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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72 추천 수 0 2022.01.03 18: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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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1:40-44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140-44: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0: 속이 없는 그릇이 있느냐? 없다. 밖을 만들면 속도 있기 미련이고, 속을 만들면 밖도 있기 미련이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치를 못 깨닫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요, 어리석은 이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알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시인을 잘 하지 않는다. 또 어리석은 사람은 불에 타질 것, 세상에 속한 것만 욕심내며 그것을 붙들고 있다가 불속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영원히 가는 것과 임시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요, 참과 거짓된 것을 구별을 못하는 사람이요, 자기를 인간으로 지은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사람이요, 인간의 존재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성경을 깨닫기 전에는 인간존재와 가치를 알고 사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니 예수를 믿기 전에는 어리석게 사는구나. 나이는 골 백 살을 먹어도 어리석게 사는 사람이 참 많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덩어리 크고 모양새 좋은 것만 가지려고 그러지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이건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좀 더 부분적으로 세밀적으로 들어가서 보면 우리 모두 자기 자신에게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 나로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내가 나를 생각할 때 그런 면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는 얼마나 우스꽝스런 사람으로 보였겠느냐? 고개를 못 들겠다 그 말이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않았느냐.’ 사람이 그릇의 밖을 만들 때 안은 자동적으로 만들어진다. 안이 만들어지면 밖도 만들어지는 거다. 안팎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는 거다. 겉이 있으면 안이 있고, 안이 있으면 겉이 있는 것이지 안과 밖은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안이 없는 밖은 있을 수 없고, 밖이 없는 안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영과 육의 결합체로 안과 밖을 만드셨다. 쉽게 말하면 눈으로 보여지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몸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감각성이나 이성이나 마음이나 양심이라고 하는 것도 만드셨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그러나 느낀다. 그리고 또한 일반인들은 모르는 영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고 오라고 하는 것이다.

 

일반사람들 중에도 사람을 단순히 사람의 겉만 보지 않고 마음까지 보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그것을 보는 거다. 그런데 성경을 가진 신앙인이라면 사람을 볼 때 사람의 기준,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심해서 보는 게 아닌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께서 보시는 신앙심을 갖고 사람을 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게 볼 때 겉 사람보다 더 가치가 있는 속사람을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게 사람이 참 가치가 있는 거다. 속사람이 다듬어지지 못해놓으면 짐승과 같아진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도 사람을 중심하여 사람 앞에 잘 보이려는 신앙심을 가졌지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는 신앙심은 아니었다. 교회라 할 때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신앙심을 바로 갖다보면 사람 앞에 바로 보이기도 한다.

 

41: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 안에 곧,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자기 안에 들어있는 창자라는 말이 아니고 속사람을 말한다. 영인의 사람을 말한다.

 

모든 인간은 영과 육의 결합체인데 겉 표면 세상 물질위주로 사는 육의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지고자 하는 영 위주로 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무시하고 살면 자기는 재앙의 사람이 된다.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기 속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거다. 자기의 속사람을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능력성 면에서 자기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게 기독교요 신앙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무식한 그 자기를 유식한 자기로, 무능한 자기를 유능한 자기로, 저질적인 자기를 고상한 자기로, 처절한 자기를 영광스런 자기로 만들어 갈 수가 있다. 예수 믿으면서 이게 안 돼 있으면 바보에 속하는 거고, 하나님의 재앙을 받을 사람이다.

 

사람이 겉만 알고 자기의 속사람을 알지 못하면 일생을 완전히 낭비하고 헛 살고 가게 된다. 이건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가치 없는 인생이다. 밥만 죽이고 가는 인생이다. 사람 중에는 꼭 있어야 될 사람이 있다. 그런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하는 사람도 있다.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또는 교회에서 자기가 어떤 사람으로 되고 싶으냐?

 

성경에 보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도 있다고 했다. 교회에 먼저 다녔다고 해서 먼저 되라는 법이 없고, 나중에 왔다고 해서 나중이 되라는 법은 없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진리이치를 붙잡고 나가는 자기의 노력에 달려있다 그 말이다. 그런데 노력도 좋지만 바른 사람이 되어서 바른 노력을 할 때 참 값진 사람이다. 사람이 참 아름답다. 부지런히 한다고 해도 속사람이 잘못되면 그 사람은 눈의 가시처럼 된다.

