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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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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22절-24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22절: 집안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제일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어머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안 가르쳐 주면 잘 모른다. 안다고 해도 표면으로 나타난 것만을 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면 그만큼 서로가 잘 알아야 한다. 모르는 상태에서는 서로 사랑할 수가 없다. 서로 사랑을 해도 ‘저 사람의 어떤 면을 보고 사랑하는지’ 하는 게 있다. 돈을 보고 사랑을 하는 거냐? 다리를 보고 사랑하는 거냐? 그 사람 마음속의 인격 성품이 발라야 한다. 돈을 보고 사랑을 한다면 돈이 없어지면 사랑을 안 한다. 그러면 또 돈이 있는 사람을 찾게 된다. 얼굴 모양새를 보고 사랑했다면 나이 들어서 쭈그러지거나 혹시 사고나 나서 얼굴이 달라지면 또 다른 사람을 찾게 된다. 사람은 마음이 아름다워야 한다. 이게 복 받을 사람이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고, 예수님 당신이 우리에게 마음대로 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보고 ‘그러지 말아라’ 하는 게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 말아라’ 할 게 있느냐? 없다.
예수님은 전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음대로 하신다. 이걸 거꾸로 생각을 해 보면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닮는 면으로 마음 속성 인격이 마음대로 들어간다면 예수님이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 마라’ 간섭이 필요가 없다. 사람이 바로 되는 그 면에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말리겠느냐? 하나님이 말리겠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음대로 하시고, 우리 또한 영원 궁극적 구원을 위해서 마음대로 한다면 하나님은 안 말린다. 그게 참 자유니까. 그러면 그 만들어진 자유를 가지고 신령천국에 들어가면 천국에서 누구의 간섭이 있겠느냐,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느냐? 마음대로 한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깨달음이 들어갈수록 그런 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어떻게 교회에 나오는 것도 ‘안 가냐? 늦겠다. 빨리 가라. 밥도 빨리 먹고 빨리 교회에 가라’ 자꾸 이런다면 사람이 귀찮아서 쓰겠느냐? 남의 간섭을 받으면 되게 귀찮다. 왜 간섭을 받을 자로 살려고 하느냐? 진리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남의 간섭을 안 받는 쪽으로 알아서 안 되느냐? 알아서 하는 게 자유다. 어떻게 꼭 간섭을 받아서 소리를 듣고 꾸중을 듣고 야단을 맞고 징계를 받고 그렇게 사느냐?
아버지의 마음이나 아들의 마음이 단일성이다. 똑같다. 소원도 목적도 취미도 추구성도 생각하는 모든 것이 똑같다. 똑같은데 여기에서 의사불통이 있고 궁금증이 있겠느냐? 없다. 만일 아들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있다면 여기는 아버지와 의사불통이 돼 있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과 그렇게 불통이 된다면 우리의 구원은 그만큼 없다. 이건 무엇과 같은가 하니 시계가 돌아가다가 딱 선 것과 같다. 시계가 톱니바퀴 하나가 망가지면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모든 이치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이,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 정말 주님의 것과 같다면 그 아귀가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아 돌아가니 순조롭다.
계시를 주심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우리의 의요, 우리의 선이요,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계시를 주어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심이다. 주님의 구원설계대로 이루어 가는 것이 참 마음대로요 자유인데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닌 것이 많다. 구원설계대로 이루어 가는 것이 참 마음대로요 자유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것만 받는다. 아버지는 영원히 기쁘고 즐겁고 존귀 영광스럽게 되고 능력이 되고 행복만 될 것을 아들에게 준다. 아들은 그것을 알고 받는다. 예수를 믿되 이런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참 주님의 종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타지고 썩어지는 것을 찾아가느라고 허둥대다가 악한 귀신이 들린 자들이 많다.
마귀가 예수님 앞에서 세상을 자랑하면서 ‘내 앞에서 나에게 절을 하면 세상을 다 준다’고 한다. 이게 마귀의 말이다. 그러면 세상이 마귀 자기 것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을 보고 절을 하면 그게 옳은 신앙이냐? 이치를 모르면 속는 거다.
수학에는 법칙이 많은데 그 법칙대로 풀어야 문제가 풀린다. 법칙을 하나도 모르면 하나도 못 푼다. 예수 믿는 것도 그렇게 생각을 하라. 모든 세상만사를 예수님에게 풀라고 하면 잘 푼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만사 지극히 작은 것에서, 특히 사람에서 어떻게 부딪히는지?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뭐가 풀리겠느냐?
