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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사도행전 최주훈 목사............... 조회 수 303 추천 수 0 2021.07.03 00: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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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1-21 
설교자 : 최주훈 목사 
참고 : 중앙루터교회 
(교회력설교)20210523 성령강림절
행 2:1-21

성령 강림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결정적인 사건으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꼽기 때문에 부활절, 성탄절과 함께 교회의 3대 절기라고 할 정도로 의미 있는 날입니다. 성령강림절이 되면 늘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과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연결해서 설교했는데, 오늘은 주제를 바꿔서 성령강림절의 유래와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가 다락방?
함께 나눌 말씀은 사도행전 2:1부터인데요,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오해부터 하나 풀고 가지요. 보통 오순절 성령 사건이 있던 장소를 “마가 다락방”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어요. ‘다락방’이란 말이 무언가 소박하고 고향 냄새 가득한 향수를 자극하는 말이라서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장소는 다락방이 아닙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곳은 성전이나 회당 아니면 누군가의 집 등등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순절 성령 강림 장소가 다락방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데요, 죽 읽어보면,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았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3천 명이 모일 수 있는 다락방이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말입니다. 여하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장소가 ‘마가 다락방’이 아니라는 정도는 상식으로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순절
장소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성령이 임한 날이 어떤 날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에선 오순절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오순’(五旬)이라는 말은 50이라는 말이지요.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는 이유는 출애굽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애굽에서 탈출하기 전날 밤 죽음의 천사가 애굽을 덮치는 일이 일어났고, 그 땅에 사는 첫째 소생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죽게 되지요. 그런데 그때 양의 피를 문에 바른 집들은 모두 살아남게 되는데, 급히 누룩 없는 떡과 나물 그리고 양고기를 먹고 종살이하던 백성들이 탈출하게 됩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애굽을 나오면서 이날이 종살이에서 해방되고 재앙을 넘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매해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그렇게 애굽을 탈출한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이 시작되는데, 애굽을 빠져나온 지 정확히 50일 되던 날 여호와의 산에 이르게 됩니다. 그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개의 돌판,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율법을 수여합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율법을 주신 날, 그날이 오순절입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날이 오순절인데, 사도행전 2:1에선 제자들이 성령 받은 날도 바로 이날이라고 설명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연일까요? 저는 이게 의도적이라고 생각해요. 유대인들이 오순절을 지키는 이유가 모세의 율법을 받은 날을 기념하는 데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오순절을 지키는 이유는 모세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 약속한 성령의 새 언약을 받은 날이 바로 이날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모세의 율법보다 그리스도의 새 계약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초대교회는 이런 식으로 상징했을 겁니다. 돌판에 새겨진 모세의 계명보다 영으로 오셔서 마음에 새겨진 계명이 더 귀하다는 것이지요.
사도바울은 이런 신앙의 양상을 하나님의 두 계명으로 나누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3:6 말씀을 제가 읽어드립니다.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율법 조문’이라고 표현된 돌 위에 새겨진 계명과 영으로 받은 계명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선 모세가 받은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이 돌 위에 새겨진 글이고 문자입니다. 문자는 그것 자체로 죽은 것이고 아무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성경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책 자체, 성경에 기록된 문자 자체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제아무리 비싸고 좋은 성경을 손에 쥐고 있어도 그 성경책이 우리를 변화 못 시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건 부적, 아니면 미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실제 상황을 돌아봅시다. 성경을 손에 들고서도 우리는 본성에 따라 악한 말과 행동을 하고, 이웃의 마음을 찢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글과 문자에 갇혀 있는 동안, 글자는 아무도 경건하게 만들 수 없고, 마음을 뚫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새로운 계명’은 어떤가요? 이 계명은 돌이나 책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는 계명입니다. 이것야말로 참으로 영적인 일입니다.

