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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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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1장 3절-4절: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3절: 하루 세 끼의 양식을 잘 찾아먹으면 배가 안 고프다. 또 하루 세 끼를 먹기는 먹는데 영양가가 있는 것을 먹으면 힘이 더 나지만 먹는 음식이 영양가가 없으면 사람이 힘을 못 쓴다. 건강하지 못하고, 힘을 쓰게 되면 빨리 피곤해진다.
그런 것처럼 교회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도 영양가가 있는,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생명이 전혀 없는 것을 전해주는 말씀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하나님의 진리진실의 종은 생명과를 먹이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먹이는데 거짓된 종은 성경을 읽어놓고 세상에 속한 것을 준다. 이건 일용할 양식이 아니다.
그냥 들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치가 열리고, 하나님의 정신과 마음과 속성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소원 목적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을 잘 배우는 거다.
예수님의 정신과 마음을 잘 배우면 하나님으로 닮아진다.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하신다고 했으니까 주님이 보내신 종이라면 역시 천국복음을 전해야 한다. 천국복음을 전하면 듣는 사람은 그 말씀을 귀로 먹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세상을 자랑한 것처럼(마4:) 세상을 자랑하고, 그 세상을 소원 목적으로 품고 예수님에게 이뤄달라고 하면 그것은 생명의 양식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독극물이다. 그런 걸 먹으면 신앙 믿음이 자라지를 못한다. 그러면 말씀의 깨달음이 없고 자기 속에 하나님의 나라는커녕 마귀의 집이 되고 만다. 무조건 교회 다닌다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거짓 종들 많이 나온다’고 했고, 또 ‘믿음을 보겠느냐’ 했으니까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아닌 가르침이 많구나’ 하는 것을 생각을 하고 우리교회의 이 말씀도 받든지 말든지 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이면 받고, 아니면 받지 말고.
그러니까 믿는다고 할 때는 생명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가야 산다. 교회를 그렇게 다녀야지 무턱대로 나간다거나, 어릴 때부터 다녔기 때문에 나간다거나, 그 교회에 아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나간다거나, 그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계속 거기로 나간다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안 통한다. 인간들 앞에서는 그런 말이 통할 런지 모르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안 통한다. 심판으로 들어가 버린다.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새사람과 옛사람의 성분이 있으니 옳은 말씀을 받아서 깨달음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은 새사람이고, 또 그 마음이 식어지면서 세상 쪽으로 생각을 품게 되는데 이건 옛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늘 옛사람의 생각을 품고 있으면 이질적인 교회나 세상 사람들에게 흡수되기가 쉽다. 그렇게 되면 설령 하나님의 옳은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자기의 신앙 믿음의 성장은 굉장히 느리다. 교인들이 자기 속에 그런 두 가지 정신이 들어 있는데 새사람을 쫓아 살지를 않고 이 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 너는 그만큼 느리다. 자라는데 지장이 있다.
이런 사람은 세상바람이 불면 세상 쪽으로 휩쓸려 갈 가능성이 많다. 왜 그런가 하니 파도가 치면 동산으로 올라가야지 물결이 찰랑거리는 바닷가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물에 잠기기 쉬운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기가 예수 믿는 정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기어 올라가고 있는 건지, 내려가고 있는 건지, 옆으로 가고 있는 건지, 꺾어져 가고 있는 건지 그런 걸 얘기해 주면 올라가든지 내려가든지 죽든지 살든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 억지로 하면 안 된다.
옛사람 주격으로 살고 있을 때 세상 속화된 사단 마귀의 종을 만난다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구원은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이룰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걸 아느냐, 모르느냐?
