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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2:1-5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2장 1절-5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2절: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나니.’ 어디에 감추이면 제일 깊이 감추어진 것일까? 마음속에. 마음속에 감추어둔 것을 엑스레이로 보겠느냐, 현미경으로 보겠느냐? 아무도 못 본다. 양심적으로 감추어 놓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양심적으로 감추인 것은 자기가 말을 안 하면 모른다.

 

‘숨은 것.’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 숨은 것. 예를 들어서 도둑질한 자가 자기를 숨기려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뛰어 도망을 가면 되겠는지, 시장 통의 사람들이 많은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게 감추어지는 건지? 후자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 앞에는 전부 대낮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왜 그런가 하니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만들기 전에, 예수님이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 하늘나라에 계실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정신 마음 두뇌 핏줄 오각의 오감성 전부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그 분의 설계에 의해서 그 바탕 그 기초를 놓고 모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을 만드신 분이, 양심을 만드신 분이 왜 모르겠느냐? 그 분 앞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거다. 감출 수가 없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모든 만물이 ‘이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못된 자기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주권섭리 하에 사건이 와서 ‘이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드러낸다. 예를 든다면 자기가 신앙이 좋다고 하는 것을 자타가 인정을 하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신앙이 좋은지 나쁜지를 충성봉사 하고 겉으로 나타나는 면을 보고 하는 얘기다. 그런데 자기의 정신 사상 신앙양심이 하나님의 기준에 바로 돼 있는지, 아닌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건을 몰아붙이면 알게 된다. 그 사건을 이길 수 없는 자기의 신앙상태인 줄을 모르고 있다가 사건이 와서 ‘이 사람은 신앙이 이렇습니다’ 하고 남 보기에 좋다고 하던 그 신앙을 드러낸다.

 

자기가 건강하냐? 그 건강을 누가 지키는 것 같으냐? 나는 한 번도 안 아팠다? 그래,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사건을 주면 피할 수가 없는 거다. 그럴 때 문제는 마음이다. 진리 따르는 양심이 지혜를 가지고 자기를 다스리고 환경을 다스려 나가는 건데 그 면에 미련해서 자기를 못 다스려서 몸에 병이 들고 하면 건강을 자랑하던 게 쑥 들어간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피할 길이 없다.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만물의 이치와 세상이 돌아가는 그 법칙 모두가 인간 자기의 이룰구원을 위해 돌아가는 것임을 모른다. 믿는 우리는 ‘예수 믿어 천국 간다’ 하는 건 전제를 하고, 천국 갈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믿음실력 영능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면 이 실력을 어떻게 닦는 거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가지고 깨닫고 이 땅에서 깨달은 그 이치를 가지고 사람관계 물질관계 사건관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잘 적용해 들어가면 인격과 성품이 고상해진다. 이게 영능의 실력이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일반세상 예수 안 믿는 사람들처럼 시시하게 물질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하고 땅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가지고 다투면 다툴수록 어떻게 되느냐? 자기의 성격을 못 고친 상태에서 귀신의 장난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그 자기를 다 보게 되니 자기 얼굴이 똥이 된다. 사람을 못 깨달으면 그렇게 된다. 그게 현실이다. 자기 정신 사상의 움직이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그걸 실감을 잘 못하니까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세계, 없어질 세계가 자기 실상적인 세상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을 목적을 하고 사니 사람이 허황되고 거짓되고 사람이 가볍고 지혜롭지 못하고 짐승처럼 먹고 마시며 본능으로 히히낙낙거리며 살다가 가치 없이 죽는 거다. 그렇게 죽는 걸 짐승 같다고 하는 거다.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 너를 만드신 그 분을 존경하고 공경하고 그 분의 말씀의 이치대로 살다가 오라는 것이 인생 자기의 이 땅에서의 존재목적이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보고 있다. 이렇게 되니 옳은 진리신앙의 이치가 없이 살게 되고, 요행이나 바라고 무당 식으로 믿게 된다. 그게 기독교가 아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게 교회가 아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 앞에는 자기 삶의 소원 목적도 드러나고, 자기의 정신 사상이 돌아가는 것도 드러난다. 그러나게 돼 있고. 드러나는 데도 그걸 안 고치면 너는 어떻게 되겠느냐? 인간을 만드신 그 분 앞에서 인간 너를 모른다면 네가 어떻게 되겠느냐? 밥 먹고 돈 벌고 시집장가 가고 자식 키우고 하면 그게 인간이냐? 인간이 인간을 못 깨달으면 짐승보다 더 흉악하고 흉측해진다.

