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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04 추천 수 0 2021.05.12 09: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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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9:56-61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956-61: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56-58: 다른 촌으로 가신다 함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길을 가신다는 뜻이다. 당신의 뜻은 우리의 구원이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길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을 가신다. 당신 스스로 결정을 해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신다 함은 첫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님은 기다림은 없다는 말이다. 두 번째는 불렀을 때는 얼른 따라오라는 것이고. 왜 부르는 거냐? ‘거기 섰거라하고 부르는 게 아니라 불렀을 때는 얼른 따라오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해는 기다림이 없다. 그러니까 해가 떴을 동안에 부지런히 자타의 구원의 일을 하라는 것이고, 네 번째는 세월은 정지 없이 흘러가는 것이니 네가 영원히 효력이 있는 기회를 포착하라는 것이다. 사건 환경이 시간 속에서 너의 구원을 위해 흘러가는 중이니 네가 기회를 포착하라.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며 불렀을 때는 얼른 따라가야 하고, 자기가 그 기회를 포착을 해야 한다. 이룰구원 차원에서 그런 것이다.

 

길을 가실 때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했는데 그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제자들이랑 무리들이 따르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일까? 또는 병자들이 병이 낫는 것을 보고 그 말을 한 것일까? 또는 직업도 없고 올 데 갈 데가 없어서 그 말을 한 것일까? 또는 주님은 만능의 능력자이시니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왕이 될 것이라고 알고 따르겠다고 한 것일까? 누구에게 어떤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한 것일까? 무슨 뜻으로 따르겠다고 했을까? 좋은 뜻으로 그랬을까, 자기 뜻으로 그랬을까, 예수님을 알고 그랬을까?

 

58절에 보면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주님이 보실 때 따르겠다는 그 사람의 의중이 적합지 않으니까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한 것이다. 이런 데 눈치가 있어야 한다. 구원에 눈치를 써야지 쓸 데 없는 데 눈치를 쓰지 말아라.

 

본문을 보면 성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의 일을 마감해 놓고 하늘로 가시려는 마음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죽으러 올라가는 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이 이걸 알까, 모를까? 모른다. 예수님께서 죽으러 가신다는 것을 모른다. 알 것 같으면 따르겠다고 했겠느냐?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길 예수 당신을 따르는데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모양으로 건 죽으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도 예수를 믿고 따르겠느냐? 주님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쫓으라했는데 우리가 지금 자기 죽을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중이냐? 그런데 사실 우리는 육신이 죽는 것보다 육신이 사는 쪽으로 신경을 쓰고 있다. 육신 쪽으로 이해타산을 놓고 예수를 믿고 있고, 예수님에게 그걸 들어달라고 하지 않느냐?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을 좀 하고 따르자 그 말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하는 여기에는 자기도 이 어떤 사람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께 찾아와서 따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불렀느냐, 스스로 따르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데리고 다니는 거냐? 예수님이 불렀다.

 

예수 믿는 것이 내가 스스로 따르는 거냐, 예수님이 불러서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너를 불러서 따르는 거냐? 예수님이 불러서 따르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다. 스스로 따르는 것과는 다른 거다.

 

우리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여러 형태로 이 교회에 나왔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깨달음으로 나온 것이냐, 아니면 다른 교회에서 말썽을 일으키다가 자기 입지가 없어서 우리교회에 온 것인지? 자기 신앙의 자세를 늘 바로 잡아야 한다.

 

주님의 부르심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어떤 사람이했는데 이 어떤 사람이 누굴까? 홀아비인가, 아니면 부부가 싸워서 집을 나온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발견한 것일까, 단순히 예수 따르는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까 나도 따라볼까?’ 하고 따른 것일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예수님께 와서 나도 따르겠습니다하고 따르는 것도 있고, 아무 말도 없이 슬슬 뒤에 붙어 따르는 것도 있다. 그러다가 마음에 안 들면 슬쩍 떠난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스로 찾아와서 따르겠습니다했다. 요즘 세상목사들 같으면 따르겠습니다하면 쌍 손을 들고 반가이 맞이하면서 일꾼으로 써 줄 텐데 주님은 왜 이 사람을 반가이 맞아주지 않았을까? 오늘날 목사나 교인들 같으면 이런 예수님에게 그 사람이 믿고 따르겠다고 왔는데 왜 이상한 말을 해서 보냅니까?’ 라고 할만도 하다.