예를 들면 어느 날 예수님이 ‘네 손에 있는 것을 버려라. 그것은 불타지고 썩는 거다. 그것을 가지면 네 몸에 불이 옮겨 붙는다’ 하니까 어떤 성도는 ‘예, 버리겠습니다’ 하는데 어떤 성도는 ‘내가 가진 이게 더 좋은데요’ 하며 안 버리려 하고, 어떤 성도는 버렸다가 안 보이는 데서 다시 주워서 또 들고 온다. 주님이 버리라는 건데 약아빠져서 버리는 척 하면서 또 주워오는 그런 생각 그런 마음. 이게 어느 교인 같으냐?
23절-24절: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가 마음의 눈을 가지고 뭘 보고 있느냐? 일반적으로 소경보다는 보는 눈이 훨씬 복되다. 눈을 뜨고 있으면 사물을 다 볼 수가 있다. 보는 눈이라도 문제는 ‘무엇을 보고 있는 눈이냐’가 문제다. 여기서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사람마다 보는 눈들이 다 다르다. 크게 말해서 가견적인 현상적인 것을 보는 눈이 있고, 물건이나 눈에 보이는 산천초목만 보는 눈이 있고, 그러니까 외모 모양 크기 색깔 그것만 보는 눈이 있고, 또 재산이나 학문을 보는 눈, 지식을 보는 눈, 그 다음에 이면적 영적인 면을 보는 눈, 영의 눈이 있다.
사람을 보는 면에서 잘못된 지식을 가졌다면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겪을 가능성이 많다. 사람을 선택하는 면에서 잘못될 수 있다. 왜? 지식이 잘못돼 있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평생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을 보는 눈을 열어준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 예수님께서 제자보고 말씀하시는 거다. 제자들은 무엇을 보고 있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보는 눈이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
첫째는 제자들이 산천초목과 하늘에 뜬 구름을 하염없이 보고 있어서 이런 말씀을 했느냐?
두 번째는 제자들이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 믿을 사람인지, 안 믿을 사람인지’ 관상을 보고 있었다?
세 번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있었다? 뭘 봤느냐? ‘예수님이 무슨 옷을 입었으며, 키는 얼마나 크며, 몸무게는 몇 킬로며, 눈과 코는 어떻고, 머리카락은 어떤 색이며, 신발은 무슨 신을 신었으며’ 그런 것을 보고 있었다?
네 번째는 예수님은 병도 고치고 귀신을 내어좇는 권능이 있으니 그것을 얻어가지려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있었다?
다섯 번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인데 그 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보고 있었다? 이게 정답이다.
무슨 말씀 끝에 ‘너희의 보는 눈이 복이 있다’고 하느냐? 22절 말씀에서 이것을 해석을 해주고 있다. 계시를 보는 눈이 복이 있다. 계시는 바로 주님이다.
24절: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신약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믿음이 없다’ 라고 말할 수가 있다. 즉 신약의 예수님 당시 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구약의 사람들은 육신의 예수님을 보지를 못했으니까 믿음이 없다고 말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게 되면 문제는 예수님은 부활 승천을 했으니 지금의 우리도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못 봤기 때문에 우리도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했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다’ 했으니까.
시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신약시대에 오셨으니까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메시아를 못 보고 죽었다. 그리고 또 부활 승천해 버렸으니 우리도 육신의 예수님을 못 보고 죽는다. 그래서 ‘너희의 보는 눈이 복이 있다’고 했으니까 우리도 복이 없는 거냐? 이렇게 되면 우리가 복이 없는 게 누구 탓이 되느냐? 시대적으로 예수님을 보고 못 보는 것으로 말이 된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못 본 게 예수님 탓이 돼 버린다.
그런 식이라면 만일 구약시대에 예수님이 왔으면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복이 있게 되고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복이 없는 셈이 된다.
그러니까 단순히 ‘보았다. 못 보았다’ 하는 이것을 가지고 논할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되다’고 한 말씀도 있으니까.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즉, 유대종교 율법사들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못 봤느냐? 더 잘 봤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기다린 그 메시아를 왜 죽였느냐? 죽이려고 기다린 것이냐?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유다도 예수를 팔아먹으려고 기다렸느냐? 그리고 구약 때의 아브라함과 노아 다니엘 엘리야 에녹 요셉 느헤미야 에스라 에스겔 등등 이런 선지자들은 육신의 예수님을 못 봤으니까 복이 없는 사람들이냐? 에녹과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갔으니까 복이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 그리고 이 마지막 때의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부활 승천해서 눈에 안 보이니까 복이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
그런 식으로라면 복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면 성육신으로 구약 때도 오시고 신약 때도 오시고 말세 때고 성육신으로 오셔야 다 복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단순히 ‘보았다. 안 보았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심이냐?