 

인간이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짐승은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그게 그것 같으냐? 몸이 아플 때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 죽는다. 그러니까 살려면 먹어야 한다. 그런데 짐승은 먹기 위해 산다. 이건 다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 우리가 그 두 가지가 다 들어 있느냐, 둘 중에 하나냐, 아니면 다른 차원이냐? 다른 차원이다.

 

그러면 어떤 차원이냐? 우리는 예수 잘 믿기 위해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먹고 마신다. 그러니까 우리의 본업은 뭐냐? 예수 잘 믿는 것. 이 잘 믿는 것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려면 말씀의 이치를 잘 깨달아야 한다. ‘복 달라’가 아니라 문제는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져라 그 말이다.

 

많이 받으려면 그릇이 커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그릇을 작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많이 주시오’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너는 깔려죽는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지혜지식적 도덕적 능력성적으로 만들어지면 그 사람의 그릇은 큰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성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다. 질이 그렇다. 이건 하늘의 그릇이다. 땅의 그릇이 아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잘 살고 해도 그건 땅의 그릇이요 작은 그릇이다. 이런 것들은 내 속에 아무리 갖다 넣어도 다 썩고 먹고 난 뒤에는 빠져나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생산적이요, 안 죽는 거고, 영원히 가는 거다.

 

우리 인간의 육신은 날마다 쇠퇴해지지만 성경은 날마다 새롭다고 말한다. 그렇게 들어가는 게 예수 바로 믿는 것이다. 특히 우리교회 교인들은 ‘날마다 새롭도다’ 이게 나와야 한다. 한 주일 배우고, 일 년 배우고, 십 년을 배우면 그만큼 성장이 돼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안 믿는 세계에 가더라도 ‘인간은 이렇게 사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가져야 되는 겁니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어서 지도 인도하고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고차원적인 성경을 왜 배우느냐? 사람이 만들어지고 사람의 차원이 높아지고 하는 교육은 세상에는 없다. 교회에서만 가르치는 거다. 학교에서는 못 가르친다. 사람을 가르치고 사람이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이런 교육은 세상에는 없고 하나님의 집에서만이 있는 거다.

 

진리이치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사회에서 대학교에서 학박사들이 가르칠 수가 없고 오직 성경밖에 없고, 교회에서 그래야 되겠는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 믿어 부자 되고, 만사형통 되고’ 하는 물질적인 개념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믿는 사람이 지질이도 못나고 더럽고 비참하고 머리 깨우침이 없고 욕심만 생기고 게으르다. 이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영과 육을 분별하고, 더 나아가서 사람의 정신과 마음속에 어떤 귀신이, 어떤 악령이 작용을 하는지 그것까지 보고 거기에서 사람을 끄집어내는 이게 교회의 일이요, 예수 믿는 것이요, 성경을 깨닫는 거다.