 

구제라 할 때 이방세상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들도 물질적 구제나 일반지식 구제나 하나의 종교적 지식의 구제밖에 모르더라. 하나님의 성품으로 되는 영적 인격적 참 구제는 전혀 모르고 있구나. 예수님은 우리를 참 인간으로 되라고 구제하러 오신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셨으니 천국복음을 전하시더라. 그러니까 우리는 천국복음에 빈약한 가난뱅이였는데 예수님으로 통해서 하늘의 것을 받았으니 하늘의 것으로 우리가 사람구제가 돼야 한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죄 사함 받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님의 온전함을 받았으면 깨끗한 사람이다. 세상 속된 사람이 아니라 깨끗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세상 것이 누룽지처럼 끼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신령성으로 깨끗하다. 안과 밖이 좋다.

 

그런데 영적인 속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순결하지 못하면 이건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랬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서 겉으로는 잘 하는데 속사람을 모르는구나. 예수 믿으면서 속사람에 대해 모르면 예수 믿으면서도 예수님과 대적을 하게 된다. 자식이 부모의 속을 모르면 부모에게 대적을 하듯이.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스스로 보기에는 종교 행위적으로 좋다고 하는 거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을 들여다보니까 그들의 속사람이 더럽다.

 

일반적으로도 겉은 보기가 좋은데 속은 더러운 사람이 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남의 소리만 듣고 혼례를 치르고 아침에 일어나서야 내 신랑이 이렇게 생겼구나. 내 색시가 이렇게 생겼구나하면서 평생 배우자를 미워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제 눈에 보기가 좋아서 제가 스스로 선택을 해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해 놓고서는 못 살겠다고 야단들이니 이건 뭘 모른 거냐? 사람을 볼 줄 모르는 거다. 본다고 해도 사람의 속을 볼 줄 모르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도 이와 같이 정신을 못 차린 사람이 참 많다.

 

42: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박하와 운향은 향기로운 식물이며 약재로도 쓰인다. 그들은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는 잘 했다. 그런데 무엇을 버렸다고 하느냐?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다. 이 두 가지를 버렸다.

 

다른 것을 아무리 잘 해도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면 성경에 보니까 화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의가 무엇이냐? 공의는 하나님의 판단이다. 시대와 나라들을 초월하고 영원히 신령천국에까지 아무도 정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옳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도 효력을 볼 수 있는 그 옳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가지느냐? 내가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려면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온 것이요, 그 속성이란 인간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선 사랑 거룩 진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주권인데, 거기에서 나오는 판단이 공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못 가지면 공의로운 지식은 없는 거다. 공의로운 지식을 가져야 미래를 보는 면에서도 공의로운 지혜가 나온다. 예수를 믿으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가져야 한다. 그것이 자기에게 시급하다.

 

예수님의 오심 그 자체가 공의요, 예수님의 언행심사가 하나님의 공의요, 따라서 예수님의 판단에 사사로운 마음이 있다거나 편견에 치우친다거나 환경적 형편을 봐준다거나 그런 것은 없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린 인간 세상에는 영원히 옳은 판단은 없다. 법정의 재판도 상황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러니까 감옥살이를 하는 것도 달라지더라. 그래서 의례히 하는 말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한다. 이걸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으실까?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거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영적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다. 그러니까 영적인 전쟁을 싸워서 이기라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는 영원히 옳은 판단은 없다. 전부는 하나님 보시기에 굽은 재판이요 판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죽음 저 너머 신령계에까지 영원히 효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판단성을 가질 때 죽음 저 너머까지 갈 수 있는 영원히 옳음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이다. 그런데 이 성경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공의로운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공의로운 판단이 나올 텐데 예수님을 버렸으니 결국 하나님의 공의를 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로 오신 것이고, 이 공의를 받아들이는 게 또한 하나님의 사랑인데 이들은 모두 버렸다.

