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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33-40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033-40: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33-37: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선한 이웃의 일을 실천하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 율법사가 이것을 실천을 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하니 첫째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그 정신 사상은 이웃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 율법사는 신앙세계의 이웃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참 이웃은 어떤 것을 본다? 사람이 강도당한 것을 안다. 영적인 차원에서 신령한 눈으로 강도당한 것을 볼 수가 있다. 모르면 그 사람은 참 이웃을 모르는 사람이다. 일반 이치적으로도 이웃을 모르면 그 사람은 이웃과 연대감이 없다. 오늘날 아파트에 사람들이 다 그럴까마는 거의가 이웃에 연대감이 없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 집이 이사를 들고 날고 하지만 서로가 모른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계단으로 올라내려도 이웃사람인지 손님인지를 모른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이 단절이다.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의 자물쇠를 몇 개씩 잠그고 산다. 그만큼 단절이 될수록 아닌 말로 불이나 일어나면 구원받기가 힘들겠구나. 이웃을 모르면 어떻게 사람 사랑이 되겠느냐?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느냐? 인간 자기 외에는 모두 이웃이다. 그런데 영의 눈이 감겨있고 영적인 면을 모르기 때문에 부모형제 처자식 간이라도 강도를 만나고 있구나하는 걸 모른다. 영적인 면에서 모르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강도를 만나서 필연적으로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 건데 이걸 모른다. 강도를 만나는 것을 모른다. ‘주님을 모신 사람인가, 강도를 왕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가하는 걸 볼 줄을 모른다. 자기가 늘 피해를 당하면서도 무엇이 피해인지를 모른다. 돈을 벌어가지고 들어오면 이건 이익으로 생각을 하는데 자기가 무엇을 손해를 보고 있는지 참 손해를 보는 그걸 모른다.

 

우리는 신앙세계의 이웃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이 깨달아져서 영의 눈이 그만큼 열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자칫 잘못하면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더 못 쓰게 만드는 일도 많이 있다. 그걸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듯이 자기도 역시 그 입장에 서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건데 정반대다. 자기 욕심만 차리고, 제 뜻대로 안 해 준다고 하고.

 

세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의 뜻을 담은 말씀인데, 하늘의 뜻을 담은 말씀인데, 영적인 뜻을 넣은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 일반 사회 윤리 도덕성의 개념으로 사랑을 실천을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뜻으로 본문을 알아듣고 있다.

 

영의 눈을 가지고 일반사회에서 사람 사는 것을 보게 되면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에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할 수가 있으나 일반사람들은 영의 눈이 감겨있고 소경이기 때문에 그 면은 전혀 모른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육적으로 좋게만 해주면 그게 그만 이웃사랑인줄로 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는 자도 그게 하나님의 사랑인 것으로 속는다. 그렇게 안 해주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식이 된다.

 

일반 이치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위해주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좋도록 해주고, 편안하게 해주고, 기분도 좋게 해주고, 모든 면에서 사람을 좋도록 한다. 이건 눈에 보이는 면을 좋게 해주는 거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사람 사랑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차원으로 올려놓는 것이 진정한 사람 사랑이다. 그런데 보통은 이걸 잘 못 알아본다. 돈만 많이 주고 먹을 것만 많이 주고 하는 걸 일반적으로 사랑으로 알지 사람을 바로 가르쳐서, 바로 깨닫게 해서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것은 사랑으로 못 느낀다.

 

진정 사람을 사랑을 하느냐? 사람을 하나님의 차원으로 올려라. 그게 사람 사랑이다. 그건 왜 그러냐?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으로 되기 때문이다.