 

어린아이들은 깨닫는 차원이 어려서 먹는 것만 밝힌다. 어린아이에게 먹는 것과 책을 주면 먹는 것을 받는다. 그런데 다 큰 어른은 먹는 것보다 책을 받는다. 왜? 그 속의 지혜를 깨달으려고. 이렇게 되면 그 책 안에 과자만 들어 있느냐? 사탕만 들어 있느냐? 모든 사회적 부귀영광이 다 들어 있다. 이치를 말하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 지혜지식을 원하는 게 아니라 어린애들이 사탕 달라는 식으로 ‘예수 믿어 부자 되자’ 하고 있으니 예수를 수십 년을 믿어도 그 머리통을 어디에 쓰겠느냐?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된다’ 하고 목사가 가르친다면 그건 거짓이요 이단자이다. 왜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거냐? 그건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다. 목사라면 사람을 깨닫도록 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능력이 부여되도록 해야지 만물 속에 들어가서 먹는 것만 밝히고 욕심쟁이가 되게 하니 이게 사람이냐? 성경에서 보면 이건 돼지처럼 길러지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앞에는 전부가 대낮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너의 생각도 드러내고, 깊은 마음속에 뭐가 숨어 있는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가 들어가면 다 드러난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에 맞는 성질 성격 성분을 가졌는지가 다 드러난다. 다르면 고쳐야 한다.

 

사람이 옳은 지식을 가지게 되면 옳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교회에서 아무리 배워도 그릇된 지식을 가졌으면 그 사람의 사고 판단 평가 지혜지식 모두가 비뚤어져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데서 나온 것들이다. 선악과 따먹은 저주받고 타락된 것은 하나님 앞에 영원하고 영생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격은 성격대로, 성질은 성질대로, 성분은 성분대로, 이질은 이질대로 하나님의 본질에 입각해서 고하 간에, 장단 간에, 미추 간에, 강약 간에 다 드러나 버린다. 질은 질대로, 존재는 존재대로 다 드러나게 하신다. 성경이 우리의 사고방식 이해타산 평가성이 다 드러나게 만든다. 그러니 예수를 믿으면서 성경대로 고쳐야 한다. 안 고치면 수 년 수십 년을 살아도 너는 성장이 안 된다. 생각의 도수가 지혜적으로 안 올라간다. 땅의 것만 생각을 한다.

 

그렇게 살면서 땅의 것으로 자기는 똑똑타 하겠지만 어느 때 이게 드러나는가 하니 자기의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또는 사람을 선택할 때 보면 드러난다. 얼마나 배웠으며, 재산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건강한지 그걸 주로 본다. 그러나 이런 건 시간 따라 환경 따라 다 변질되는 거다. 변질되지 않는 것을 먼저 본 후에 그 다음의 것은 2차적으로 봐야 하는 건데 오늘날 그렇지를 않더라. 그러니 사회가 이 모양이다.

 

우리가 갈 신령천국은 지극히 거룩한 것뿐이다. 하늘나라는 거룩하다. 지식 면에서도 하나님의 지식으로 들어가 있고, 지혜 면에도 그렇고, 선 사랑 거룩 진실, 그리고 의와 주권도 전부는 거룩으로 들어가 있다. 하나님의 질과 같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보고 듣고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질로써 많이 만들어지면 많이 만들어진 것만큼 그 천국으로 통과하게 돼 있다. 원리가 그렇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이런 원리를 모르는 교인이 너무나도 많다.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 간다’로만 알고 있다. 아닌 말로 외국으로 이민을 가도 가기 전에 그 나라의 말, 그 나라의 문화, 그 나라의 기술, 그 나라의 문물을 다 알고 가면 그만큼 편하다. 예수 믿는 사람은 조만간 천국에 갈 신분인데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못된 도둑의 심보를 가지고 있다면 그 마음이 천국에 들어가겠느냐? 못 들어간다. 그러니까 고쳐라. 그 마음을 가지고 가르치면 뭐가 될 것이며, 어린아이를 그렇게 교육을 하면 뭐가 되겠느냐?

 

그 나라에는 세상 속화된 것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를 못하고,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까 그 신령천국에는 오직 거룩한 존재들뿐이다. 그 세계가 그런 것이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식 면에도 거룩성, 지혜 면에도 거룩성, 모든 도덕성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성을 가져야 한다. 그게 예수 믿는 거다.

 

그렇게 안 고쳐질 바에야 예수 믿는 효력이 뭐냐? 네 속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날 닮아라’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날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예수님 당신의 마음 정신 사상을 당신을 닮으면 이게 하나님을 닮는 거다. 이치가 그렇게 되는 건데 너는 뭘 닮았느냐?

