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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5: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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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1044152 |
속죄와 구원
히 5:1~10, 창조절 일곱째 주일, 2021년 10월17일
큰 대제사장
히 5:1~10절에는 현대인들에게 낯선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서가 구약성경을 배경으로 기록된 문서라서 그렇습니다. 대제사장, 속죄제, 아론, 멜기세덱, 반차 등등과 같은 단어로 인해서 본문을 읽고 따라가기가 쉽지 않으나 핵심 내용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히 4:14절부터 보면 그 내용을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대제사장으로 묘사했습니다. 단순히 대제사장이 아니라 ‘큰’ 대제사장(a great high priest)이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본문 6절과 10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멜기세덱 계열에 따른 대제사장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원래 구약의 대제사장은 모세의 형인 아론 후손이 맡았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는 열두 지파의 한 지파인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맡았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론이나 레위 지파와 관계가 없습니다. 그는 훨씬 이전의 역사로 소급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포로로 잡힌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 그를 맞이한 인물이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창세기 본문에 따르면(창 14:18)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했고, 아브라함은 노획물 중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아론이나 레위 혈통이 아니라 오히려 멜기세덱처럼 특별한 위치에서 대제사장 역할을 한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겁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죄를 속한다는 뜻의 속죄 제사를 지내는 일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비둘기나 양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는 방식으로 속죄 제사를 바쳤습니다. 동물 몸의 일부는 불에 태웠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나눠 먹거나 다른 제사 업무용으로 사용했을 겁니다. 이런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도구는 칼과 불씨입니다. 칼과 불씨는 생명과 직결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를 바칠 때 준비한 도구도 칼과 불씨였습니다(창 22:6). 동물을 죽이고 피를 뿌리고 태우는 과정에서 나오는 비릿한 냄새는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속죄 제사를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여긴 이유는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찰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체에게 복을 주셔서 세상에 충만하여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친 다음에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라고 창 1:31절이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심히 좋게’ 흘러가지 못했습니다. 온갖 파멸적인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그렇게 된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자신들에게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에게서 용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속죄 제사 형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속죄 제사는 여러 가지 점에서 미숙했던 고대인들에게나 필요하지 21세기 첨단 문명사회에서 성숙하게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2천 년 전 사람보다 오늘 우리가 더 성숙한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더 풍부하게 산다는 사실이 그 증거는 물론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심리학과 물리학과 정치학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안다는 사실도 확실한 증거는 전혀 못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지 않고 세속사회에서 아주 역동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노동과 기도만으로 수도원에서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이는 2천 년 전 삶의 모습과 비슷한데, 더 성숙하거나 더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저는 오늘도 여전히 속죄 제사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만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시원적 힘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
속죄 제사를 이해하려면 ‘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실정법 위반입니다. 학생에게는 학칙 위반, 군인에게는 군법 위반, 대한민국 사람에게는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입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렸듯이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런 실정법의 차원과 다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실정법은 죄의 뿌리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실정법이 아무리 잘 갖춰진 21세기 문명사회 안에서도 죄의 힘이 막강하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삶에 나타나는 방향의 오류입니다. 그 오류의 핵심은 자기 숭배입니다. 자기를 생명의 주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자 자기 연민이고, 자기 집중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들과 생명 충만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형식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말과 행동에서 모범적인 사람이 그 내면에서는 교만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피력했듯이 죄는 우리의 내면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 불안은 우리를 죽입니다. 겉으로는 살아있다 하나 죽은 자와 다를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까? 죽은 자처럼 사는 건 아닙니까? 이런 문제에서 아예 무감각하십니까?
죄와 불안 문제는 우리의 생존 방식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만 삽니다. 아주 옛날에는 수렵과 채집의 방식으로 먹고살았는데, 지금은 가축 사육과 농경 방식으로 먹고삽니다. 살려면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더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부자 나라가 더 부자가 되려고 하기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더 힘들게 삽니다. 우리가 커피를 값싸게 마시려고 하면 커피를 생산하는 가난 나라 농부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택배비를 낮추면 택배 기사들의 삶이 힘들어집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여유 있게 사는 삶 자체가 미안하고 불안합니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죽음을 모른 척하고 지내듯이 실존적인 죄의 경향성과 불안을 모른 척합니다. 모른 척한다고 해서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불안한 구석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분들은 아래와 같이 두 가지 상황에 떨어진 겁니다. 하나는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용기와 지혜가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으로 뻔뻔한 겁니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우리를 뻔뻔한 인간이 되라고 세뇌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상당한 부분에서 이미 그렇게 세뇌당한 건 아닐까요?
