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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도다.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203 추천 수 0 2021.05.19 15:58:11
.........
성경본문 : 눅9:57-10:3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957-103.

 

957-62: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101-3: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57-62: 인간이 예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 앞에 똑바로 사는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

 

농부가 쟁기를 잡았을 때, 농부를 들고 농부와 같은 우리 인간 자기의 삶을 이치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농부가 쟁기를 잡았을 때 앞을 보는 게 정상이냐, 뒤를 보는 게 정상이냐? 뒤도 옆도 보고, 길 가는 사람들을 다 쳐다보고, 싸우는 것 구경도 하고, ‘아는 사람이 오나?’ 하고 이것저것 신경 쓰며 밭을 가는 게 정상이냐? 밭을 가는 사람이 뒤를 기준하고 밭을 갈면 어떻게 되느냐? 비뚤비뚤해진다.

 

밭을 갈 때는 반드시 앞을 보고 가야 하는데 그 앞에 사람이 서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기준을 하고 갈아야 되느냐, 앞에 서 있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나 바위나 움직이지 않을 것을 보고 가야 하느냐? 후자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움직이는 것을, 세상의 사람이던 돈이던 사업이던 직업이든, 공부를 해도 모든 면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기준해서 앞으로 가는 것을 많이 본다. 그렇게 되면 앞의 것이 움직일 적마다 자꾸 새롭게 기준을 잡아야 한다.

 

만일 신앙인이 움직이는 것을 놓고 영원한 것을 잡은 것처럼 그러고 있다면 그렇게 해서 시대의 바람에 맞춰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 런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영인성장적인 면에서 사람이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적인 면에서 너를 만들어 놓은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지게 하기 위함이고, 이를 위해서 여러 가지 사건 존재 환경을 만들어서 주었으니 그 사건 환경을 이용 활용 응용을 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진짜 사람이고, 네가 나그네로 잠깐 동안 세상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산대로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도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져 나올 텐데 그게 하나도 없으니 너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폐인이다. 사람이 망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업이 망한 것만 생각을 하지 사람이 망하는 것을 모르는구나.

 

우리 기독자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신 소원 목적이나 가신 것이나 부활 승천을 볼 때도 하나님의 온전을 기준을 삼고 그 기준에서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 바로 성장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이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으로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늘로부터 오신 그 분의 성품으로 만들어져서 하늘로 올라갈 것은 없다. 해 아래의 것으로 만족하고 살았으니 해 위의 것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도록 되어 있는 것인데 그렇게 살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진 게 어디 있느냐? 이해타산 평가성이 주님처럼 내려지는 게 너에게 어디 있느냐?

 

예수를 안 믿는 이방 세상 사람들에게는 영원 궁극적인 이해타산은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해타산 평가성이 없다.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어있는 그 상태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이 중생이 돼야 하는데 그들은 영이 중생이 되지 못한 죽어 있는 상태다. 그래서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모르고 그 소원 목적은 세상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건 안 믿는 사람들의 얘기이고,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기준을 알기 때문에, 진리본질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기준을 알기 때문에 오늘날 이 말세지말에 그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교회, 세상에 속한 기독교인들, 거짓 것들, 이단자들의 소원 목적이 무엇이더냐? 예수이름을 이용해서 세상에 속한 자기 소원 목적을 이뤄달라고 하지 않더냐?

 

그것이 주님께서 전하신 천국복음이더냐? 주님께서는 너희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말아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했다. 그의 나라, 통치성, 그의 의. 이 옳음. 지식의 옳음, 지혜의 옳음, 도덕성의 옳음을 가져라.

 

이 신적 도덕성의 옳음은 타락된 이방 세상에는 없다. 이방 세상이 가진 의는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나온 타락된 도덕성이다. 그래서 양심을 가지고 그 도덕성을 지킨다고 해도 그 양심은 하나님의 옳은 진리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그나마도 양심적으로 그 도덕성도 못 지킨다.