 

자기가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믿으면서 뭐가 바꾸어졌느냐? 지식이 바꿔졌느냐? 그 지식에서 지혜가 바로 나오느냐? 선이 뭔지? 선의 사람이 됐느냐? 거룩이 뭔지? 거룩의 사람이 됐느냐? 지식 면에도 구별, 지혜 면에도 구별, 존재 면에도 안 믿는 사람과 구별이 돼야 하는 건데 모든 사고방식이 안 믿는 사람과 다른 게 뭐냐? 구별이 안 되지 않느냐?

 

세상 사람은 끽 해봐야 자기의 행복, 자기의 명예 영광을 가지고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먹고 마시고 누릴 뿐이다. 이것은 100년 안쪽까지 가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의 것은 영원히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나는 영원한 부요성, 영원한 존귀 영광성을 좇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성질로 들어가는 말이 되는 거다.

 

그러면 100년이 긴 거냐, 천 년 만 년 영원히 가는 게 긴 거냐? 어느 것을 간구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거냐? 우리에게 영원한 부귀 영광을 주려고 예수님께서 사람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인데 예수님의 것을 간구하면 안 되는 거냐?

 

모든 만물은 인간 자기를 주님처럼 만드는 면으로 들어가 있다. 모든 역사적 흐름도 그렇다. 일 년 열두 달 사시사철이, 하나님의 주권섭리가, 창조의 원리가 날 만드는 데로 들어가 있다. 사람 만드는 데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 거룩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주님처럼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지 못한 만큼, 고치지 못한 만큼 이 세상에 살면서 너의 고통이다.

 

자연법칙을 좀 아는 사람은 봄에 씨앗을 심고 가을에 거둔다. 그렇게 해서 겨울의 혹한 추위에 편히 먹는다. 일도 못하고 ‘아이고, 다리야’ 하면 그 사람은 연령적으로 겨울이다. 시대적으로도 ‘편안하다. 편안하다’ 할 때 빨리빨리 준비를 하라. 그 다음에는 환난이 오게 돼 있다. 뭘 봐서 그걸 아느냐? 사시사철을 봐서 오게 돼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창조 때 징조로 이걸 넣어 놨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뿌림을 받고 자라면 나이 들어서 노년기에 이르면 그 사람에게는 혹한 추위가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사물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정신을 알아야 한다. 교회들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이런 것을 다 말을 하고 있는데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내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뤄주십시오’ 한다면 이 마음은 욕심이요 귀신들린 마음인데 그게 이뤄질 것 같으냐?

 

그걸 이뤄주면 그것을 가지고 얼마나 살겠느냐? 그것 때문에 네가 죽는다. 사람 네가 못 쓰게 된다. 네 자녀도 못 쓰게 되고. 온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면 네가 편안하겠느냐? 자기가 안 고쳐지면 자기에게 고통이 온다. 마치 자기 속에 병균이 든 것처럼 자기 고통이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거룩한 자로 고치라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왜 내 죄를 지적해 주느냐? 고치라고. 지적을 안 해 주면 그대로 죽는 거다. 일반적으로 죽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신앙 면에서도 ‘이 사람은 희망이 없구나’ 하면 끝난 것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하나님 앞에 영적 신앙 면에서 ‘너는 희망이 없다’ 하면 그건 끝난 것이다.

 

사람이 육신이 죽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인격 면에 죽는 게 있고, 교회에서 신앙인격 면으로 죽이는 게 있다. 뭘 먹어서 사람이 죽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공기로 인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시기만 해도 죽는 게 있다. 이게 무서운 거다. 그래도 모르겠느냐?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들어가느냐? 특히 교회에서.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누룩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교회보고 하는 말이다. 교회는 교인이다. 교인들보고 하는 말이다. 누룩은 부풀리는 것이다. 누룩이 음식 속에 들어가면 막 부풀린다. 눈에 안 보이게 부풀린다.

