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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5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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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42133 |
예수와 영생
요 6:52~58, 성령강림후 열두째 주일, 2021년 8월15일
먹고 사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중요합니다. 생존의 차원이니까요. 수백만 년 전 인류 조상인 유인원으로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전쟁도 대개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벌어집니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서로 다른 방식의 주장입니다. 부동산, 세대 간 갈등, 교육 문제 등등,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도 누가 더 잘 먹고 사느냐 하는 갈등에서 시작된 겁니다.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대통령이 아니라 왕으로 옹립받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 공생애 중에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당시 유대 백성들에게 매혹적으로 비쳤을 겁니다. 한 가족의 한두 끼 식사에 불과한 빵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5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거 아닙니까. 열광하는 유대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먹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오병이어나 만나가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는 음식을 먹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식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 음식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 6:51b)
예수의 살과 피
유대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자기 살을 주겠다는 말이 언어도단으로 들린 겁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b) 그들의 주장이 상식적으로 당연하지만, 언어의 깊이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겁니다. 언어에는 사실적인 언어가 있고 은유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사실 언어는 기자가 전하는 뉴스 보도입니다. 표면적으로 벌어진 현상을 보도할 뿐입니다. 성경은 은유적인 언어로 궁극적인 진리를 전합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말이 안 되나 언어의 깊이에서 본다면 진리입니다. 그 이유를 53절부터 58절까지 요한복음 기자가 설명합니다. 이 말씀에 기독교 신앙의 알맹이가 오롯이 담겨 있다고 해도 옳습니다. 우선 54절과 55절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을 겁니다. 실제로 예수의 살을 먹거나 피를 마신다고 생각할 리는 없겠지요. 박해를 받던 초기 기독교 시절에는 간혹 그런 오해도 받고 누명을 쓰기도 했나 봅니다. 성찬의식이 바로 인육을 먹는 밀의적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이와 비슷한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라고 하셨고, 포도주가 담긴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 유월절 만찬에 근거하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런 전통은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비대면 예배가 뉴노멀로 자리 잡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성찬식을 어떻게 살려낼지는 교회와 예배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숙제입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
성찬식을 통해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자신들과 함께 살았던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걷고, 그리고 화도 내고 기뻐하며 손뼉 치면서 노래했을 겁니다. 제자들과 똑같이 살이 있었고 피가 있었습니다. 귀신은 살과 피가 없겠지요. 성령도 살과 피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살과 피는 없습니다. 살과 피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 구체적인 몸으로 살았던 사람에게만 가능한 물리적 생명 현상입니다. 물론 예수의 살과 피 자체가 핵심은 아닙니다. 단백질로서의 살과 피는 잠시 그런 형태로 남아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각각의 원소로 해체됩니다. 예수의 살과 피는 예수 삶의 ‘역사적 실존’을, 즉 예수의 실제적인 삶을 가리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부정하려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에 뿌리를 둔 가현설(docetism)이 그것입니다. 가현설을 따르는 이들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 살과 피로 사신 게 아니라 그림자로 사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순수한 마음이 일단 이해는 됩니다. 예수가 우리와 똑같이 살과 피를 가진 역사적 실존 인물로 사셨다면 인간적인 한계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교부들은 예수의 인성을 올곧게 밀고 나갔습니다. ‘베레 호모’(참된 인간) 개념이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구절이 사도신경이 들어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는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살과 피가 없는 혼령이나 천사처럼 사신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으로 사셨다고 말입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이 기독교 신앙에서 왜 중요할까요? 그것보다는 예수의 가르침만 강조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불교와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역사적 싯다르타가 결정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싯다르타를 따르는 것보다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부처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교 선승들은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라.”라거나 구도의 길을 가다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매우 보편적이고 실용적이며 인간적인 종교입니다. 마음공부로서는 최선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목사의 설교보다는 승려의 설법이 더 잘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예수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겁니다. 유대인 종교학자인 엘리스 리브진의 『무엇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는가』에 예수 십자가의 역사적 실체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옵니다. 어떤 목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기독교적인 삶에 대한 이해는 깊어지는데 예수에 관한 생각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솔직한 고백이기는 하나 기독교적이지는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복음적인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대구성서아카데미> 운동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분들을 직간접으로 여럿 만났습니다. 저의 설교와 성경공부와 신학 강의를 통해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율법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겁니다. 문제는 그런 자유를 얻고 보니 굳이 교회 공동체에 속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와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 그런 분들은 일종의 가현설에 떨어진 이들입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이 우리에게 왜 결정적으로 중요할까요? 바꿔 표현하면, 우리는 왜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태어나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로마 형법인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제자들에 의해서 부활한 자로 경험된 예수를 구체적으로 따르고 믿어야 할까요? 또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나사렛 예수가 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일까요?