 

오늘날 신문에서도 그런 걸 많이 보지 않느냐? 공부를 못해서 도덕성을 못 지키는 것이냐? 양심으로는 안 해야 되겠다고 하지만 그 양심 주위에 여러 가지 유혹과 사단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는 거다. 그것은 왜 그러냐? 그 사람의 인격이, 그 사람의 속성이 신적인 하나님의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세상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건 자동적으로 스며들고 그렇게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이 나름대로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하지만 질적인 면을 봤을 때 일반사람들이 꾀임을 받는 거나 유혹을 받는 건 어떻게 보면 타락된 사람으로서 그게 정상일 수도 있다. 하나님 앞에 정상이 아니라 그들의 세상에서 그게 정상인지도 모른다. 질적인 면을 봤을 때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일반사람들처럼 일반 도덕성을 놓고 도덕성이 어떠니 저떠니하고 따질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인격의 질을 가지고 볼 때 안 믿는 사람들은 그 근원이 타락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자기는 일반적으로 바로 한다고 하나 그건 일반에서의 얘기지 신적인 도덕성이 없는 이상 유혹과 미혹을 이길 수도 없고 헤쳐 나갈 수도 없고,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저주의 사람이다. 이 면이 이해가 되느냐?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하나님 앞에 저주 받고 타락된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하나님 앞에는 의고 선이고 악이고 소용이 없고 전부는 사망권 아래요 저주다. 사망이 왕 노릇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 갈 사람이다. 천국 갈 사람이다로만 보지 말고 교훈에서 구별하고 면밀하게 분별해야 되기 때문에 신앙의 질을 가지고 논해야 사람의 차원, 신앙의 차원을 알게 된다.

 

농부가 밭을 갈면서 비뚤비뚤 넓어졌다 좁아졌다 된 것은 왜 그런 건가? 예수 믿는 사람이 인생의 밭을 갈면서 비뚤비뚤 넓어졌다 좁아졌다 꺾어졌다 하는 건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뒷일을 자꾸 걱정하는 것. 이미 저질러 놓은 뒷일을 걱정하는 것. 앞으로 나가면서 내가 그렇게 한 뒤에는 행여나 어떻게 될까?’ 하는 그 뒷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미 저질러 놓은 뒷일을 걱정하는 것.

 

예수님을 믿으면서 과거적인 세상 것,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합당치 않다. 과거의 자랑이 나왔다면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은 현재 희망이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시골마을에 노인들이 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며 노는 걸 보면 주로 젊었을 때의 자랑을 많이 한다. 젊었을 때의 자랑을 많이 한다는 것은 지금은 늙었다는 것이다.

 

늙은 사람은 주로 과거의 자랑을 많이 한다.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는 과거의 자랑을 많이 해야 하겠느냐, 주님을 향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냅다 뛰어야 하겠느냐? 신앙의 정신이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산 신앙을 갖겠느냐? 과거의 자랑은 육의 신앙, 세상적인 신앙, 세상에 속한 신앙, 현재 발전이 없는 신앙이다.

 

밭을 가는 농부나 씨를 뿌리는 농부는 한 날의 일을 끝내기 위해 해가 뜨고 넘어가는 것을 상당히 신경을 쓴다. 사시사철과 날씨에 아주 민감하다. 바다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바로 간다. 앞을 바로 봐야 빨리 갈 수 있고 안전하고 신임을 얻게 되고 유혹과 미혹을 받지 않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 사상이 바로 가야 하는데 자꾸 세상 쪽으로 쳐다보고 욕심을 갖고 저거 내가 가졌으면?’ 하고 부러워하면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조국에서 돈을 부쳐주는 게 모자라니 적국의 스파이가 와서 얼마나 어려우냐?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하라. 내가 돈 다 대준다하면 그 돈이 어디서 나온 거냐? 돈이 필요할 때 돈 돈하고 돌아가게 되면 마귀가 거짓 종이나 거짓 된 사람을 보내서 유혹하면 넘어가게 돼 있다.