 

자타의 속에 감추이고 숨은 것을 나타나게 하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내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지적을 해 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흉을 보고 잡아 뜯는 게 아니라 ‘당신은 이 면을 고치면 참 좋겠습니다’ 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사람이 마음이 넓은 사람이요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성질이 못된 사람은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며 자기 얼굴이 깎이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은 못 쓴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는 그런 게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말씀을 통해서 ‘네 속에 이런 정신 마음이 들어있다. 가치판단 하는 지식이 잘못됐으니 고치자’ 한다.

 

3절: 제자들이 어두운 데서 말을 하는 것은 그 때 당시 바리새파 교인들과 율법사 서기관들의 방해를 피해서 복음을 전하느라고 그렇게 하는 건데, 하나님께서는 광명한 데서 즉, 밝은 날 더 잘 들리게 하신다고 한다. 핍박이 두렵고 잡아 죽이려고 하니까 굴속에서 전도하고 다락방에서 전하는 것이 밝은 날 전하듯이 ‘봐라’ 하고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을 한다고 했는데, 이는 다른 잡소리는 안 들리게 한 사람에게 집중적이라는 의미다. 아무에게도 안 들리게 소근 소근 말을 했는데도 온 세상이 다 알도록 공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긍정적으로도 보고, 부정적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앞의 말을 ‘긍정적으로 볼 때는 어떻게 되고, 이걸 부정적으로 볼 때는 어떻게 되는가?’ 하고 양면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지혜가 나온다. 앞의 것을 뒤집어 말하면 어둡고 악한 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피해를 주려고 모의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밝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공개를 해 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에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걸 돌려버렸다. 그래서 하만 자기가 그 나무에 매달렸다. 남을 죽이려고 했는데 자기가 매달렸다.

 

우리가 그런 것은 성경에 기록이 돼 있으니까 ‘아, 하나님께서 하시는구나’ 하고 믿어지는 거고,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적중성으로 본질로 들어간 신앙 믿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 자기는 모르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되고 있음을 간간히 믿음으로 느끼는 경우가 있다.

 

지금도 성령님이 역사를 하는 거냐? 하나님도 역사를 하는 거냐? 우리 주님도 역사를 하는 거냐? 지금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상황에 따라서, 사건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성령으로, 어떤 면에서는 주님이 교육을 하는 것처럼 교육으로,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역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도를 위해서 그런 역사를 하신다.

 

‘어두운 데서 한 말이 밝은 데서 들리고’ 하는 이건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다. 악한 자들이 자기들의 아지트에서 모의한 것도 온 세상이 다 알도록 공개를 해 버린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다 나타내시고 밝히 드러내시는 것이니 너희들은 겁내지 말고 공개적으로 전하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설계 안에 든 역사를 모른다. 그런데 세상 속화되고 믿음 없는 사람은 세상 모든 만사를 자꾸 자기 기준에 댄다. 자기가 기준을 딱 만들어 놓고 자기의 그 뜻대로 안 되면 도와달라고 하고, 안 되면 누가 방해꾼이라고 한다. 자기가 머리를 쓰기를 나쁘게 써놓고는 원망은 전부가 다른 사람에게 한다.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이나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모두 나타나고 천하가 다 알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 비밀이라고 하는 건 있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가만 보면 사람이 사람을 속이는 일이 많다. 그러나 기독자들은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게 다 보이는 거다. 영을 심사하고 판단해야 할 기독자가 왜 그걸 모르겠느냐? 그런데 세상 물질적으로만 들어간 신앙은 영의 눈이 까막눈이라서 그 면을 못 본다.

 

4절-5절: 세상 일반적으로 절친한 친구는 부모에게 안 하는 말이라도 친구에게는 잘 털어놓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친구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다 털어놓는 것이다. 그런데 교인끼리는 웬만큼 친해도 다 털어놓으면 안 된다. 왜 그러냐? 이상하게 말이 퍼진다. 말에서 말이 붙어서 불어난다. 또 잘못 듣고 전하게 되면 뒤집어져 버린다.