 

공의 속에는 아가페가 있는 것이고, 아가페 속에는 공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의가 하나님의 판단이란다면 아가페인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죄에서 탈출시키는 것이고,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고, 영생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들어있고, 우리 인간의 성품을 하나님 당신의 속성처럼 온전케 하는 것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옳은 것이라야 이 일이 되는 것이고, 아가페라야 공의가 행사가 되는 것이다.

 

바리새교인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망권에서 생명권 안으로 들어가는 이것을 버렸고, 그리고 죽였고, 그들의 결과는 다른 것을 아무리 잘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했다.

 

그러니 이 짧은 구절 하나만을 봐도 물질 충성봉사 그 이전에 자기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받아들인 후에라야 물질 충성봉사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거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도 없으면서 물질 충성봉사 자체를 잣대로 삼아서 신앙을 보는 게 아니다.

 

그들의 구원은 예수요, 예수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인데, 이 예수님을 죽였으니 그들이 성경을 가지도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가 되겠느냐? 안 받아준다. 안 받아주는 주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그들의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가 하나님께 바로 된 것이더냐? 하나님께 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인간냄새가 돼 버렸다. 이런 것도 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하는 데서 나온 향이라야 되는 거다.

 

43: 사람들은 주로 어디에 가면 여기저기서 알아주고 악수를 하고 하면 그 사람을 굉장한 사람인가보다한다.

 

높은 자리라면 권세 있는 자리, 많은 사람이 우러러 보는 자리,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명예의 자리이다. 누구든지 오르고 싶어 하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 한 번 앉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권세를 부리게 된다. 권세를 부릴 때는 많은 사람을 억울하게도 만들고, 신처럼 군림하려는 성질도 들어있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판단도 옳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를 않다. 이방 세상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특히 기독교 종교계에서도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인기몰이를 하고, 또 자기가 높은 자리에 앉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식의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성경에 보니 왜 그런 자들에게 화를 선언할까? 일반인들이나 종교계에서나 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화를 선언하시더라.

 

그러면 성경에 하나님께서 높여준 사람이 없느냐?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이방나라 애굽에서 투표도 없이 하루아침에 급속히 오른 총리가 누구냐? 요셉이다. 이방나라 바벨론에서 총리가 된 다니엘, 이방나라 앗수르에서 왕후가 된 에스라 등등 찾아보면 높여주신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았다. 왜냐? 그들은 높은 자리를 탐내지도 않았고, 왕이 많은 상금을 내려서 높은 자리에 오르라고 할 때 다니엘은 그런 건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했다. 그런 높은 자리를 탐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높은 자리를 탐낸 자도 있으니 하만도 있고,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 집어넣은 자들이 있고, 또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 속에 넣게 한 자들도 있다. 그렇게 한 게 다 높이 오르려고 그렇게 한 거다.

 

하나님께서 높여준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권세자로 만들어 놨어도 이방나라에서 누릴 목적으로 살지를 않았다. 또한 이방백성들을 압박이나 핍박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인간을 사랑했고,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며 살았다. 그래서 에스더서에 보면 이방여자들인데 에스더를 위했다.

 

자기가 사는 지역이나 가정이나 사회나 어디서든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 앞에 바로 하게 되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사람에게 감화를 주게 되고, 그러면 이방인들도 그 자기를 높인다. 높아지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관계성에서 그렇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믿으려다가 안 믿는 사람들에게 환난 핍박을 받을 수도 있는 건데, 문제는 교회 안에서이다. 교회 안에서 왜 그렇게 당을 짓고 하느냐? 교회에서 따로 놀면 관계성이 안 돼 나가는 거다. 성질이 부드러워야 하는데 성격이 모나고 성질이 더러워서 다른 교인들이 가까이 하지를 않아서 자기 혼자 따로 놀게 되면 좋은 게 뭐냐? 유익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고치라는 것이니 우리 모두가 고치자. 교회에서 따로 놀면서 가만히 있으면 당을 만들게 돼 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과 점점 커지면 결국 목사를 쫓아내자가 된다. 예수 당시 때도 크게 보면 그게 보이는 거다.