 

인조사랑 인간사랑은 저질적인 사랑인데 사람을 하나님 앞에 올려주기 위해서 일반적인 그 사랑도 써먹을 수는 있다. 부모 간에, 친구 간에, 이웃 간에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하고 올려주기 위해서, 영원히 올려주기 위해서 일반적인 사랑을 써먹을 수 있는 거다. 그 안에는 교육이 들어있고 언행심사가 들어있다. 그게 참 사랑이요, 그게 아가페 사랑이요, 그게 우리에게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이다. 일반사랑은 사랑은 그런 게 없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져야 하는데 대부분 이걸 모른 채 사마리아인의 교훈을 육적으로만 봐서 육적으로 실천을 한다. 세상적으로만 본다.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차원으로 본다.

 

돈 많고 시간이 남아돌아가면 그런 건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성경이 그걸 말하는 거냐? 목적이 세상에 들어간 거냐? 성경은,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하늘의 뜻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사마리아인의 이 얘기를 일반세상에서 봉사하는 차원으로 알고 있다면 너도 도둑을 맞는 것이다.

 

그리고 글자적으로만 본다면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그렇게 실천을 하라고 했으니까 이 율법사가 날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찾아가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이냐? 그건 안 된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영생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글자적 문자적으로 일반 도덕성적인 개념이라면 한 번 실천을 하면 한 번 영생을 얻고, 두 번 실천을 하면 두 번 영생을 얻고, 이게 안 끊어지려면 계속 실천을 해야 하는데 영생이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냐? 그게 아니다.

 

오늘날 기독자들이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말씀을 상당히 오식 또는 곡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뜻을 두고 한 말씀인데 오늘날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이것을 세상 일반 도덕적인 개념으로만 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뭐가 많은 거다. 예배당 안에 커피점도 있고, 주일날 되면 버스에 목욕통 싣고 가서 목욕도 시켜주고. 그건 왜 그러는 거냐? 영생을 얻으려고. 그러나 그렇게 해서 영생이 얻어지는 거냐? 그건 아니다.

 

그런 일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도 일반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은 못하는 일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야 만이 되는 일이 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일을 해야 한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배우고 하는 일은 일반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일반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것을 너는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말씀의 정신으로 실천하라는 것인데 기독교인들이 그걸 일반적으로 알고 있으니 실천이 안 되는 거다.

 

율법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을 하려면 예수님을 믿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신앙정신 사상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해야 만이 자신부터가 여리고로 내려간 정신 사상에서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신앙정신의 질이기 때문에 구원이 되는 거다. 어디로 올라가야 구원이 된다?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과 의사단일의 평화. 이건 일반개념의 평화가 아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 그래서 이걸 인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거다. 절대 정확한 기준을 만날 수가 있는 거다. 예수님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게 다 구원이 되는 거다. 예수님을 닮는 게 구원이란 말이다.

 

자기가 예수님을 따라서 이렇게 구원이 되면 여리고로 내려가는 신앙정신을 가진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게 된다. 이게 사람을 낚는 어부다. 이해가 되느냐? 여리고로 내려가는 정신 사상의 사람을 낚아 올린다. 뭘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낚아서 에루살렘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그 정신 사상이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고기를 낚아서 회를 처먹고 반찬을 해 먹으면서 고기를 죽인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람을 낚아서 영원히 살린다. 높은 영광과 존귀의 사람으로 만들어 낸다. 이게 사람을 낚는 거다. 사람을 살리는 거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구원운동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자로 살고하는 것은 사람을 밑으로, 여리고로 내려가게 하는 것이다. 낚아 올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들어가게 하는 거다.

 

여리고를 건설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종교적인 여리고를 건설하면 저주다. 이게 보이느냐? 그러나 사람을 낚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이 되는 거다.