 

요즘 대출광고가 많은데 나는 그거와 상관이 없다? 아니다. 그런 요소가 너에게 들어있으면 너도 마찬가지다. 유혹은 네 속에 유혹의 요소가 없는데 유혹을 받느냐? 그게 아니다. 그런 요소가 속에 들어있으면 자력선과 같아서 붙게 된다. 질이 같으니까. 그러니까 누가 돈을 준다고 해서 덥석덥석 받지 말아라. 큰일 난다. 자기 속에 그 요소성이나 성질이 들어있으면 받게 돼 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모르면, 진리본질을 알아도 매우 조심이 되는 건데 신앙의 진리본질을 모르면 그냥 속는다. 속는 요소가 네 성격에 있고 네 성질에 있고 네 취미에 있고 네 간구에 들어있다. 마귀가 좋아하는 게 네 속에 들어 있다. 마귀가 좋아하는 것이 거짓 종들로 통해서 이단자들로 통해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진리성도들을 잡고 쓰시듯이 마귀는 거짓 종들이나 이단자들과 질이 같기 때문에 이들로 통해서 역사를 한다. 하나님의 허락이 그렇게 돼 있다.

 

어쨌든 뒤를 돌아보면 빨리 갈 수가 없고, 뒤를 쳐다보다가 앞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히게 된다. 길을 가면서 뒤를 보거나 옆을 보게 되면 전봇대에나 사람에게 부딪히게 돼 있다. 문제는 자기가 깨진다. 네가 손상이 된다. 그러니까 그런 정신 사상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일꾼들이 갖는 정신이 아니다. 앞만 보고 가야 한다.

 

나는 앞만 보고 가야 한다. 주님만 보고 가야 한다는 신앙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주님만 보고 간다는 것이 신앙하는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기도만 계속 하는 걸 앞만 보고 가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고, 전도만 열심히 하는 것을 앞만 보고 가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무슨 말이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신앙사상으로 가는 것이 앞만 보고 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기독교 안에 이상한 유행바람이 많은데 네가 그것을 쳐다보고 가다가는 네가 다친다. 이건 바로 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닮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라도 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바로 가게 되면, 신앙이 바로 가게 되면 하나님의 지식이 생기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나오고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에서 신적인 도덕성이 나오고 옳은 것을 갖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삶의 연관 면에서 바로 가는 삶이다. 그러나 이질적 요소적인 비진리적인 그런 신앙을 갖고 있으면 사람과 막 부딪힌다. 대립 마찰 충돌이 생기고 원수가 되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렇게 되는 것은 진리냐, 비진리냐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자기 성격 성질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하면서 갈라지는 경우를 보는데 이 때 진리 때문에 갈라진 것이냐, 모난 성격 성질 때문에 갈라진 것이냐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보통 보면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진리지식으로 다듬어지지 못하고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자기의 성격 성질 때문에 싸우고 분란이 일어나고 헤어지고 원수가 되고 한다. 그것은 진리신앙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진리신앙은 대처방안이 명확하고 지혜롭다. 하나님 앞에 지혜롭게 일처리가 돼 나간다.

 

10

 

1: 70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 각 처로 둘씩 앞서 보내셨다. 여기서 보면 세상만사, 그리고 성경 전반적으로 보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선지자들 보내고, 심판하시기 전에 선지자들을 보내서 미리 회개케 하신다. 반드시 그게 있다. 일반 이치적으로도 학교에서 시험을 친다면 먼저 가르쳐 놓고 시험을 친다. 안 가르쳐 주고 시험을 치는 법은 없다. 이치가 그렇다.

 

당신이 친히 가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을 전도인으로 보낸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이유도 많고 변명이 많은 것을 앞에서 보았다. ‘부친을 장사하고 오겠습니다. 집안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등등 여러 가지 변명이 많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 70인을 둘씩 전도자로 세워서 보냈는데 변명이 많던 자들이 그 중에 들어 있었을까? 어쨌든 둘씩 보냄을 받게 되었다.