성령 강림
사도행전에선 이것을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고 말하면서,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있었고, 그 소리가 집안 가득하며, 불의 혀가 갈라지듯 각 사람에게 하나씩 임했다’라고 표현합니다. 경이로움 가득한 순간이지요. 여기서 특이한 표현 한 가지는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보였고, 그 불이 각 사람에게 하나씩 임했다’라고 하는 2절 말씀입니다.
도대체 이 표현이 어떤 뜻일까?하고 여러 책을 찾아보며 궁리해 본 일이 있습니다. 불이 갈라지는 것을 표현한 것인지, 혀가 갈라진다는 것인지, 매우 독특한 비유라 책을 뒤져보면 마땅한 설명이 있을 줄 알고 여기저기 찾아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성경으로 돌아와 사도행전을 계속 읽는데, 언뜻 하나의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의 혀’란 표현은 ‘능력있는 복음선포의 은사’의 뜻이고, ‘불의 혀가 갈라졌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 능력이 임했다’라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예수님이 떠난 다음 두려움과 슬픔 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의 혀가 불같이 변합니다. 비탄에 잠겨 있던 제자들이 이젠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도행전 2장을 죽 읽어보면, 성령 강림 사건 후에 바로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불같은 복음선포가 베드로 한 사람에게서 그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땅끝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을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를 새로운 성품으로 창조하십니다. 돌판에 새겨진 문자는 우리의 마음을 관통하지도 못하고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영으로 오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돌판에 새겨진 계명과 성령으로 마음에 새겨진 계명의 차이입니다.

자유인인 동시에 종
우리는 성령을 통해 새롭게 거듭납니다. 성령은 우리를 쾌활하게 만들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자유를 얻게 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한 순간 용기가 생기고, 눈빛이 달라지며 모든 것들 이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성령 충만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즉시 완전해지는 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모든 면에서 정결하게 변했고 죄와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성령 충만이 아니라 제정신 아닌 사람으로 봐도 좋습니다. 물론, 성령은 우리 안에서 완전을 향해 끊임없이 일하며 우리를 돕습니다. 그 때문에 삶의 슬픔과 두려움, 공포는 날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육의 장막을 지고 살아가는 동안 그 아픈 흔적이 없던 일처럼 사라지진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땅 위에 사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죄와 죽음의 세계에 대해 민감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아무리 작은 부정과 거짓이라도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성령 받았다고 하는 거짓 그리스도인은 자기들의 죄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죄와 죽음, 악에 대해 무감각하고 아무것도 아닌 양 자신의 악행을 무시해 버립니다. 늘 이것쯤이야 괜찮다면서 무뎌진 양심을 자랑합니다.
이것은 불의 혀를 받았다고 하는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설교하고, 회개와 용서를 부르짖으면서, 뒤로는 거짓말과 악독한 술수와 헛된 모사를 꾸미며 자기 유익을 위해 교회를 훼파하고 교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천벌 받을 인간들입니다.
참된 신자,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자기의 사소한 말과 행동 속에서도 자기의 죄를 감지합니다. 행여나 내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가 되지나 않을까 싶어 돌아보며 아파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죄에 대해 싸우고 승리하게 하는 보혜사가 자신의 삶 속에 내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늘 용기를 얻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고, 보혜사는 참으로 죄에 대해 아파하는 이를 감싸주고 완전한 회복의 때까지 위로하며 동행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 받았다고 자랑하며 오만불손하게 행동하는 광신도들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안전이 보장된 것처럼, 모든 면에서 완전해졌고, 모든 것에서 자유한 것처럼 예의 없이 거침없이 말과 방종을 일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정말 성령 충만 받은 것일까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마음 깊은 곳부터 가득 찬 사람이라면, ‘온유 절제 충성 오래참음 자비 양선 화평 희락 사랑’이라는 열매가 삶에서 드러납니다(갈 5:22-23).