 

율법사는 자기 앞의 영생이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있다. 이 율법사는 성경 학박사이면서도 세상 여리고로 내려가는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강도를 당한 것인데, 여리고로 내려가는 그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누구를 돕겠다는 것이냐? 내려가는 정신을 가졌는데 어떻게 사람을 깨닫게 해서 올리겠다는 거냐? 그건 불가능한 거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오늘날 교회에서 일반 사회 봉사활동에 강조를 많이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 선택을 해야 한다. 무슨 선택이냐? 사마리아인처럼 봉사를 선택이냐, 아니면 신앙노선을 선택이냐?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글자 그대로 “‘나는 사회에 나가서 봉사를 하련다하는 게 선한 사람이다. 이게 상급이 많다하는 그걸 선택을 하겠느냐, 아니면 네가 어떤 정신과 신앙사상을 가졌는지? 내려가는 건지, 올라가는 건지?’ 하는 신앙노선을 선택을 해야 되겠느냐? 네가 어느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네가 당하는 거다. 신앙은 현실이다. 공들이며 자기감정대로 하는 게 아니라 신앙은 자기 현실에서 돼 나가는 것이다.

 

자기의 신앙노선 선택을 정확히 가져야 한다. 무슨 말이냐? 율법사 대제사장 서기관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의가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듯이 예수를 믿으면서 왜 저주받은 정신으로 내려가고 왜 저주 받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을 것이냐?

 

우리가 다 교회인데 이 교회가 본문을 잘못 깨달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강도는 세상 일반적으로 보는 나쁜 사람으로 보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은 세상을 위해 사회봉사를 하는 교회로 보게 된다. 그렇게 갖고 있는 신앙정신이 얼마나 많으냐? 한참 잘못된 거다.

 

3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길에서 누가 예수님을 영접을 했느냐? 마르다다.

 

올라가는 여행길에서 만나는 것과, 내려가는 여행길에서 만나는 것은 다르다. 성경에도 예수님이 올라가시는 길에서 만나는 성도가 있고, 예수님이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는 성도도 있다. 그것도 보고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자기를 만날는지? 즉 자기의 신앙상태가 올라가는 길목에 서 있는 건지, 아니면 내려가는 길목에 자기가 서 있는 건지? 그 신앙상태가 다른 거다. 그 만남은 다른 것이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을 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에 들어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 참 아름답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좋은 분인 줄을 알고 식사대접을 하려고 자기 집으로 영접을 한 것이다.

 

당시에 사회적 종교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보면 바리새인의 집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식사를 함께 합시다했는데 그 식사자리에 여자가 나타나서 자기의 머리를 풀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등을 씻기고 했으니 예수님께서 언제 식사를 했을까? 아마 식사를 안 한 듯하다.

 

죄인 여자가 나타나서 그렇게 할 때 바리새인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하는 장면이 벌어졌는데, 모르긴 해도 그 때 바리새인이 되게 기분이 나빠서 떨떠름했을 것이다. 그래서 식사자리에서 예수님께 물이나 갖다 드렸을까?

 

지금도 다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예수님을 영접하는 가정이 따로 있고, 개인이 따로 있다. 진리를 자기 가정으로 모셔 들이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개인적으로 진리를 영접하는 개인이 있고, 개인은 예수님을 모셔 들였으나 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정도 있다.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예배당에 그냥 앉아주는 교인이 있고, 말씀을 영접하는 교인이 있고, 말씀을 자기 자체화 시키는 교인이 있고, 예배시간이 지겨운 교인도 있을 수 있다. 여러 층층이다. 예수 믿는 종교인은 많지만 신앙 믿음이 하나님의 진리본질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다.

 

39-40: 마르다가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예수님을 영접을 했는데 마르다는 부엌에서 혼자 식사준비를 하고 있고 그의 동생 마리아는 식사준비를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의 발밑에서 말씀을 듣고 있다. 그래서 마르다의 속을 보면 뭐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다. ‘내가 지금 얼마나 바쁜 줄을 예수님께서 잘 아실 텐데 왜 마리아에게 아무 말도 안 하실까?’ 하면서 속에서 뭐가 끓어오른다.

 

교회에서도 보면 목사님이 저런 상태를 분명히 아실 텐데 왜 목사님이 가서 얘기를 하지 않는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가만 보면 교인들이 목사님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이렇게 해 주면 좋을 텐데. 목사님이 한 마디만 해 주시면 좋을 텐데 왜 안 해 주실까?’ 하면서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 말이다.