네가 현재 예수를 믿고 존재하고 있는 것은 ‘너를 만들기 전에 영원 전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처럼 만들어지고 신령천국에서 주님처럼 누림이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너를 만들었다’ 하는 그 면이 있기 때문인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옛사람 주격으로 살면 그것이 통째로 날아간다. 이걸 생각하면 어떻게 잠이 오겠느냐? 자기가 평생 동안 세상에서 재물을 모았는데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면 잠이 오겠느냐? 세상일도 그런 건데 영원 궁극적 구원이 자기로부터 통째로 날아가 버리면 인간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처럼 되는 것인데 그래도 잠이 오겠느냐?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미래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를 왜 믿는 거냐? 신령천국에서의 자기의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을 바에야 영능의 실력을 닦아야 한다. 인간존재 자체가 영능의 실력으로 들어있는 건데 그게 안 믿어지고 안 깨달아진다면 세상에서 사는 것도 실력이 없으면 못 산다. 뭐든지 실력이 있어야 살더라. 그런 것을 보고라도 깨달아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고,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살고, 구더기는 죽은 것을 먹고 살고, 돼지는 놀고 먹는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무슨 양식을 먹느냐? 생명의 양식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는다. 영의 눈으로 볼 때 타락된 안 믿는 인간은 물질 소원 목적 그 정신을 배우고 먹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있는 성도 인간은 진리생명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이뤄져 간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지식의 성경 해석자들은 본문의 일용할 양식을 세상 일반적으로 하루 세 끼 먹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목사가 그렇게 해석을 한다면 그 성경구절을 들고 안 믿는 사람에게 해석을 하란다면 그 목사와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믿는 사람의 생각과 안 믿는 사람의 생각이 똑같은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영을 위해 준 것이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는 영 위주로 해석을 해야 옳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육의 양식을 하루 세 끼를 먹듯이 우리가 날마다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 육신의 일용할 양식을 안 구하면 하루 세 끼를 못 먹느냐? 짐승과 벌레들은 자기만 부지런하면 하루 세끼만을 먹는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하늘의 양식을 말씀하시는 건데 일용할 양식을 이 세상에 있는 물질양식으로 말해버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아라. 그거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신없는 말씀이 되고 만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치가 안 맞는다. 예수님은 그런 분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양식을 먹으시는데 어떤 양식이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당신의 양식이라고 했다. 다윗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자기의 양식이라고 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기는 어떤 양식을 자기의 양식이라고 생각을 하느냐? 자기도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느냐?
그렇다면 육의 양식을 하루 세 끼를 먹듯이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느냐? 안 읽지? 그러면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성경을 읽느냐? 안 읽지? 그러면 저녁을 먹고 난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느냐? 안 읽지? 안 읽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양식이라는 게 거짓말이 돼버린다. 이 얘기는 늘 하나님 말씀의 위주의 생활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육신의 양식을 매일 먹어야 육신이 힘을 얻듯이 그 날 그 날 이룰구원을 이루려면 그 날 그 날에 주어지는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된다. 그래서 이 이룰구원을 놓고 그 일이 잘 되도록 영의 양식을 공급을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한 날 한 날의 구원의 일이 잘 되려면 성령님의 역사로 깨닫게 해 주셔야 만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가 병행해서 같이 들어 있는 거다. 그래야 자기의 구원이 잘 된다.
일반사람들은 육의 양식을 먹고 일반 일이 잘 되는 것이 소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의 일, 구원의 일이 잘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러면 영의 일이 잘 되면 육의 일은 안 되는 것이냐? 그건 해석을 그렇게 붙이는 게 아니다. 또 육의 일이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건 위주와 목적이 달라진 것이다.
4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를 잘 해 주느냐? 자기에게 원수가 있느냐? ‘우리’가 무엇이냐? ‘우리’가 있고, ‘너희’가 있고, ‘저희’가 있다. ‘우리 편’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가라, 너는 저 편이다’ 하는 것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 편, 저 편’이 있다. ‘우리’가 무엇이냐? 인간이라는 점에서 세상 인간 모두는 ‘우리 인간들’이다. ‘우리’라는 인간이다 세상 모든 인간은 나와 같은 다 ‘우리 인간’이다 그 말이다.
사람 속에 돼지가 한 마리 숨어서 들어왔다고 하면 그건 ‘우리’가 아니다. 돼지는 인간이 아니다. 사람마다 ‘우리나라’라고 하는데, 대한민국 사람이 있고, 중국사람이 있고, 미국사람이 있고, 일본사람이 있을 때 한국사람만이 ‘우리’다.
앞에서는 인간이라는 면에서 다 같은 ‘인간 우리’이고, 그 다음에 조금 분리를 하니 같은 나라 사람끼리 ‘우리’, 그리고 같은 업종의 사람들끼리 ‘우리’, 그러니까 배추장사들끼리 ‘우리’가 있다. 그래서 배추장사들끼리 ‘우리 어느 밭에 가자’ 하면 그들끼리는 척 알아듣는다. 배추장사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우리 밭에 가자 하면’ 이들끼리는 안 통한다. 생선장사들끼리 ‘우리’, 기독교인들끼리 ‘우리’, 이방인들끼리 ‘우리’, 장로교인들끼리 ‘우리’, 성결교인들끼리 ‘우리’, 천주교인들끼리 ‘우리’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중심이 된 ‘우리’냐?
주일날 낚싯대를 들고 ‘야, 우리 모여서 고기 낚으러 가자’ 하면 뭐가 중심이 된 것이냐? 낚시다. 조기축구는 축구공이 중심이 돼 있다. 그 중심으로 된 ‘우리’가 있고, 야구공이 중심이 된 ‘우리’가 있고.