 

예수님께서 ‘내가 명하는 대로 하면 나의 친구라’ 말씀하셨고, 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하셨고, 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인하여 자기의 목숨이 버려진다는 각오로 자기 목숨을 초월하고 천국복음에 투자하고 산다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고도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면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이 무슨 사랑이냐? 아가페 사랑이다. 우정은 필레오, 부부는 에로스, 동족은 스톨게 사랑인데, 사람에 따라서 아가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의 씀씀이가 달리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속에는 아가페가 들어 있는 상태에서 사람에 따라서 에로스도 되고, 스톨게도 되고, 필레오도 나와야 한다. 아가페 없이 스톨게 필레오 에로스를 써먹는 것은 임시적 육적인 것밖에 안 된다.

 

그런데 부부 간에 보면 하나님의 아가페를 잘 모른다. 아가페 사랑은 영원한 것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니 부부 간의 사랑도 영원한 정신 사상, 영원한 지식 지혜, 영원한 도덕성으로 들어간 부부의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사랑을 하니까 인간 대 인간의 조건부로 들어간다. 이거 못 쓴다. 고쳐라. 그런데 고치는 사람이 쉽지를 않구나. 그러니 자꾸 눈에 보이는 면으로만 나간다.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살았던 그런 정신이 그대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둘이서 처음 처음에 만날 때는 행복하자고 했으나 살아갈수록 불행하다. 이건 아가페가 없는 것이다.

 

자꾸 어떤 조건을 만들어서 하는 것은 환경 따라서, 시간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자꾸 변질이 된다. 못 맞춘다. 부부사랑 십계명? 사람이 안 됐는데 십계명이면 뭐하고 백계명이면 뭐할 것이냐? 인조사랑 인간사랑 세상 속화된 사랑인데. 인격과 성품적으로 바로 됐다면 상황에 환경에 따라 사건에 따라 아가페를 깔고, 그 다음에는 스톨게니 필레오니 에로스니 이게 잘 나간다.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가페를 말한다. 그리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했는데 자기의 친구가 누군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자기의 친구가 누군지? 다시 말하면 개죽음 하지 말아라. 죽음도 개죽음이 있고, 고상한 죽음이 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생각을 해서 최고로 옳은 것으로만 취하고, 옳은 것으로만 나가야지 그렇지를 않다면 가치판단 평가를 왜 하는 거냐?

 

예수님께서 ‘나의 친구다’ 라고 하심은 ‘자기 목숨을 초월하고 천국복음에 투자하고 산다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으니 바로 이런 자들을 염두에 두시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친구에게는 뭐가 없다? 비밀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누구에게 친구처럼 말을 하셨느냐? 아브라함. 모세에게도. 이 분들은 하나님의 친구가 될 정도이다. 그만큼 잘 통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날 때는 그는 신처럼 된다. 그걸 알아야 한다.

 

본문에 성도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을 위해서 박해를 받을 때 진정 두려워 할 자와 두려워하지 말 자를 알게 했다. 즉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자는 자기 몸만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못하는 자들이다. 저 사람이 나를 해치려고 할 때 내 쪽에서 그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보통 내 쪽에서 박해자는 두려워하지를 말아야 한다. 마땅히 두려워 할 자는 그 박해자가 나를 죽인 후에 그 사람을 지옥에 던져 넣는 그런 권세자를 두려워하라.

 

그러면 성도에게 환난 핍박을 주기 전에 몸도 죽이고 영혼도 지옥에 넣는 권세자가 이걸 미리 막아주시면 안 될까? 나를 죽이기 전에 나를 해코자하는 저 사람을 몸도 죽이고 지옥에 넣는 일을 해 버리면 안 될까? 인간 보기에는 그렇게 생각이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상태, 신앙정신 상태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환난 핍박을 허락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더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시고자 하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면류관을 만들어 주려고.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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