 

58절에 보니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지만 그러나 그 말씀을 하심 속에는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다는 그 남자의 마음을 보고 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실 때 어디든지 주를 따르겠다는 그것이 말뿐이지 그에게 그런 마음은 없는 것이다. 성경해석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 속에서 다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58절의 말씀을 얼른 들으면 나는 집도 없다. 재산을 모아둔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빈 털털이다그렇게 들린다. 그러니까 세상 것을 바랄 마음으로 나를 따르지 말아라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는 이 말을 가만히 새겨들으면 나 예수는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두고 살 것도 아니지만 이 세상에는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만한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참 사람은 이 세상 것에 절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이 세상에 절할 아무 것도 없느냐? 돋보고 부러워할 아무 것도 없느냐? 오늘날 자기는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곳이 많지 않느냐? 돈을 보고 머리를 숙여야 되고, 사람을 보고 머리를 숙여야 되고, 좋게 보이려고 머리를 숙여야 되고.

 

59-61: 변명이 많다. 59절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 나의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것이다. 또 한 뜻은 부친이 돌아가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신 후에 예수님께 돌아오겠습니다하는 의미도 들어있다. 세 번째는 재산을 많이 불려서 부모와 자식이 고생을 안 하도록 만들어 놓고 예수님께 와서 믿고 따르겠습니다하는 뜻도 들어있다. 네 번째는 먼저 사람 사는 터전부터 마련해 놓고 따르겠습니다하는 뜻도 들어있다.

 

목사들도 그런 분이 있다. 목회하다가 어려우니까 목사는 뒤로 두고 영업을 해서 집도 사놓고 재산도 불리고 나서 이 진리를 따르겠습니다한다. 그러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자기 마음대로 붙잡아지는 것이냐? 안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있을 때 그걸 잡고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 딴 짓은 벌써 기회가 자꾸 넘어가는 것이다. 이룰구원 차원에서 그만큼 손해가 막심한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습니다하는 말을 들어보면 세상 일반적으로는 타당한 말이다. 그래서 흔히 볼 수 있는 목회자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정신 상태를 보면 첫째는 자기가 목표를 세워놓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목회가 있고, 이건 보통 보면 종교사업이 많이 들어있다. 두 번째는 물질준비를 다 해놓고 목회를 하는 자가 있고, 세 번째는 이것을 한꺼번에 잡고자 하는 목회자가 있고, 네 번째는 목회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대로 목회를 하는 목회자가 있다. 이 네 가지 중에 어느 목회상이 좋으냐? 네 번째다.

 

첫 번째인 자기가 목표를 세워놓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목회, 종교사업의 목회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상이 아니다. 이 사람은 종교사업 목회가 점점 곤란해지면 돈을 따라가게 돼 있다. 이는 돈과 연관이 돼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인 물질을 다 준비해 놓고 목회를 하는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오는 많은 시련이 필요하다. 이 사람은 은연중에 물질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이제 목회를 하면 되겠다할 때 하나님께서 다 거둬갈 수도 있다. 그러니 위험한 발상이다.

 

세 번째인 종교사업도 하고 물질도 잡으려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 많은 잔꾀를 써야 한다. 이건 믿음은 아니다.

 

네 번째인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주시는 것으로 알고 감사히 받는 것이므로 이 목회자는 자타의 구원을 위해 목회를 하게 된다.

 

이상의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런 상태를 하나님의 섭리 면으로 또 한 번 생각을 해 보면 1번의 종교사업 목적의 사람은 그 사상이 종교사업적으로 사람이 넘어져 있는 상태다. 2번의 사람은 물질에 의지성이 들어있어서 물질로 시련을 받게 된다. 3번의 사람은 자기 욕심 때문에 시험에 들게 되고 믿음의 길로 가지 못한다. 4번 사람은 영능의 실력화로만 만들어 나가게 된다.

 

61: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자기가 주를 좇겠다고는 하지만 그러면서 누구의 허락을 받는 거냐? 예수님이 허락을 해 주시면 쫒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의 주장대로 허락을 해달라는 거냐? 자기의 주장대로. 그러니까 자기가 주격이다.

 

이 말을 들어보면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거냐? 1. 예수님이 잡고 있다? 2. 아니다. 가족들이 잡고 있다? 3. 아니다. 말하는 그 사람이 잡고 있다? 3번이다.

 

주님께 기도를 하면서 세상살이에 속한 요소를 가지고 많이 기도를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해 주십시오하는 것은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이냐? 인간 자기다. 그러면서 심부름은 누가 하는 거냐? 주님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런 심부름을 할 것 같으냐? 안 믿는 사람도 세상 것을 다 갖고 있는데 그건 예수님이 그들의 심부름을 해서 갖고 있는 것이냐?