성경본문의 ‘우리’는 무엇이 중심이 된 ‘우리’냐? 예수 믿는 교회가 각 교회마다 무엇이 중심이 된 교회이고, 그 교인들의 ‘우리’냐? 우리 집은 무엇이 중심이 된 ‘우리’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우리’, 이 ‘우리’는 기본구원을 얻은 우리다. 그 다음에 진리 생명적 노선으로 가는 ‘우리’. 즉 진리 생명 길 좁은 길로 가는 ‘우리’가 있다.
기본구원을 얻은 ‘우리’가 있고, 이룰구원의 길을 가는 ‘우리’가 있는데, 이룰구원은 진리 생명 길 좁은 길로 가야 이룰구원이 된다. 넓은 길 사망 길로 가면 이룰구원은 안 된다. 말하자면 말은 예수중심이라고 하는데 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세상으로 위주가 돼 있고 목적이 그렇게 돼 있으면 그거는 예수중심이 된 ‘우리’가 아니라 거짓 사단 마귀가 중심이 된 즉, 세상이 중심이 된, 종교적인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그 세상이 중심이 된 ‘우리’다. 겉으로는 십자가 매달고 교회간판을 붙여도 그거는 예수님의 ‘우리’가 아니다.
기본구원을 얻은 ‘우리’이고, 또한 진리 생명적 노선으로 가는 ‘우리’라면 이 우리끼리 너와 나와의 사이에서 용서 못할 일이 무엇이냐? 나는 일만 달란트 즉, 무한한 죄를 용서받았다. 그렇다면 백 달란트 즉, 상대의 지극히 작은 죄를 용서 못할 하등의 이유가 있는가? 모든 죄를 용서받은 내가 작은 죄를 지은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생명과는 따먹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인간이 그 명령에 불순종을 했는데 하나님의 명령적 계명에 대해 불순종으로 들어간 것을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시든 형벌을 하시던 그 면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한이지만, 때리고 안 때리고 없애버리고 죽이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지이지만 교회에서의 교훈은 책망이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으면 칭찬할 일은 아니다 그 말이다. 여기는 책망이 들어간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용서해 주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의 소관이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소관은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죄는 이방인들이 터치할 소관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죄는 원래 하나님 앞에서 정죄가 되든지 하는 거지 일반인들은 선악과 따먹고 사망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 논할 자격도 없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이치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세상 일반법을 더 크게 보고 세상에게 잘 보이려고 하나님 앞에서 연상 죄를 짓고 들어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바로 못 보니 우리끼리 용서가 안 되어서 싸움이 벌어지고, 그러니 그것이 이방 불신자들에게로 소문이 나가서 그들이 교회를 얼마나 흉을 보고 흠을 잡겠느냐? 그러니 교회의 얼굴이 뭐가 되겠느냐? 그래서 우리가 비록 교단 교파는 다르고 주장은 다르다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 ‘사람을 죽였다느니, 사기를 쳤다느니’ 하는 소리가 일반방송에서 들리면 교인들의 얼굴이 뜨끈뜨끈해지는 거다.
개인적 신앙으로 보면 나는 그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안 믿는 사람들이 싸잡아서 말을 하는 거기에 예수 믿는 나도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교파 교단은 논할 게 없으나 주님의 얼굴이 있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용서를 못하고 용서가 안 돼서 시험거리가 되느냐? 우리 예수 믿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교회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잘못되면 전체성이 들어간다. 연대감이 있다. 군대에서 하나가 잘못하면 다 죽을 수가 있다. 단체기합은 그 면에서 이유가 있는 거다. 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얻어맞는구나’ 하게 된다.
바느질을 하다가 손톱 밑을 쑤시면 거기만 아프냐? 온 몸이 우지끈 와지끈 한다. 다 같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좋은 뜻으로 교회는 연대감이 들어있는 건데 자기 개인적으로 독단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덕이 안 되고 은혜가 안 된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런 데까지 생각을 잘 못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왜 시험에 드느냐? 알지 못해서, 어리석어서, 교만해서, 자기 성격 성질 때문에 시험에 들고, 비진리적 사망적인 기준으로 살기 때문에 시험에 들고, 진리생명의 이치를 먹지 못해서 시험에 들고.
일반사람들의 성품이나 소원 목적적인 상태는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상태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학문이 높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세상학문을 많이 배웠어도 멸망에 처해지는 자기 인격의 상태를 모른다. 세상공부를 많이 한다고 이걸 가르쳐 주느냐?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걸 가르쳐 주신다.