 

변명이 많았던 그들이 전도인에 끼어 있었다면 정말 큰일이다. 다른 동료들을 시험에 들게 만들 수 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졌는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가자고 했다. 왜 바울이 마가를 안 데리고 가려고 한 것일까? 옛날에 마가가 바울이 전도하는데 애를 먹인 듯하다. 그런 것들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은연중에 다른 사람에게 안 좋게 비취는 요인이 될 수가 있다.

 

어쨌든 둘씩 보내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서로 힘이 되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지루하지도 않고, 서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의논도 할 수 있고, 주님 앞에서 서로 증인도 되고 할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시려는 동리로 앞서 보냈으니 만일 여기서 잘못 전했다가는, 또는 그 둘씩이 타락의 냄새를 풍기고 돌아다녔다면, 거짓말이나 슬슬 하고 사기나 치고, 교인들을 앞에 놓고 공갈협박이나 하고, 세상 복 받고 면류관 받는다고 하며 죽도록 일을 시켰다면 주님께서 들어가시는 날에 분명히 교인들로부터 반응이 나올 것이다. ‘제자들이 이렇게 이렇게 합디다하고 반응이 나오게 된다. 그러면 그렇게 전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큰 문책을 받을 것이다.

 

둘씩 보내는 게 그냥 전도한다가 아니라 둘씩 보내는 여기에서 전하는 사람의 영능의 실력에 따라 말이 전해질 텐데 헛된 말을 전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자유 뒤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 의례히 심판이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게 원칙이다. 왜 심판을 하느냐? 심판의 이유는 인간은 인격자요, 인격을 가진 인간은 자유가 있으니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이 들어가는 거다. 책임이 따른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목사라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구동성으로 나도 목사요. 나도 하나님의 종이요하고 서슴없이 말한다. 과연 나중에 주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런지? 주님 앞에 나서서 나도 목사였습니다그렇게 말을 할 수 있을 런지? 주님의 종이란다면 모든 면에서 주의 종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2-3: 2절의 말씀을 쉬운 말로 한다면 예수님께로 인도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들의 숫자가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이, 1. 70명의 숫자만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더 많은 전도자들이 필요하다? 2. 일거리는 많고 예수 당신 혼자서는 힘이 드니까 그래서 70명인데, 여기서도 더 많이 필요하다? 3. 복음운동은 실력이 없어도 숫자가 많으면 된다? 4. 영능의 실력자를 염두에 둔 말이다? 4번이 정답이다.

 

예수님이 왜 열두 제자를 불렀느냐? 일거리는 많고 사람숫자는 모자라서 제자들을 부른 거냐? 일에다 목적을 둔다면 그 앞에 보면 서기관이 예수님 당신에게 왔을 때, 이 서기관은 성경을 잘 아는 자니까 얼마든지 그를 일꾼을 삼을 텐데 그러지를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왜 어부를 불렀을까? 그러니까 일손이 모자라서 불렀다고 하는 것은 인간 제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일손이 모자라서 불렀다고 하는 것은 6일 동안 창조를 하신 이 주님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창조주 예수님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교회에서 왜 직분을 주는 것이냐? 일 목적으로 일 크게 하라고 준 것 같으냐, 성경대로 수종을 들면서 주님의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라고 준 것 같으냐? 교회에서 어떤 식으로 직분을 받았건 우리는 성경을 놓고 해석이 돼야 바로 되는 것이다. 직분을 받았으면 직분에 합당한 주님의 일에 수종듦이 나와야 하는데 어디 그런가? 만들어지지도 않고 수종도 안 들고. 말이 안 된다. 나중에 주님 앞에 어떻게 말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2절에서 예수님께서 전도자들을 보내시면서 무슨 걱정을 하시느냐?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 같도다라는 이 말씀이 사람숫자가 적다는 말이냐, 영능의 실력을 걱정하는 말이냐? 제자들의 신앙실력은 미약하다. 그런데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걱정하시는 질적 차원적 신앙을 모른다.