 

그러면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라고 말한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할 허점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 어디에서 걸려 넘어질 런지 그 허점을 찾아보자. 이 사람은 부모가 가지 말라하면 못 가는 것이고, 아내가 가지 말라하면 못 가는 것이고, 자식이 가지 말라하면 못 가는 것이고, 모두가 가지 말라하면 인정에 붙들리게 된다. ? 훗날이 걱정스러워서. 그래서 내가 문제를 일으킬 게 무엇이냐? 좋은 게 좋더라하고 주저앉을 가능성이 그 안에 허점으로 들어있다.

 

만일 아내가 목사를 시켰다면 그 목사는 누구의 조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냐? 아내다. 이건 이치다. 이치를 어기고 예수님을 믿는 목회자들 교인들이 참 많다. 이런 목회자는 목회를 하다가 아내가 돈 많이 준다는 직장이 생겼으니 그 직장에 들어가라하면 목회를 그만두고 그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 또 아내가 목회를 그만두라하면 그만 둬야 한다. 이게 누구냐? 이세벨이다. 자식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움직이는 목사도 있다.

 

십일조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 천주교인에게나 유교인에게나 불교인에게 교회에 가도 되느냐?’고 물어보면 가라고 하겠느냐, 가지 말라고 하겠느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순복음 등등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다른 교회에 간다고 하면 가라고 하느냐, 가지 말라고 하느냐? 가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곳이든 복 받고 병 낫는다하면 가리지 않고 찾아가느냐? 말리던 사람들이 계속 말릴까? 부활 때 부활을 할까요, 말까요?’ 하고 물으면 온 가족이 부활하지 말아라하면 부활이 안 되는 것이냐?

 

말 한 마디 속에 이치가 있는 건데 이치가 틀어져 있으면서 빙 둘러져 있으니 잘못된 것을 잘 모른다. 자기 성격 성질이 나쁘면 자기가 그 면에서 은혜를 못 받는 거지만 신앙의 이치가 틀어지면 주님과 완전히 대적이 들어있는 심각한 거다. 이치가 틀어지면 전혀 은혜를 못 받는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내려오고 있는데 자기 그릇은 제 마음대로 딴 데 두면 그 은혜가 받아지느냐? 못 받는 거다.

 

그리고 은혜를 주시는데 받는 자기의 그릇이 작거나 하면 받기는 받아지는데 남과 비교하면 자기는 적게 받아지니까 화가 날 것이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을 가인을 불택자로만 보면 안 된다. 예배시간에 피 없는 제사,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못 드려서 남을 죽이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의 태도도 여러 가지다. 그래서 성경에 보니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첫째로 이유와 변명 없이 따르는 자가 있고, 두 번째는 스스로 찾아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해도 예수님은 그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달갑게 받아주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부르셨는데도 변명이 붙은 자도 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 사람이 변명할 것을 몰라서 부른 것이냐? 속에 변명거리가 들어있는 것을 나타내려니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그 다음 네 번째는 예수 당신을 따르기는 따르는데 전제 조건이 붙어있는 자가 있다. 그 다음에 다섯 번째는 나를 따르려면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오라고 하는 말씀도 있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데 상당한 조건을 갖고 오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께서 보시고 이 사람은 이것부터 해야 따르겠구나해서 그것부터 하고 따라오라고 하니까 그만 그것을 안 하고 가버린 자도 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그걸 봐야 한다.

 

목사님들이 목회할 때 이 사람은 이렇게 해야 올라가겠구나하는 사람도 있고, ‘이 사람은 이런 과정을 통해야 그 물이 좀 빠지겠구나이런 것도 있는 거다. 그런데 그것 저것도 없이 무턱대고 감투 씌우고 일을 시키면 죽을 때까지 못 고치고 갈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이 안 보여진다.

 

60: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어떻게 묻어줄 수 있느냐? 성경은 영적인 실상적 계시이므로 세상 일반개념을 가지고는 못 푼다. 일반생각으로는 못 푼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성경의 선을 행하라. 구제하라하는 걸 일반적으로 알아 들어서 일반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좋다고 하며 따르겠지만 그거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런 일을 말라가 아니라 그런 성경말씀은 그런 해석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 구제를 하라는 것은 영적인 뜻이 들어있는 건데 이 영적인 뜻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구제를 하려고 한다면 가난한 사람은 평생 구제를 하지 못한다. 물질이 풍부한 사람은 구제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물질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 계속 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구제하라할 때 일반적인 구제를 한다면 그건 임시다. 성경은 영원한 구제가 들어있는 거다.

