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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신앙 넘어서기

이사야 김기석 목사............... 조회 수 352 추천 수 0 2021.10.08 18: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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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29:13-14 
설교자 : 김기석 목사 
참고 : 2021/01/10 청파감리교회 http://www.chungpa.or.kr 

앵무새 신앙 넘어서기
사 29:13-14
(2021/01/10, 주현 후 제1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한 번 놀랍고 기이한 일로 이 백성을 놀라게 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서 지혜가 없어지고, 총명한 사람들에게서 총명이 사라질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소한 추위가 혹독합니다. 추위 가운데서 살아가는 에너지 빈곤층과 이 엄동설한에 바깥에서 일해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인간의 현실이 참 드라마틱합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자꾸 벌어집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의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전 세계인들이 경악했습니다. 민주주의의 모델처럼 여겨지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습니다. 담장을 뛰어넘고, 남부군 기가 나부끼고, 퍼포먼스이긴 하지만 반역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며 교수대까지 설치했습니다. 의사당 집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고, 하원의장의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가 구원하신다’라는 글을 적은 깃발도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지만 누군가를 우상시하고 경배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정현종 시인의 ‘우상화는 죽음이니’라는 시가 자꾸 떠오릅니다. “그저 좋아하고 그저/사랑하고 사뭇/찬탄은 하리로되/神格은 우습지.” 시인은 창밖으로 지나가고 있는 한 아가씨가 루즈를 바르는 모습을 보며 “그렇지, 루즈 바르는 취미 같은 게/백 배 천 배 낫지, 심심함을 섬기는 게 낫지”라고 노래합니다. 세상에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의 씨앗을 심고 그것에 물을 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담을 만들어 사람들이 소통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건 물론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혼돈 속에 있습니다. 여전히 어둠이 깊습니다.

16개월을 살다 세상을 떠난 정인이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우리의 고백을 무색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독교 신자를 자처하는 양부모에 의해 그 연약한 생명에 가해진 폭력은 가히 악마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믿는 이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믿는 이는 그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스스로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지 않는 이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외양은 갖췄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리고, 소외시키고, 헐뜯고, 생명을 위축시키는 이들은 천하에 없는 말을 하여도 무신론자들입니다. 이화대학교의 박경미 교수는 그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예수가 빠진 대신 종교 냄새가 너무 난다. 원래 냄새는 뭐든 상할 때 많이 나는 법이다. 열심은 열심인데 너무 냄새나는 신앙이고, 자기 냄새에 자기가 도취해있어서 남들이 자기한테서 무슨 냄새를 맡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종교 냄새가 난다는 것은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자기를 표현하지 못하는 종교라는 뜻도 되고, 일상의 삶 속에서 생활화된 종교가 아니라는 뜻도 된다. 그저 교회 안에만 갇혀있는 교리적인 종교이고, 틀에 박힌 종교라는 뜻이다. 이런 종교는 교회 밖의 세상에 대해 설득력이 없다. 교회 안에서는 열심이지만 일단 교회 밖 넓은 세상에 나오면 마치 외국어로 말하는 사람들처럼 소통이 안 된다.“(박경미,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 녹색평론사, p.248)

일상의 삶 속에서 생활화 되지 못한 신앙이 문제입니다. 이청준 선생의 소설 제목처럼 ‘당신들의 천국’에 머무는 이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대애쓰 엘로힘(da‘ath Elohim)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과의 감정적 일치, 즉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바를 예민하게 느끼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애쓰‘의 상실이 바로 타락입니다.

∙몰락의 전조
오늘 우리의 길잡이는 이사야입니다. 주전 8세기 앗시리아가 중근동 세계를 유린할 때가 배경입니다. 본문 말씀은 ‘너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단락의 일부입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화로다‘로 함축성 있게 번역했습니다. 28장부터 31장까지, 그리고 33장에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이 단락은 히스기야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하스에 이어 왕이 된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에 굴복했던 아버지와 달리 앗시리아의 굴레를 벗어버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하스는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반앗시리아 동맹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유다를 침공하자 앗시리아 임금 디글랏빌레셀에게 구원을 청했습니다. 아하스는 앗시리아 임금의 신하를 자처하며 주님의 성전과 왕국의 보물 창고에 있는 금과 은을 모두 꺼내어 그에게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 청을 받아들인 디글랏빌레셀이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그를 만나러 다마스쿠스에 갔다가 그곳에 있는 제단의 모형과 도본을 세밀하게 그려서 우리야 제사장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전례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지만 예언자들은 맹렬하게 그 조치를 비판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아하스 때 더러워진 성전과 기물들을 보수하고 깨끗하게 하면서 앗시리아의 흔적을 지우려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가들은 이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앗시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나라의 위기를 외부의 힘을 끌어들여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는 중근동 지역의 권력 지형도를 예민하게 관찰하는 정치가임이 분명합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장의 정치적인 올바른 선택보다 더 근본적인 현명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세 판단에는 하나님의 뜻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지근거리에서 그를 보좌해야 했던 예언자들과 제사장들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이 독주와 포도주에 취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먹은 것을 토해 내는 것처럼 더럽고 추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사야의 말을 경청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웃고 조롱하며 따돌리려 했습니다. 참의 소리는 다수의 악다구니와 고함 속에 묻혀 들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가끔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무기력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가치가 흉용한 물결처럼 삼킬 듯 사람들을 엄습하는데 내가 전하는 메시지는 거의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바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붙들고 그 큰 파도를 견뎌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 다시 용기를 내곤 합니다. 이사야도 암울한 현실에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제사장들이 나에게 빈정거린다. ‘저 자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가? 저 자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젖뗀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 젖을 먹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하여라.“(사28:9)

