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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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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37489 |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부활절 둘째 주일, 2021년 4월11일
죄 문제
아무리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성경에는 제법 나옵니다. 국어사전의 낱말 뜻으로만 읽는다면 대충 따라갈 수 있으나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려면 쉽지 않은 구절들입니다. 그중의 한 구절이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요일 2:1(후)~2절입니다.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살펴보십시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레 19:18)라든지 “무엇이든지 남에게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라는 구절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환영받겠으나 위 구절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좋은 말씀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여기고 지나칩니다. 오늘 저는 이 구절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인생살이에서 왜 절대적으로 중요한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요한일서가 기록되던 당시 교회에서는 죄가 논란거리였습니다. 현대인들이 기분 나빠하는 단어가 죄입니다. 잘못(불법)한 게 있으면 그에 해당하는 책임을 지키면 된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죄를 세상살이의 규칙을 어기는 것쯤으로 여기는 겁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죄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나 지키는 사람이나 모두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기에 죄 문제를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무엇일까요?
죄는 단순히 도덕과 윤리와 관습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훨씬 근원적인 세력이라서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상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얼마 전에 서울과 부산에서 시장 보궐 선거가 있었습니다. 정책 선거가 되어야 한다거나 네거티브 하지 말자는 말도 있었습니다. 무능이 부도덕성보다 더 나쁘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선거는 대중의 욕망에 어느 정도로 어필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나타납니다. 대중의 욕망은 너무 강력하기에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가난해져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보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자치단체장에 당선될 수 없습니다. 진보적인 인사들조차 자본에 대한 욕망 앞에서 취약하다는 데서 이런 대중의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 사람이 진보냐 보수냐, 또는 지식인이냐 아니냐, 교양인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욕망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교회와 학교와 병원과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런 욕망에서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게 교회 몸집을 키우려는 욕망의 발현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대언자
요한은 본문에서 죄 문제에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접근합니다.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대언자’라는 단어에 ‘보혜사’(참조, 요 16:7)라는 각주가 달렸습니다. 대언자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의 번역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죄를 다루는 법정에서 피고인을 변호해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에서 변호해줄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가 우리를 변호해 줄 수 있는 이유는 그분만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만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변호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그 뿌리로부터 죄의 경향성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호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 깊은 분들도 이 사실을 추상적으로만 대합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춤꾼이 있습니다. 오랜 훈련을 통해서 몸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이 춤입니다. 어떤 이들은 춤을 어색하게 생각하고, 또 어떤 이들은 춤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몸치라는 말도 있긴 합니다. 제가 보기에 춤에서 핵심은 공간에 대한 특별한 느낌입니다. 공간은 비어있는 게 아닙니다. 공기로 가득합니다. 공기로 채워진 공간을 자기 몸으로 느끼는 겁니다. 몸의 동작을 통해서 공간을 가르기도 하고 합치기도 합니다. 공간을 깊이 있게 느끼는 춤꾼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돌고래처럼 황홀한 세상을 경험합니다. 비슷한 경험으로, 어떤 이들은 숲이나 들판에 나가서 기(氣)를 호흡합니다. 단전호흡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들은 공기 알맹이가 가득한 공간과 자신이 일체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생명의 환희를 느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의 변호인이라는 사실도 느끼는 사람만 느낄 수 있습니다.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여기서 또 하나의 새로운 개념을 끌어옵니다. 우리의 대언자이신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 제물이라는 겁니다. 화목 제물은 헬라어 ‘힐라스모스’의 번역입니다. 죄를 용서받게 한다는 뜻입니다. 루터 번역 성경과 KJV은 이 단어를 속죄로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변호인이라는 말과 화목 제물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런 성경의 주장을 해괴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예수의 운명과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를 통해서 우리가 변호 받고 속죄받는다고 말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속죄는 죄를 용서받는다는 뜻입니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즉 자신의 욕망에 묶여 있는 이유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완성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듯하면 화가 납니다. 요즘 20대와 30대가 기성세대에 화가 나 있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경제발전의 혜택에서 소외되었다는 겁니다. 이번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LH(한국토지주택공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개발 지역에 대한 정보를 이용해서 불로소득을 올리는 사람들도 제법 많습니다. 이해가 가긴 합니다. 그 지역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아는 신자가 저에게 와서 빚을 내서라도 땅을 마련하면 교회당 건축은 식은 죽 먹기라고 말한다면, 제가 솔깃해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특히 손해는 끼치지 않고 누군가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먼저 알아서 이용해도 나쁘지 않다는 논리도 터무니없는 게 아니거든요. 이런 문제는 누가 정권을 쥐든지, 어떤 정책을 펼치든지, 북한처럼 독재자가 지도자로 활동하지 않는 한, 그리고 나라가 완전히 가난해지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 이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데서 인생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전투구에 끼어들지는 않을 겁니다. 비유적으로, 걷는 데서만 인생이 완성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영혼을 털면서까지 돈벌이에 인생을 걸겠습니까.
