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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2: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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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41310 |
예수 십자가와 세계 평화
엡 2:11~22, 성령강림 후 8주, 2021년 7월18일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아시아와 유럽의 통로인 터키를 방문하고 싶다고 일전에 한 번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 그 이유는 그곳이 바울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의 주요 활동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그곳에 있습니다. 바울은 터키 건너편 그리스 지역에도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교회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지리적 특징을 알고 싶으면 에게해 오른편의 터키와 왼편의 그리스를 가야 하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올라선 시대를 느껴보려면 로마에 가고, 그 이후 중세기까지의 기독교 역사를 알려면 유럽 곳곳을 가야겠지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시에 2년간 머물면서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일이 여의치 않게 되자 나중에 두란노 서원에서 강의를 이어갑니다. 자세한 내용은 행 19장에 나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된 이유는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고대 7대 유적에 속하는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에 얽힌 소동입니다. 바울로 인해서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사업에 지장이 생기자 그 기업주가 에베소 주민들을 선동해서 바울 일행을 고발한 사건입니다. 에베소 주민들은 대규모 시위에 동원됩니다. 그들은 두 시간이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를 외쳤다고 합니다. 유럽 프로 축구 경기장의 열기와 비슷할 겁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그리스 북쪽 지역인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우리의 평화
훗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벌어진 문제의 하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갈등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으나 당시에는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당시 전체 교회에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별로 친하지 않습니다. 무관심하거나 간혹 적대시하기도 합니다.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 교회인데도 냉기류가 흐릅니다. 바울 당시에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 사이에 이런 냉기류가 흘렀습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양쪽 대표자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그들의 인격과 도덕심에 호소해도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근본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행동을 바꾸기 힘듭니다. 바울은 이 문제의 해결책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찾았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려는 목적보다는 이 기회에 신앙의 본질을 에베소 교인들에게 전하려는 목적이 더 컸을지 모릅니다. 엡 2:1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라고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화평’은 ‘? ε?ρ?νη ?μ?ν’의 번역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에이레네를 평화, 화평, 평안 등등, 다르게 번역했는데, KJV(our peace)이나 루터 성경(unser Friede)은 모두 평화라는 하나의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로마 제국 아래서 교회는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에 맞서 ‘그리스도의 평화’(팍스 크리스티)를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요? 예수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지 2천 년이 지났는데도 세계 평화는 요원합니다. 우리 개인 기독교인도 여전히 평화롭게 살지 못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것보다는 차라리 동양 종교에서 강조하는 마음공부가 더 효과적이라거나, 먹고사는 걱정이나 하지 않도록 돈이나 많이 버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예수가 우리와 세계의 평화라고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판단해보십시오.
예수 십자가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 사이를 ‘원수로 만드는’ 어떤 담이 있습니다. 14절과 16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여기서 ‘원수로 만드는’(?χθραν, 에키드란)은 적대감(hostility)을 가리킵니다. 그 적대감은 15절이 말하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입니다. 그 율법은 토라와 할례를 가리킵니다. 유대계 기독교는 이방인 기독교인들도 최소한 토라와 할례는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방 기독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비교해서 하나의 예를 든다면 ‘국가보안법’입니다. 한쪽은 남북분단 체제 아래서는 그게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이제 남북분단 이후를 준비할 때가 되었으니,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악용되는 일이 많았으니 폐기하자고 주장합니다. 국가보안법 자체가 궁극적인 진리가 아닌데도 이로 인해서 대한민국 국민의 생각이 분열되었습니다. 서로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평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는 바울의 말은 그의 십자가가 율법으로 인해서 벌어진 그 적대감 자체를 없앴다는 뜻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14절).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16절). 다시 위에서 예로 든 국가보안법을 여기에 대입하면 이렇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예수 십자가로 끝장났다.” 여기서 ‘원수 된 것’을 이 세상의 다른 원리나 규칙으로 바꿔도 됩니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시간당 8,720원에서 9,120원으로 5% 올랐습니다. 노동계에서는 너무 적게 올랐다고 반발하고 자영업자들을 비롯한 경영계에서는 부담이 너무 크다고 반발합니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하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저임금 문제는 예수 십자가로 완전히 해결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노동계와 경영계가 모두 만족하고 평화의 노사 관계를 예수 십자가 신앙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 상식에 따르면 말이 안 됩니다. 바울의 말을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외톨이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자기를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합니다. 자기의 기준에 들어오지 않는 어떤 대상을 부정하고 배척합니다. 이런 방식의 삶은 인격도야나 마음공부로 고치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제가 공정 화두를 자주 언급합니다. 자신의 능력만큼 대접받지 못하는 걸 불공정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토익 점수도 높고, 일류 대학교를 나왔고, 높은 점수를 받았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높은 연봉을 받는 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높은 연봉에 따라오는 높은 세율을 불만스러워합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거칠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이 나라가 나에게 도움을 준 일은 별로 없어. 내 인생의 성공은 순전히 내 노력의 결과야. 그러니 정부는 내 인생에 너무 깊숙이 간섭하지 말라고!” 자신의 성공이 자신만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아주 많은 영역에서 운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사람의 지능과 건강과 외모는 대부분 외부적 조건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스위스 사람은 이미 편안하게 살만한 조건을 갖고 태어난 것이고, 인도나 파키스탄 사람은 나쁜 조건에서 살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 교육에 열성적인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관심이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납니다. 