 

마르다가 부엌에서 여러 가지를 준비하는 듯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가서 언니 좀 도와줘라하고 한 마디쯤 해주면 좋을 텐데 그게 아쉽다. 그러니 마르다는 부엌에서 혼자 바쁘다. 예수님이 그 장면을 모르시겠느냐?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했다. 이건 은근히 예수님을 책망하는 소리가 된다.

 

마르다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예수님께서 척 알아서 마르다의 입장에 서서 좀 움직여줬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예수님과 마리아가 마늘도 같이 까주면서 얘기를 할 수도 있는 건데, 그래서 다 같이 음식을 먹고 다 같이 말씀을 들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지를 않으니 마르다는 참 못마땅하다. 그러니 왈그락 달그락 부엌에서 난리가 난다. 마르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음식을 하면 제 맛이 나올까?

 

이런 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건데, 마르다가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을 영접을 했고, 그리고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 식사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마르다의 스케줄에 누가 들어 있느냐? 예수님이 들어 있다. 마르다 자기의 계획의 틀에, 주관성에 예수님이 딱 들어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볼 때는 어떻게 보이느냐? 마르다 한 인간의 스케줄에 예수님이 들어 있는 건지, 예수님의 스케줄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들어 있는 건지?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교인의 집에 점심식사를 하러 들어갔는데, 그러면 바리새교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에 자기가 예수님을 대접을 하기 때문에 자기의 스케줄에 예수님이 들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그러나 실은 이게 누구의 스케줄에 들어 있는 거냐? 예수님. 이걸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스케줄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구원계획의 큰 스케줄에 바리새인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걸 봐야 한다.

 

그러니까 마르다의 하루의 스케줄에 예수님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루의 구원의 일과에 마르다가 들어 있고, 마리아가 들어 있고, 깨닫는 전체 일류가 다 들어 있는 거다. 이게 보이느냐? 예수님께서 이 지구 땅에 오심도, 마르다의 고을에 오심도,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심도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스케줄에 다 들어 있는 거다. 그걸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줄 알아야 만이 현실에서 그 집에 교인이 아무리 많아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르는 성도가 그 가정에서 주격이 되는 거고, 한 가정에서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다고 할지라도 어린아이가 그 신앙정신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위해서 그 가정을 돌리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의 중심점, 세계적인 역사에 누가 주격이고 주인이냐?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는데 누구를 위해서 세계를 돌리느냐? 어느 교회를 위해서 전체 세계를 다 돌리느냐? 그 주격이 있는 거다. 그걸 봐야 한다. 이걸 알면 긍지를 가질 수 있다. 이게 대단한 신앙정신이다. 누구의 스케줄에 들어 있느냐?

 

창조로 들어가서 볼 때도 세상의 주인이 누구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으나 누구에게 다스리라고 했느냐? 아담이라는 사람이다. 세상의 주인은 바로 아담이다. 우리가 볼 때 그 때 생명과를 따먹었으면 온 지구 땅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게 된다. 마음대로 쓰고 다스리고 활용하고 통치하고 지배하게 된다.

 

지금도 그 원리대로 보면 많은 교회가 있어도 진리주격으로 된 그 교인 그 교회가 이 시대의 주인이요 주격이다. 아무리 규모가 작고 사람이 적고 믿음이 남 보기 어떻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그런 교인을 주격을 하고 온 세상을 돌린다. 우리는 그냥 살면 안 된다. 알고 모르고 하는 거기에는 하늘과 땅 차이의 긍지가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걸 볼 수가 있는 거다.

 

식당에서 손님을 영접했으면 손님이 주격이냐, 식당주인이 주격이냐? 음식주문은 누가 하느냐? 손님이다. 손님이 음식을 주문하면 주인은 하고 시중을 든다. 그와 같은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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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9 에스겔 주권을 인정하는 삶 겔13:1-23  최장환 목사  2013-03-06 3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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