 

이방세상은 권세를 잡으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의 영능의 실력의 구원을 위해서 그런 것들에 간섭도 하시고 허용도 하시면서 예수 믿는 자기를 권세의 자리로 올리기도 하시고 내리기도 하신다.

 

이방세상은 인위적으로 인간적으로 학력실력 경쟁실력 인맥실력으로 또는 부정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도 하고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즉, 진리진실로 인격화 자체화 된 것을 보시고 기뻐서 그 사람을 올려주신다. 사람에게 진리의 등불이 켜지면 하나님께서 올려주신다.

 

이론만 까는 게 아니라 사람의 성품의 모든 면에서 그래야 사람이 올라간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가졌어도 성품이 바로 못 돼 놓으면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러면 예수 믿는 효력이 없어진다. 옳은 것을 받았어도 자기의 성격 성질로 그 옳은 것을 엎어버리면 옳은 것이 자기에게 효력이 없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한다.’ 시장은 어떤 곳이냐? 시장은 장사꾼들이 모이고,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니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만나면 서로 인사를 한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만큼 관계성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고 아는 사람이 많다면 그만큼 관계성을 많이 가졌다는 말인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관계성을 가지고 살았느냐가 문제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중심사상을 아시는 고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세상인간들은 높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고 있다는 점. 그들과 돈으로 관계성을 갖고 있다는 것. 이를 위해서 무엇이든 아는 체 있는 체를 한다. 그들의 속성이 그렇다. 세상에서는 아는 체 있는 체 하면 높임받기가 쉽다.

 

44: 무덤의 봉분이 동그랗게 확실하면 사람들이 그 위로 다닐 수가 없다. 그러나 무덤이 오래 되면 봉분이 비에 깎이고 내려앉아서 평평하게 된다. 무덤이 평평하게 되면 그것이 무덤인줄을 모르고 사람들이 그 위로 다니게 된다. 무덤 속에는 시체 썩은 게 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 위로 다닌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해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마음을 정확히 아신다. 그러나 타락된 인간들은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잘 모른다. 타락된 정신을 가지고 아무리 성경을 연구해도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이게 거짓 종들이다.

 

인간들은 바리새인들의 속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썩어 있는지 잘 모른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그렇다. 종교적인 행위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의인들이라고 보고 있다. 바리새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생각을 하지 자신들 속에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것 썩은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생각을 못한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온전에 관한 본질을 모르면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내 속을 쳐다볼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그런 사람들처럼 그 저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문제. 예수님께서 평토장한 무덤 같다고 하시는 것은?

 

1. 선악과 먹고 사망적 지식에서 나온 세상 일반적 정신으로 산다는 말이다? 종교를 빙자해서 그렇게 산다는 말이다?

 

2.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다?

 

3.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말이다?

 

4. 남을 속이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면서도 남을 속인다는 말이다?

 

1번이 정답이다.

 

우리가 그들의 선악과 먹은 사망적인 개념의 뜻을 받아들이면 즉,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죽은 거다. 사망적인 것을 모르고 그렇게 관계를 짓고 다니다가는 무엇이 죽어나가는지 모르고 전부는 썩는 것뿐임을 알아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본질로 생명적으로 살아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의 가르침은 살아나는 게 없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라야 자기 속에서 이치적으로 믿음이 자라나는 게 있는 건데 예수 믿어 부자 되자한다거나 사람 앞에 나타내 보이고자 맨 세상적으로 나가면 하나님 앞에 자라나는 건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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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66 잠언 지혜 & 그 너머 잠1:20-33  정용섭 목사  2022-01-12 113
17265 마태복음 놀람의 근거 막7:24-37  정용섭 목사  2022-01-12 103
17264 마가복음 진정한 삶 막8:27-38  강승호목사  2022-01-10 173
17263 누가복음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눅11:42-46  김경형목사  2022-01-10 78
17262 요한복음 자비의 못 요5:1-8  강승호목사  2022-01-06 178
17261 고린도전 축복받는 하나님의 교회 고전1;1-9  전원준목사  2022-01-06 269
» 누가복음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눅11:40-44  김경형목사  2022-01-03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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