낮은 곳에 오신 하나님
그 답은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에 하나님이 온전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이 답입니다. 그 하나님은 곧 영생입니다. 그 영생은 육체의 죽음으로 말살되지 않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생명은 언젠가는 사멸합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사멸이 분명하다면 우아하게 살아보려는 지금의 모든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고상하게 살든 파렴치하게 살든 그 결과가 모두 사멸이라면 양쪽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삶이 끝장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지금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살자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기독교인은 죽음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사멸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에 걸맞은 인생을 살려고 오늘도 여기서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의 역사적 실존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역사적 실존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온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동의가 됩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예수가 살과 피를 가진 우리와 달리, 즉 온전한 ‘인간 되심’이 없이 온전한 신성으로만(베레 데우스) 살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아득하고 현묘하고 거룩한, 그래서 바르트 표현으로 ‘절대타자’로서만 경험되었을 겁니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인간적인 실존을 그대로 지닌 분으로서 우리와 똑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먹고 마시고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낮아지신 성육신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종종 비열하고 유치하게 사는 이 세상에서 살과 피를 지니고 살았던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의 실존에 영생이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에게서 아주 특별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57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가 얻은 생명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차원이 아닙니다. 십자가 처형은 생명의 파멸입니다. 그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생명은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가짜 생명, 또는 사이비 생명을 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설교 첫 대목에서 저는 오병이어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경제 대박이 곧 사이비 생명입니다. 그런 것들은 만나나 오병이어처럼 우리 손에서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온통 거기에만 쏠려 있습니다. 이 세상이 다 그렇게 흘러가니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거슬러서 살기는 힘듭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면 흔들리는 순간이 있더라도 삶의 방향을 늘 새롭게 설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에 넣은 것들이 사라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도 허물어질 것입니다. 완전한 허무이자 절망이고 희망 없음입니다. 그게 바로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와 하나 되었다는 뜻입니다. 갓난아이가 어머니나 아버지 품에 안기듯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게 실제로 무엇인지를 실감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가장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사랑의 능력으로 실감하는 겁니다. 눅 15장에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와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비유가 나옵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이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를 아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에서 해방됩니다. 해방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찾습니다. 영혼의 해방과 하나님을 구하는 일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혼란에 떨어지는 이유는 자기 실존에 대한 걱정에 놓여 있습니다. 불쌍한 인생이 되면 어떻게 되지,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하는 걱정입니다. 남보란 듯이 잘나가는 인생이 되어도 그것 자체로는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다 아실 겁니다. 이름 떨치는 목사가 된들 그게 목사의 자기 구원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말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예수가 경험한 그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하게 느끼거나 경험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스스로 삶의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늘 일상에 치우쳐서 삽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다음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선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그 생명의 능력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여기 취업 준비를 하거나 사랑에 빠진 청년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 앞에서 벌어진 일에만 정신이 팔립니다. 우리는 일상의 과몰입으로 인해서 하나님 사랑을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하나님 사랑을 습관적으로 입에 달고 산다고 해서 실제로 그 능력에 휩싸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미 부활 생명을 경험한 것이겠지요.
예수로 말미암아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잘 들으십시오. 1)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은 예수가 바로 생명 자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종말에 현실이 될 부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예수의 생명과 예수의 의가 선물로 주어질 뿐입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삽니다. 영원히 삽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절인 58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는 말씀을 비현실적이라고 여길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화끈하게 충성하고 희생한, 눈물겹게 봉사한 업적이 있다면 모를까, 믿음만으로 영원히 산다는 건 근거가 없어 보인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여러분에게 강조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생명을 얻으려는 생각을 내려놓으세요. 그런 방식으로는 죽었다가 깨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자기가 아니라 예수입니다. 그에게서 발생한 엄청난 사건을 보는 겁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은 현실이 되었고, 죄 용서는 성취되었으며, 죽음은 극복되었습니다. 그는 우주 역사에서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에게만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어울립니다. 골로새서에 따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에이콘, image)”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삽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그를 실제로 “먹느냐”, 즉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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