 

물질이 가난한 사람이던 부자던 상관이 없이 말씀이 풍부한 사람은 이 말씀을 물질부자에게도 줄 수가 있고 가난한 사람에게도 줄 수가 있다. 물질부자라고 해서 꼭 믿음의 부자는 아니다. 물질이 부자라도 믿음에 가난한 사람도 있고, 물질에 가난한 사람이면서 믿음에도 가난한 사람도 있다.

 

영적인 면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면 계속 나온다. 이건 한이 없다. 그래서 주는 자도 은혜를 받고 구제를 받는 자도 은혜를 받는 거다. 여기에는 구원이 들어있다. 그런데 일반구제의 개념을 가지고 일반구제로 끝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예수 믿는 자들에게 때로는 물질구제를 해서 그 방편을 이용해서 빨리 차원을 올려서 은혜를 받게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은혜 받게 하는 게 없이 일반구제만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은혜를 받는 중인 사람에게 이 사람은 약간의 물질구제가 필요하겠구나해서 물질로 구제를 하면 그런 사람은 물질에 집착을 안 한다. 그러나 은혜도 못 받고 교회도 잘 나오지도 않는 사람에게 물질구제가 먼저 들어가면 그 사람은 자꾸 물질구제에 의지하게 된다. 그게 끊어지면 물질구제 하는 쪽으로 가버리게 된다.

 

어쨌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회에서 이렇게던 저렇게던 구제를 받고 특수은혜도 받고 일반은혜도 받았는데 특수은혜 쪽으로 생각을 못하고 일반 쪽으로만 생각을 하다가 떨어지면 특수은혜도 끊어지고 이것저것도 못 받는다. 일반은혜는 특수은혜 때문에 받는 거다. 이러면 일반사람만도 못해진다. 이렇게 되면 교회도 못 나와진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어떻게 묻어줄 수 있느냐? 성경은 영적 실상적인 계시이기 때문에 세상 일반개념의 생각으로는 못 푼다. 영적 실상적인 계시는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기준으로 해서 이룰구원 영인성장 면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끌어 묻도록 하라고 했으니까 어떤 죽은 자들이 있느냐? 첫 번째는 선악과를 먹으면 즉시 죽으리라했으니 이 선악과를 먹고 영이 즉시 죽은 자, 그리고 육신은 점점 죽어가고 있고, 이 육신은 어차피 죽는다. 이 죽은 자가 있고, 그 다음에 영과 육이 죽은 자가 있다. 영과 육이 둘 다 죽어서 송장이 되면 그 시체를 매장하더라. 이건 일반적인 일이다.

 

죽어서 화장터나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볼 때 영과 육이 죽었는데, 그걸 메고 끌어 묻으며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의 영은 죽었고 육은 죽어가고 있다. 죽어가고 있는 동안에 일반은혜로 그나마도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죽은 자들이 있다.

 

세 번째는 영은 중생이 되었으나 육신이 죽은 자는 이룰구원을 못 이루게 된다. 즉 예수 믿고 육신이 죽은 자들이다.

 

네 번째는 기본구원은 입었으나 성장적인 면에서 마치 육신이 죽은 자처럼 성장이 안 되고 있는 자. 영은 중생이 되었으나 죽은 자는 성장이 안 되듯이 이룰구원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것. 그렇게 죽은 자.

 

그 다음에 영이 중생된 자로서 이룰구원으로 성장되고 있는 자. 이거는 둘 다 살아있는 거다. 이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다. 이런 삶이 돼야 한다.

 

이걸 정리하자면 산 자와 산 자는 교통이 되고 연합이 잘 된다. 이런 이치로써 죽은 자는 죽은 자끼리도 교통도 안 되고 연합도 안 된다. 또한 산 자와 죽은 자는 교통도 안 되고 연합도 안 된다. 원리적으로 안 된다. 교통과 연합이 안 되는 것은 매장이 되고, 다시 말하면 영원히 이별이 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의 죽은 상태를 말한 것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신앙 믿음이 죽은 상태를 질적인 면에서 연구하기 위해서이다.

 

선악과를 먹고 영이 죽은 자는 육신이 서서히 죽을 때까지 죽는 일만 하다가 죽는 것이다. 똑같은 일을 하다가 늦게 죽는 자는 먼저 죽은 자를 매장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예수 안 믿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이 그 부모를 땅에 묻지만 그 자식도 예수 안 믿고 있으면 영은 죽었고 육은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식이 또 죽으면 또 그런 식이 된다. 그러나 어쨌든 산 자는 살았다고 하나 죽어가는 상태이므로 빨리 죽은 자를 늦게 죽는 자가 묻어준다.