새로운 차원의 생명 경험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운명으로 보여준 분이십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믿었기에 그 척박한 상황에서도 예수 제자로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현실이 된 인생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에게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을 생명 충만으로 바꿔도 됩니다. 해방과 평화와 안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지금 설교를 듣는 분 중에서는 이렇게 말할 분이 계실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건 좋지만 십자가 운명은 싫다고 말입니다. 솔직한 발언입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사는 동안에 가능한 한 천수를 누리면서 안락하게 살겠다는 욕망을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이나 우리나 똑같이 원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반적인 인생 설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십자가 처형과 같은 운명에 떨어진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단계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알았기에 십자가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두려워하다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에게서 경험한 그 삶의 차원은 이전에 알던 차원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전에 알던 사랑과 달랐습니다. 완전한 생명이자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야만 성공한 인생이라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비유적으로, 도박에서만 인생의 짜릿한 재미를 느끼던 사람이 시를 읽고 어려운 이를 돕는 데서 인생의 참된 재미와 의미를 발견한 거와 같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속죄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초기 기독교인 중에서 이 속죄 교리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죄가 씻겨졌으니 지금 자신들에게는 죄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개념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거기에만 치우쳐서 죄의 무게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죄가 공중에 떠버린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인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일 1:8절이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저는 현대인들이 일종의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정의와 평화와 진리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인생 성공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선거에서도 자신의 집값이 오르는지, 세금이 얼마나 낮아지는지를 중요한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다른 요인들도 판단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전체 흐름은 그렇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죄 용서도 필요 없고, 대언자도 필요 없고, 화목 제물도 필요 없습니다. 얼마나 종교적으로 세련되게 사느냐 하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인생을 죄와 결부시키지 말고 즐겁게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인간이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요? 생명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죄의 힘을 자신들이 방어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삶은 위선이자 자기 연민이고, 자기 속임수는 아닐까요?
죄의 자백
정통 교부들은 영지주의자들과 다른 주장을 펼쳤습니다. 죄 문제를 진지하게 여겼습니다. 요일 1:9절이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영지주의자들은 죄가 이미 없어졌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면, 교부들은 여전히 죄의 세력이 우리 삶에서 강력하게 준동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 두 주장이 표현만 다를 뿐이지 실제로는 비슷한 거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긴 합니다. 오늘날 죄 문제를 교양과 윤리의 차원에서만 대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죄를 고백하는 기독교인 사이에 실제 삶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듯이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똑바로 살지 못하기에 모욕당하고 조롱당하는 일은 감수해야 합니다.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책임질 일은 책임지고, 부끄러운 일은 부끄러워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사실을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보물이 담긴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못생기거나 금이 갔지만, 보물은 여전히 보물입니다.
죄를 자백한다는 말은 자신이 본질에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죄를 자백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본은 조선 찬탈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주로 우익 정치인들과 그들에게 선동당하는 사람들은 죄를 자백하는 일에 인색합니다. 형식적으로 유감이라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거기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러니 한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겁니다. 일단 죄를 자백할 때만 그 죄의 세력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걸 알아야만 해결의 실마리도 풀립니다.
죄를 자백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상대적인 우월감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갇힌 강도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나 똑같다고 하면, 교수는 기분 나쁩니다. 북한의 김정은이나 미국의 존 바이든이나 똑같이 죄인이라고 말하면 펄쩍 뛸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불륜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온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는 경향이 있으니, 죄를 자백하기 어려운 겁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런 진정성도 없이 말로만 죄를 자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경향이 자주 나타납니다. 모두가 죄인이니 누구 탓할 거 없다는 식입니다. 양쪽 모두 오늘 본문이 말하는 ‘죄의 자백’과는 거리가 멉니다. 죄의 경중을 따지거나 일반화해서 죄의 무게를 피하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화목 제물이자 변호인인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습니다. 변호인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우리는 변호인을 통해서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2천 년 전 요한 공동체에서 기록된 말씀의 한 대목을 설명했습니다. 2천 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오늘 우리의 삶을 관통하고 혁파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정에서, 즉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를 변호하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변호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변호하고 계시는지 나태주 시인이 풀꽃도 오래 보아야 예쁘다고 노래했듯이, 그분에게 가까이 가서 오래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그걸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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