귀로 들어보면 그 말끝에 어떤 결과가 되는지를 모르고 하는 말이로구나. 이건 정신없는 말이다. 교회 안에서 목사님들의 말도 분명해야 한다. ‘이 말끝에 교인들의 정신이 어디로 방향을 틀겠구나’ 이런 것을 걱정을 하고 염려를 해야 한다.
베드로가 정신없이 한 말을 오늘날 교인들이 참말로 알아듣고 기도원이라는 초막들을 지어놓고 그런 장면을 보여 달라고 귀신이 들려서 악을 쓰고 있더라. 그러니까 ‘내가 한 말이 이렇게 이렇게 세월이 흘러서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몰랐다.
지금 예수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이 자기의 정신에서 나온 그 말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나온 말인지,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고 말을 하고 있다. 이건 정신없는 말이다. 본인들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른다. 오늘날 세상을 구하고 따라가는 거짓된 교인들은 자기들이 가르치고 구하는 것이 무엇이 근거이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무저갱을 계:의 무저갱만 생각하지 말아라. 네 입에서 나오는 기도소리나 찬송소리나 설교소리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없으면 그것은 바탕이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 바탕이 없으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지를 못하니 하나님 앞에 서지를 못하게 하는 이것은 무저갱에서 나온 말이다. 이렇게 되면 헛 살고 헛 믿게 된다.
결과가 불에 타질 것을 자꾸 말하면, 세상을 자꾸 말하면 그건 신앙의 근거는 없는 것이다. 불에 타지고 없어질 것이니 결국 허망해진다. 그 사상은 공중에 붕 뜬 것이다. 공중에 붕 떠 있으니 바람이 부는 대로 날려 다니는 거다. 이치를 알아야 한다. 참 신실한 종들은 자기가 하는 말의 근원과 결과를 의식을 한다. 모두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의식하고 그 결과를 바라보고 말을 한다.
당장 눈앞의 그것만 의식하면 안 된다. 베드로가 신비스럽고 황홀한 그 장면은 보았으나 그 장면 속에 나타난 신앙 사상화 되어야 할 그 뜻은 알지 못하는 소리로 지껄였으니 그 장면은 사라지더라. 그리고 무엇이 제자들을 덮어버렸느냐? 가렸느냐? 보는 것을 가렸다는 것은 보여주기 싫다는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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