김선우 시인의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에 나오는 시 “마스크에 쓴 시 2”의 한 연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잉여의 발생이 부추기는 탐욕, 무기와 노예,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병든 인간, 잉여가 없다면 살기 위해 협력했을 수도 있는데 잉여가 발생하면 반드시 폭력이 시작된다 최초의 잉여를 점유한 세력이 씨 뿌린 악의 계보, 어떻게 해야 나쁜 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만년 동안 후퇴 없이 몸통을 불려온 지옥을
김선우 시인은 나쁜 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고 절망합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할 듯한 기세를 보이는 정치가 우리에게 탈출구는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더 나쁘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정치는 제 몫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많습니다. 선한 양심과 정치력을 동시에 갖춘 정치인들만 활동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80년 전 히틀러 시절에 경험했듯이,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 트럼프 시절에 경험했듯이 아무리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문명이 선진화된 나라에서도 포퓰리즘에 능한 선동가가 권력을 잡는 일이 허다합니다. 21세기 정치인들이 2천 년 전 로마 정치인들보다 더 양심적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구원의 근원
저는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는 말씀에 근거해서 탈출구는, 즉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원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상투적이고 도식적이고 진부하게 들립니까? 일단 8~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마음을 열어놓고 들리는 말씀 그대로 들어보십시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여기에도 약간 까다로운 단어가 여럿 나옵니다. 아들, 고난, 순종, 배움, 온전하게 됨, 영원한 구원, 구원의 근원이 그것입니다. 각각 해석이 필요한 단어입니다. 핵심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곧 속죄를 가리킵니다. 기독교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죄 제사가 완성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더는 동물을 잡아서 피를 뿌리거나 태우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바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단번에 속죄를 받았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죄의 속성이 남아 있으나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 찬송을 올립니다. 본질의 차원에서는 죄가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 경험이 있으십니까? 각자 답은 다르겠지요. 다음의 설명을 들으면 여러분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게 될 겁니다. 그런 대답을 기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근원이 된 이유는 그가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문이 말했습니다. 온전하다는(perfect) 말은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긴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해서 당연히 이 인간 역사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건 아닙니다. 예수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았다면, 즉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했다면 그는 온전하게 될 수 없었습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소프라노 조수미 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성악가입니다. 그는 위대한 성악가가 될 소질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 천성적 소질만으로 그가 위대한 성악가가 된 건 아닙니다.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이 천재를 만든다는 말처럼 조수미 선생은 성악가가 되려는 자신의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에 따르면 예수가 자신의 소명을 세 가지로 감당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고난받는 자이고, 둘째는 순종하는 자이고, 셋째는 배우는 자입니다. 배운다는 말이 예수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울립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대인들의 신앙 전통을 배웠습니다. 그런 배움이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실감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경험할 수 있었겠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은 십자가 죽음까지 이어집니다. 그의 고난은 곧 하나님의 고난입니다.
순종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가 보기에 순종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감하고 힘들어했습니다.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21:23)도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으며, 바울도(고전 1:23)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에게 거리낌의 대상이며 이방인에게 미련한 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렸을 때 아람어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한 전능하신 분이라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아니라 한 마디 명령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예수 자신도 십자가 운명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를 이렇게 전합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막 15:36) 예수는 순종하셨습니다.
국가를 위해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고, 가문을 위해서 죽거나 다른 종교적 신념으로 죽는 사람들도 있으니,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라고 해서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아빠 아버지였습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를 현실(reality)로 믿고 경험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이런 신뢰를 파괴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자기의 존재 전체가,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거부할 수도 있었으나 예수는 그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무너지는 운명까지 받아들인 순종이었습니다. 그 순종에서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순종이라는 말이 현대인들에게는 탐탁스럽지 않습니다. 자기 주체성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들은 삶에서 영적이고 거룩한 권위를 아직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닐는지요. 이렇게 바꿔서 질문해보십시오. 땅에 순종해보신 적이 있나요? 하늘에 순종해본 적이 있나요? 꽃에 순종해본 적이 있나요? 없나요? 사랑의 힘에 순종하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이 척박한 인생살이를 버텨낼 수 있는지요. 시인과 예술가와 수도승들은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대적인 대상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오직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다음의 엄중한 사실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거룩한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주관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평생을 살았다 해도 순종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결정적인 순간이 올 겁니다. 그 순간이 이르기 전, 살아있는 동안에 순종하는 게 훨씬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영혼 충만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큰 대제사장이십니다. 그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그를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습니다.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히브리서 말씀이 가리키는 세계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여러분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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