후자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전자에 속한 사람을 따라가기 힘듭니다. 의사이자 경제학자인 홍콩 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김현철 교수가 2021.7.12.일 자 <한겨레21>에 기고한 “인생 성취의 8할은 운, 감사하고 겸손할 이유”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인데,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감사하고 겸손하게 사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돌아갑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대립과 갈등으로 가득합니다. 대립과 갈등이 무조건 나쁜 건 물론 아닙니다. 변증법적 역사 발전을 역동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문제는 파괴적인 적대감입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 관계에서 보듯이 국제 관계도 그렇고, 국내 정치와 교육계와 종교계까지 이런 적대감은 만연합니다. 다른 동물들과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주변의 모든 대상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해온 인간 조상의 유전자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요? 정말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인류가 끝장날 때까지 해결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바울은 적대감의 원인을 더 근원적인 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화가 그 원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내면의 만족감이 없으니 다른 사람과 어떻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뭔가 열정적으로 살고 있으나 생명을 얻지 못했습니다. 열정적으로 살면 살수록 생명이 더 크게 훼손됩니다. 우리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충만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생명 충만감이 없으니 세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룬다고 해도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겁니다. 16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바울이 볼 때 하나님과의 화해가 평화의 초석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니까, 생명의 근원과 화해를 이루어야만 참된 평화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바울의 진단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생명의 근원이 도대체 뭐지, 그냥 여기서 착하고 재미있게 살면 충분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시는지요.
다른 건 접어두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뚫어봐야 합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물리학자가 아는 건 바닷가 모래사장에 있는 모래 한 알에 불과합니다. 그는 문학에 관해서 미숙하고, 음악과 휴머니즘에 관해서도 미숙합니다. 자신이 전공하는 물리학에서도 사실은 우주 전체를 놓고 볼 때 어린애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살이는 없습니다. 그가 이룬 성취는 ‘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적고 작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도 생명의 작은 부분만 알고 경험할 뿐입니다. 거대한 동물의 한 가닥 털끝에서 꼼지락거리는 세균과 같기에(『소피의 세계 』 참조) 생명 완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모두가 불안하고, 쫓깁니다. 당연히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볼 때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즉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맡기는 겁니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은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합니다. 수영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물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고 몸에 힘을 주면서 웅크리는 거와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웅크린 채 하나님이 왜 평화를 허락하지 않으시냐고, 불평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죽음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다는 말은 인생(생명)이 자기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사실로 생각을 완전히 바꾼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숨을 쉴 때 공기를 자기가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주어진 공기를 마시는 거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흡 장애가 있습니다. 너무 적게 숨을 쉬거나 너무 자주 숨을 쉽니다. 자기 인생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우리에게 그런 문제를 일으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만약 그 사람의 연봉이나 사회 지위나 외모를 보는 게 아니라 그가 밤하늘을 얼마나 자주 보는지, 아이들과 얼마나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지만 보는 세상이 된다면 삶의 방식과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은 이와 비슷합니다. 자기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자기 삶을 받아들이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사실은 예수 십자가입니다. 예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한다는 바울의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생명 자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맡겼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영혼 충만하게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고 신뢰했습니다. 그 사랑과 신뢰에 근거해서 그는 당대 세상살이 규범과 달리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씨와 같았으며, 생명의 잔치와 같습니다. 삶을 왜곡하고 억압하는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생명의 궁극적인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마저 복이 있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엘리트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위선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 예수님에게서 새롭게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세상은 완전히 새로워질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모두 고향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큰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 자체였다는 사실을, 즉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충만하게 경험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어 매장되었던 예수를 지금 ‘살아있는 자’로 경험한 것입니다. 부활 경험입니다. 그 부활의 빛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려는 죽음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십자가 죽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인간의 죄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옳은 생각일까요? 기독교의 도그마에 불과할까요? 판단해보십시오. 여러분의 판단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 제가 보충하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어야 인간은 싸움을 끝냅니다.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 외의 다른 일은 사소합니다. 비유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변이와 변종으로 인류가 10년 안에 멸망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모든 싸움을 당장 멈출 것입니다. 자기를 성취해야겠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납니다. 10년 동안 서로 사랑하는 일에만 몰두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도 인생이 너무 짧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에 그는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헤 에이레네 헤몬)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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