 

오늘날 세상 인본주의 교회의 인도자들이 주님께서 걱정하시는 그 차원을 모르는 거다. 교회의 인도자들이 사역목적에 꿈이 부풀어서 건물을 짓고 차도 사고 외국도 가고 선교도 하고 유치원도 하고 복지관도 하며 예수이름으로 영광을 돌린다고 모두 신이 난다.

 

그런 사역들을 하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느라고 하는 것이냐, 숫자를 늘리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냐? 쉽게 말해서 교회가 부흥이 많이 됐다는 것을 뭘 보고 말하는 것이냐? 신앙의 질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냐, 사람이 불어난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냐? 주로 어디에 목적을 두고 말을 하느냐?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예수님은 그걸 보시고 숫자가 많은 게 할렐루야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교훈을 주의라하라고 했다. :의 일곱 교회에서 다 나오는 건데, 예수님께서 교회를 보는 눈과 오늘날 목사님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어떤가?

 

내가 이런 소리를 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궁극교회 김목사는 다른 교회를 치더라한다. 그러면 여기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 종교 율법사들 서기관들 바리새교인들을 안 쳤느냐? 그들이 잘하는데 쳤느냐? 신앙이라는 게 뭐냐? 신앙이라는 게 사람숫자냐, 사람 속에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는 것이냐? 신앙은 질을 두고 말하는 거다. 신앙은 하나님의 본질을 두고 신앙이 있네. 없네하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들은 사람숫자가 많으면 교회가 크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네가 누굴 닮았느냐를 보시고 믿음이 있다. 없다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시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신앙의 눈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그 눈, 세상 인본주의로 육적으로 흐르는 그 눈을 가지면 안 된다. 그런 눈을 가지면 성경을 전부 세상이 좋도록 해석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좋도록 해석이 들어가야지 어떻게 타락된 세상이 좋도록 해석을 하느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건물을 보고 하느냐,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을 보고 하느냐? 아니면 네가 누굴 닮았느냐하는 그 면을 두고 심판을 하느냐?

 

일반적으로 사람이 좋다. 나쁘다하는 것은 사람이 잘 생기면 좋은 거고, 못 생기면 사람이 나쁜 것이냐?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 사람이 좋다. 나쁘다일반적으로도 그렇게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에의 눈에 합당한 사람을 보고 너는 내 영광이라하신다. 신앙의 이치를 바로 가져야 한다. 잘못 가지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거짓된 사람이 된다.

 

일반사람들은 사람을 볼 줄 모른다. 일반적으로 허우대 좋고 돈 많고 하는 식으로 사람을 사귀는 거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보는 눈은 그 중심이, 신앙양심이 진리를 따르느냐?’ 하는 진리 따르는 그 신앙양심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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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0 마태복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9:1-8  김경형 목사  2017-03-06 298
15589 누가복음 마리아에게 믿음을 배운다 눅1:26-38  안창천 목사  2017-06-02 298
15588 마태복음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마15:29-39  김경형 목사  2017-08-20 298
15587 이사야 죄를 멀리하는 삶 사59:9-19  이한규 목사  2018-05-08 298
15586 요한복음 복된 삶을 위한 5대 교훈 요3:26-30  이한규 목사  2019-01-23 298
15585 빌립보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버릴 것들 빌3:8  강종수 목사  2019-02-15 298
15584 잠언 사랑스러운 부부생활 잠5:15-23  전원준 목사  2019-06-22 298
15583 이사야 환난에 함께 하신 하나님 사63:7-9  강승호목사  2019-12-27 298
15582 신명기 순종과 불순종 신30:15-20  강승호목사  2020-02-14 298
15581 예레미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렘32:1-3  김중곤 목사  2020-11-12 298
15580 요한복음 예수 사랑 안에! 요15:9-17  정용섭 목사  2021-09-04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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