성령 충만한 사람은 죄에 대해 민감하게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늘 죄에서 벗어나기를 사모하면서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던지 사도바울은 롬 7:24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며 탄식하며 한숨을 내쉴 정도로 힘든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롬 8:26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하듯 우리의 탄식과 한숨을 들어주시고 남몰래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해주실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양심에 내주하면서 우리를 위로합니다. 이런 면에서 개혁자의 말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늘 혼합된 상태로 살아가는 걸 뜻합니다. 우리는 성령과 함께 죄와 악한 현실을 자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비유한다면, 병든 환자가 의사에게 맡겨진 상태, 그래서 곧 회복될 환자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 받은 우리의 상황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죄와 죽음의 공포를 스스로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 의사이신 성령이 우리와 대화하며 위로하고 도우시며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완전한 치료가 끝날 때까지, 가끔은 주삿바늘이 몸에 들어가는 통증도 있을 테고, 수술대로 실려가는 공포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런 시험 가운데서 우리 곁에서, 우리 위에서,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며 강건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마리아에게
하나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절 주보 그림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라는 작가의 ‘성령 강림’(1569-70)이라는 명화입니다. 성령 강림은 종교화가들이 선호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도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거기서 빛을 뿜어냅니다. 그리고는 거기 모인 각 사람 머리 위에 불이 갈라져 임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건, 성경에 없는 ‘마리아’가 이 그림 한가운데 있다는 걸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엘 그레코의 그림만 그런 건 아니고, 성령 강림 사건을 그린 성화 대부분이 이렇게 마리아를 제자들과 함께 등장시킵니다.
왜일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리아 숭배 사상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교회 역사 초기인 4세기부터 교회에서 마리아를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라고 불렀는데(암브로시우스), 이걸 번역하면 ‘하나님을 낳은 여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성모’라는 말이 마리아 이름 앞에 붙곤 합니다. 이게 나중에 마리아 숭배까지 가서 문제가 되긴 하지만, 교회가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여인이라는 존칭을 사용한 건, 마리아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가장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1세기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속국이었고, 그 속국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권력도 없고, 재산도 없는, 매우 보잘것없는 보통 사람입니다. 그것도 남성 본위 사회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여성이었고, 나이는 갓 어린이 티를 벗은 12~13세 정도입니다. 사회적 지위는 그야말로 말할 게 없습니다. 실제로 마리아 자신도 자신을 ‘천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비천한 자신에게 천사가 찾아와 하나님의 아들을 태에 안게 된 기쁨을 노래한 게 누가복음 1:39 이하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여하튼 마리아는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하면,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구석진 자리의 힘없는 사람, 모진 삶의 운명을 타고난 가망 없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냈고,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줍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가망 없이 비탄에 빠진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의 모델입니다.
물론, 성령 강림의 사건에 등장한 마리아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순절 사건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은 이 대목에서 하나의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지요.
오순절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비탄과 불안이 가득 찬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누구에게도 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비탄에 잠겨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도하는 이들이 제자들이었고, 마리아는 바로 그렇게 아무도 돌아보지 않지만 탄식하며 기도하는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의 비참과 무력을 슬퍼하며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신 성령님은 마음 가운데 오셔서 돕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돕기 시작하면 좋은 일만 생기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찾아오시면 드디어 치열한 선과 악의 갈등,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의 소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으시고 응답하면서 위로와 평안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 가운에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 충만 교회
여기서 성령 충만한 교회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해집니다. 도움을 얻지 못하고, 위로받을 길이 없고, 용기를 상실한 사람들, 불신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 영혼이 쇠약해진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 비탄에 빠진 지역이 어디인지 교회가 찾아야 합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듯한 비탄으로 사는 사람들을 돌보며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야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 식구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국내든 외국이든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기를 북돋고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교회입니다.
이런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일에도 제동이 걸릴 수도 있고, 돈이 없다는 이유로 계획이 꺾일 수도 있고, 환경 때문에 낙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꺾여 낙망할 때마다 주님의 약속을 기억합시다.
오늘 복음서 본문으로 읽은 요 16장에서 주님은 불안에 떠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진리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니리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13,24)
주님의 이 복된 약속의 말씀이 우리 모두를 위한 성령강림절의 약속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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