구약 때 믿음의 선진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굳게 믿고 오실 것을 희망을 삼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기다리면서 변치 않는 간절한 신앙이었다. 정말 본받을 만하다. 이것을 잘 아는 제자들 왈, ‘우리가 예수님의 교훈을 직접 받으면서도 신앙 믿음이 없는 짓을 한다면 구약 때의 선조들에게나 마지막 성도들에게 면목이 안 서겠구나’ 해야 한다.
이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듣고 만졌으니까 확실한 증인들이다. 그래서 훗날의 말세 성도들에게 본질적인 면에서 천국복음을 전달할 큰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느껴야 된다. 기다리던 그 분을 보고 듣고 만졌고 말씀도 직접 듣고 했으니까 전해줘야 한다는 그 면에서 큰 책임이 있다.
이건 제자들 입장에서의 얘기이고, 이제 우리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볼 때 구약 때에 오리라고 하신 메시아를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고, 또한 구약 때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메시아가 열두 제자들에게 이루어진 것도 보았으니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헛되지 않는 것임을 확신할 수가 있으니 무척 기쁘구나. 너희들은 받았으니 기쁘고, 우리는 그 약속이 이뤄진 것을 보니 기쁘고.
그러니까 마지막 때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내가 구약 때로 올라가서 미래를 보고, 또 예수님 당시 때의 제자들의 입장에 서서 구약시대의 사람도 보고, 또 마지막 성도들도 보고 마지막 성도의 입장에서 또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변화산상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이 모였는데, 연대적으로 말하면 이 세 분은 몇 백 년씩 큰 차이가 있다. 그 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화하는 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변화산상에 나타난 그 분들의 대화를 오늘날 내 입장에서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깨닫는 거다. 그렇게 못 깨달으면 자기는 멍청이가 되는 거다. 그렇게 믿지 말아라.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구약 때 믿음의 종들이 ‘오리라’ 하신 메시아를 바라보고 믿은 그 믿음이 정말 부럽다. 열두 제자들도 메시아를 영접한 후에 말세에 사는 우리들에게 손색없이 천국복음을 전해주기 위해서 환난 핍박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때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 년도 아니고 250년 동안을 예수 믿는 사람에게 그렇게 환난 핍박을 주는데도 그들은 신앙을 잘 지켜서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느냐? 구약의 성도들이 메시아를 바라본 믿음과 신약의 성도들이 목숨을 건 믿음이 마지막 때의 성도들로서 머리가 숙여진다.
이렇게 구약의 성도가 예수 당시 때의 성도들에게 하는 말이 있었고, 구약의 성도가 마지막 시대인 우리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면 말세성도들은 참으로 복이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도가 메시아를 기다린 믿음의 결과를 말세성도들에게 보여주었고, 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요한계시록까지 기록을 해서 미래의 것까지 다 보여줬으니까 말세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더 많이 깨닫고 구원을 더 많이 이룰 수 있겠다는 점에서 참으로 복되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우리들처럼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 줄 아느냐? 그리고 예수님 당시 때에, 그리고 그 후에 제자들이 우리들처럼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 줄 아느냐? 모이기만 모이면 거기에 스파이가 있어서 신고를 해서 잡히기만 하면 목이 잘려나간다. 그러면서도 숨어서 좇아다니고 굴속에서 예배드리고 했다. 그게 카다쿰이다.
바위로 된 그 굴속으로 로마군인들이 들어가면 길을 못 찾는다고 한다. 교인들이 죽으면 그 안에 무덤을 만들어서 넣었다고 한다. 길이 엄청나게 복잡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군인들이 기독교인을 잡으려고 들어가면 못 잡는다.
성육신 당시의 제자들은 성육신 예수로 통해 신령한 아버지를 보아야 했었고, 구약 때의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자 하나님을 보아야 했었고, 말세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역사를 안 하신 때가 없었다. 시대를 초월해서 역사를 했다.
구약시대 때에 지금의 우리들처럼 성경이 있었느냐? 없었다. 신약 때는 우리들처럼 성경이 있었느냐?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서 구약 때도 볼 수 있고 신약 때도 볼 수 있고, 덩달아서 앞으로 올 마지막 때도 미리 볼 수 있는 이렇게 복된 우리들인데 어떻게 믿고 있느냐? 그 책임추궁을 안 당하겠느냐?
지금 신앙의 정신적인 종이 없다. 이런 인물들이 우리 궁극교회에서 나온다면 마지막 때 세상은 불타고 예수님이 오셔서 그런 성도를 세워놓고 ‘이 교인이 어느 교회에 다녔느냐?’고 묻는다면 ‘궁극교회입니다’ 이런 말이 나와야 할 텐데.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 믿는 정신을 똑바로 가져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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