 

부모를 매장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영원히 이별이 된다. 집에서 죽었을 때 이미 이별이 된 거지만 이제는 죽은 육신마저도 땅에 묻었으니 영원히 이별이 되는 거다. 이별이 되는 것은 잊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것은 죽은 자들끼리 이별하는 것은 그냥 두라는 것이다. 죽었느냐? 그러면 이별을 해야지 그것을 앉고 있으면 썩고 병을 옮아오고 너도 죽는다.

 

죽으면 이별이다. 죽었으면 이별이다. 그러니까 죽은 자들 장사하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네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느냐? 그러면 정신 사상을, 사고방식을 산() 쪽으로, 살리는 쪽으로 가져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 사역을 보면 예수님은 당신의 입장에서 묻는다고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고, 또 보지도 않겠다는 것이니 예수님의 그 신앙사상은 잘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너는 죽기 전에 살리는 일이 급하니 살리는 일만 하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죽는 걸 기다렸다가 죽은 거 묻는 게 급한 거냐, 죽기 전에 살리는 게 급한 거냐? 후자다. 또 살아있는 자는 살리는 일을 해야 하고, 살았으면 성장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죽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어디에 묻을까신경 쓰지 말고 너는 살았으니 살리는 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말하면 주님을 따르는 것과, 부친을 장사하는 것이 어느 것이 먼저요 우선적이냐?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이 부친이 죽으면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이냐?

 

선악과 먹은 세상 사람들의 판단은 주님의 판단, 주님의 말씀과 확실히 다르다. 그러면 주님을 따르는 것과, 부친을 작별하고 오는 것과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렇게 물으면 부친에게 인사부터 해 놓고 주님을 따라야 하지 않나?’ 하는 일반적인 면으로 자꾸 생각을 하려니 마음속에서 부담이 갈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부친과 작별한 상태가 된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 게 부친을 위해서 믿는 것이냐? 예수 믿으면서 자기 부친을 생각하고 마음이 자꾸 그리로 가는 거냐?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부친과 작별한 상태다. 즉 타락된 세상이 요구하는 격식을 다 치른 후에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못 따른다.

 

그런데 보면 거의가 그런 추세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런 일을 많이 본다. 우리 ㅇㅇ이 시집보내려고 집 사놓고 그런 거 꿈도 안 꾼다. 예단 예물 그런 거 미리 장만해 놓고 시집을 가려면 시집가기 전에 돈을 벌어야 한다. 그렇게 되니 주일도 못 지키는 거다.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고 들어가면 사람도 있고 돈도 있고 다 따르는 거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다 준비를 해 놓고 가려고 하느냐? 다 준비를 해놓고 가면 행복한 거냐? 예단이 이것밖에 안 되느냐? 이러냐, 저러냐?’ 하며, 거기에다 성격마저도 다듬어지지 못했다면 그렇게 결혼을 해서 어떻게 살겠느냐?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품이 자라면 거기에는 부지런도 들어있고 신실한 것도 들어있으니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도 살림을 모아가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성품이 좋으니 행복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준비를 해야 행복하고 부모노릇이 되겠느냐? 이건 큰일 날 소리다. 그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다.

 

부모의 생각이 잘못돼서 자녀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면 자식이 얼마나 힘이 드느냐? 타락된 세상이 요구하는 격식을 다 치른 후에 어떻게 예수를 따를 거냐?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로하는 거기에 이런 게 다 드는 것이다. 누가 인간세상을 만들었으며, 누가 세상의 주인이시며, 누가 세상의 주격자인가?

 

더 쉽게 하나님의 자녀가 주일날 예배시간을 빼먹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주님 앞에 합당한 것이냐? 어느 게 먼저냐? 주님 앞에가 먼저가 아니냐? 쉽게 말하면 주님 앞에 예배하고 가서 장례를 치러도 늦지 않다. 그런데 주일날 빼먹고 장례를 치르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우리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오늘 이 성경해석에 그런 면이 다 들어가는 거다.

 

장례를 치를 때 예를 들어서 부모형제 동생들이 다 있을 것이니 나는 송장을 놔두고 잠깐 예배를 드리고 가면 될 게 아니냐? 그렇게 되면 형제들과 의가 상한다는 변명이 붙겠지만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평소에 주도적으로 일을 해 나가면 된다.

 

평소에 살리는 일만 죽 해 나가면 딴 것은 어려운 게 아니다. 쉬운 건데 쉬운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다. 우리는 어떤 의미로 보면 세상의 주인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주인이다. 주인의식을 갖고 그런 일에도 옳게 밀어붙여야 한다. 왜 그런 데로 돈을 막 들이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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