진리의 가장 큰 적은 진리를 전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사야의 말을 가로막고, 조롱하고, 우스갯소리로 만들려 했습니다.

∙경고의 나팔은 이미 울렸다
경고의 나팔이 이미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나팔 소리에 반응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뭔가에 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불이 났다는 외침이 들려오는 데도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오락 프로그램을 보느라 바깥을 내다보지 않는 격입니다. 이사야는 스스로 본다고 하는 이들이 사실은 보지 못하고,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하여 비틀거리는 현실을 망연자실하여 바라봅니다. 잠드는 영(spirit of deep sleep)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드는’이라고 번역된 태르디마(tardemah)는 일종의 혼수상태(trance)를 이르는 말입니다. 뭔가에 탐닉하느라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된 상태입니다. 자기 이익을 확보하고,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할 뿐, 다른 이들의 아픔 따위는 가볍게 외면하는 이들이야말로 깊은 잠에 빠진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혼곤한 잠에 빠진 그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예언자들의 역할입니다. 예언자들을 가리켜 ‘인간의 양심을 습격하는 자’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문제는 예언자들도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묵시를 깨닫지도 못하고, 하늘의 기미를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영적인 예민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이들입니다. 오직 한 사람, 이사야만이 자기 시대의 위기를 꿰뚫어 봤습니다. ‘위기‘라 할 때 ‘機‘는 베틀과 같은 기계를 이르는 말이지만 애초에는 일종의 격발장치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기’란 그러니까 이것과 저것이 나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바로 그 때를 알아차려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 했을 때 주님은 탄식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16:2-3)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은 책망입니다. 실력 없는 의사가 죄인인 것처럼,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줄 모르는 지도자 역시 죄인입니다. 세상에 모르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뻐기면서도 자기 영혼의 남루함을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기 속을 살피지 않는 이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
유다가 의지해야 할 것은 애굽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처럼, 이익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순간 세상은 각자도생의 살벌한 전장이 됩니다. 애굽을 의지하는 것은 부러진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그들은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그것은 시대가 변해도, 사람이 달라져도 훼손되어서는 안 될 가치입니다. 이사야는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사29:13)

입으로는 가까이 하지만 마음으로는 멀리 한다는 것, 이것처럼 슬픈 현실이 또 있을까요? 어떤 이는 종교를 가리켜 ‘허위의식’이라 했습니다. 종교가 단지 우리를 그럴싸하게 장식하기 위한 포장지라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 그 허위의식이 포장지에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일에까지 나서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그게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에 빠지는 순간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가 없어지고 총명한 사람의 총명 또한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 혹은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레미야는 그 질문에 적확한 대답을 줍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렘22:16)

사회적 약자들의 사정을 잘 헤아리는 것, 그리고 그들이 더 이상 불행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9:13)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 없는 신앙은 형용 모순에 불과합니다. 다른 이들을 학대하고, 냉소하고, 조롱하고, 혐오하고, 위험에 빠뜨리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특별한 계시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지미무미至味無味라 했습니다. 지극한 맛은 아무 맛도 없다는 뜻입니다. 채근담에는 참맛은 담백할 뿐이고, 지극한 사람은 다만 평범할 뿐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요란 떨지 않으면서도 주변에 있는 사람을 알뜰히 챙기고 보살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 대애쓰 엘로힘에 접속된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남에게 들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그게 자기 믿음인 줄 아는 이들이 참 딱합니다. 종교 냄새는 풍기지만 예수의 향기는 나지 않는 이들은 불행합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했습니다. 이 엄혹한 시대에 사랑과 평화, 따뜻함과 친절함, 연대와 환대의 열매를 많이 맺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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