사람이 망하는 걸 알아야 한다. 돈은 많이 벌어도 세상성공은 해도 사람이 인격 면에서 망하는 걸 볼 줄 아느냐? 이걸 볼 줄 아는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적 종이 어디서 나타날 런지? 사람 속에 들어있는 자기의 인격 상태를 바르게 깨닫게 해서 하나님 앞에 밀착시키는 시대적 종이 필요하다.
생명적 이치의 말씀을 먹지 못하면 지각이 어둡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얘기다. 알고 보면 그 자체가 스스로 자기에게 시험이 걸려있는 상태다. 알지 못하는 상태인데 여기에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건까지 덮치면 설상가상이 된다. 이러면 반드시 남 탓이 나오고, 원망불평이 나오고, 자기 팔자타령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의 낮은 차원을 하나님 앞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죽은 자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듯이 못 느낀다. 이런 사람은 외부의 환경의 소산으로 울고 웃게 된다. 환경이 ‘웃으라’ 하면 웃고, 환경이 ‘울라’ 하면 우는 환경에 피동 되는 사람이다. 환경에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에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을 하라’는 것은 환경의 소산으로 살지 말고 환경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생명과를 먹으면 힘을 얻어서 다스리게 된다. 환경을 다스린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게 실력자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법을 가지고 다스리는 게 아니다. 사람을 기준적인 사람, 법의 사람으로 만들면 그 사람의 언행심사 모든 활동은 죄에 걸리지를 않는다. 의롭다 그 말이다. 법망을 피해간다는 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뜻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는 말이다.
법 아래의 사람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과 인격으로 자체화 되었다는 것은 이 예수님이 사람의 기준이라는 말이다. 말씀의 기준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언행심사는 구원으로 다 통과가 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외부의 환경의 소산으로 믿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까? 진리이치를 가지고 이치의 사람이 돼서 강한 정신을 가지고 세상과 죄를 정복해야 한다. 정복을 하는 거기에는 목숨을 거는 것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 번 죽는다. 뭐가 겁이 나느냐? 특히 여자 분들이 예수 바로 믿고 바른 지식이 들어가서 바른 살림을 살고 남편과 바른 관계를 가지면 못 할 게 뭐냐? 아닌 말로 살림 잘 살지, 지혜롭지 하면 어느 남편이 그런 여자를 쫓아내겠느냐? 그런 사람이 돼서 확 잡아야 한다. 남자는 거기에 잡히는 게 옳은 거다.
믿음 없는 남편에게 잘못된 미끼는 주지 말아야 한다. 온 집안 식구들에게, 특히 안 믿는 사람들에게 미끼는 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옳은 것에는 명령을 해도 된다. 그게 사람이 규모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용기도 용기지만 제일 먼저 본인이 문제다. 본인의 성격 성질 마음 그것부터 고쳐라. 말하자면 급할 때는 뛰어야 한다. 버스 정류장에 차가 올 때는 그 차를 타려고 막 뛰면서 예수 믿는 데는 왜 그렇게 느려 터진 거냐?
우리는 환경의 소산이 되면 안 된다. 남이 볼 때는 환경 속에서 사는 것 같으나 나는 그 환경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 이러면 그 나쁜 환경이 자기 속에 정복이 안 된다.
본문은 ‘시험이 없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있지만 그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넘어지지 않게, 이기게 해 달라는 것이다. 세상이란 곳은 비바람이 부는 곳이다. 비바람이 불면 파도도 친다. 세상은 성도들의 영능의 실력을 키우는 훈련 연단의 장소다. 따라서 세상 어디를 가도 곳곳에 시험이 없는 곳은 없다. 시험이 없는 곳이 있다면 신령천국밖에 없다. 시험이 있는 이 세상에 살면서 시험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진리생명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양식으로 삼고, 자기의 주식 참 양식으로 삼고 영적인 기능과 지능적인 실력을 키워야 한다. 예수 믿는 건 먹으면 들으면 커진다. 양식을 먹는데 왜 힘이 안 오르랴.
그리고 성도들끼리 용서할 줄을 모르거나 용서를 빌 줄을 모르면 양쪽 다 시험에 걸려서 넘어져 있다.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도움은 없다. 자기 잘못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고 멋있는 사람이다.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좁은 사람이다. 잘못이 있으면 용서를 비는 것이 바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희망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튕겨져 나간다. 개인끼리 싸워도 그렇고, 목사에게 마음이 안 맞으면 튕겨져 나간다. 특히 목사는 개인감정이 들어가면 안 된다. 교회를 위해서,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들어가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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