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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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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4절-7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4절-5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 핍박을 허락하심은 우리를 더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시고자 함이다. 그러니까 첫째는 박해를 통해서 더 능력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시고자 함이 들어 있고, 두 번째는 더 큰 면류관을 주시고자 하심이 들어 있고, 세 번째는 후세의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심이 들어있다. ‘아,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믿어갔구나.’ 구약성경에 이런 게 다 있다. 네 번째는 환난 핍박을 준 자들에게는 응당한 보응을 주시고자 함이 들어있다.
그래서 표면적 인류역사의 흐름 속에서 성도의 구원을 위한 즉,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위한 이 구원역사는 알맹이요 역사의 주격이다. 일반역사는 표면적이기 때문에 소유적인 역사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온전을 위한 우리의 구원의 주격적 흐름이 들어있다.
보면 산천초목이고 나무고 강이지만 조금 더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이치와 법칙이 있다. 왜 그렇게 만들어 놨느냐?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연구해서 캐내서 세상을 네 생활에 혜택이 있게 법칙적으로 사용을 하라’ 함이 들어있다. 그 다음에 그 법칙을 넣어놓으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원 구원이치를 일반 자연 속에 넣어 놨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말씀에서 구원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 세상을 만든 것은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땅에 편만하라’가 들어 있는 것이니 이 세상 만물을 보고 구원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이걸 다 빼앗겼다. 모든 인간이 물질을 다스려야 할 텐데 물질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까 물질의 종이고 죄의 종이고 환경의 종이고 사망이 왕 노릇한다. 예수 믿는 자가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일반적인 면에서 미련하고 둔탁해진다.
인간이 만물에서 생명과를 따먹지 못한 채 외부적 표면적 연구개발이 얼마나 되어갈 런지 모르겠지만 복제인간을 만들면 어떻게 될까? 복제인간 속에 사람의 영이 있을까? 없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왜 그러냐? 인간이 인간을 복제로 만들어 놓으면 하나님이 보시고 ‘어? 네가 내 대신 인간을 만들었구나. 내가 그 사람 속에 영을 넣어주지’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인간을 만드는데 하나님과 합작이 되는 거다.
그렇다면 영혼 없는 인간이 어떻게 될까? 이건 피부 골각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영이 없으니 사자보다 더 무섭겠다. 호랑이보다 독사보다 더 무섭겠다. 사랑이 없다. 아가페가 없다. 일반사랑도 없다. 그리고 만일 복제인간이 우리처럼 부모를 찾는다고 하면 어떻게 찾느냐? 그렇지 않아도 부부끼리 어떻게 자식을 낳았던, 싸워서 낳던 부모사랑을 못 받아놓으니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느냐? 강퍅하다. 그런데 부모도 없이 나온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된다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는 성경을 기준해서 사회의 되는 그런 모든 것도 생각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런 데 동원 돼서 춤추지 말라 그 말이다. 그래서 우리교회 부모들은 아가페 사랑이 주축이 되어서 부지런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를 낳아야 한다. 사랑은 생명을 잉태하게 되어 있다. 사랑 없는 생명이 잉태되면 어떻게 될까?
세상에는 성도의 구원을 위한 주격적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설정된 역사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진리를 붙잡고 믿음으로 세상풍파를 이겨나가야 한다. 그러려니 못 깨닫고 모르면 안 된다. 인간이라면 인간을 잘 알아야지 모르면 사람노릇이 되겠느냐? 하나님 앞에 진리로 바로 선 인간이 참 인간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과 대화를 하신다. ‘네가 나 닮았구나. 네가 내 생각과 똑같구나.’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보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면서도 신앙이라고 하는 그 정신이 세상 물질에 가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하나님 아버지만 만나면 ‘나 돈 줘. 나 자동차 줘. 나 아파트 줘’ 한다. 이건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다. 귀신들 앞에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세상바람을 집어넣고 허영심 허풍심 영웅심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그래서 가만 보면 세상을 가지고 막 날뛰면서, 제각기 장기자랑을 하면서, 사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난리다.
우리는 신앙이라고 하는 질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이 크게 만들었던 적게 만들었던 그걸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신앙의 질이 하나님의 본질과 같으냐’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의 신앙의 질이 본질적으로 하나님 것과 같아야 하나님의 자녀지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 것을 이루라고 하니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이냐?
이것도 모른 채 자기의 타락적 성격, 자기의 타락적 성질도 못 고치면 은혜도 못 받고 분별도 없는 육적 신앙이 돼버린다. 눈으로 보이는 그 말이다. 이런 육적인 신앙을 갖고 있으면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휘말리게 되고, 휘말리게 되면 이거는 사건화 돼버린다.
예수님을 죽일 때에 로마군인들과 율법사들과 당시의 유대 종교인들이 한 통속이 돼서 예수를 죽였다. 천국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을 죽이더라. 그러면 오늘날은 어떤가? 일반개념으로 성경을 보니 성경이 일반 도덕성으로 보이게 되고, 이렇게 되니 교회가 이방종교인들과, 유교 불교 등과 머리를 같이 맞댄다.
그러면 소원 목적적으로 그런 신앙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그렇게 나가는 그들 속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천국복음의 이치가 심어지겠느냐? 안 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죽이고 들어간다. 안 받는다 그 말이다. 그런 교회가 한 두 교회냐? 이러면 진리성도를 모함하고 핍박을 주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청하게 되는 불쌍하고 처절한 사람이 된다. 역사로 보면 그렇게 한 유대인들이 로마의 구둣발에 멸망을 당했다.
진리생각을 가지고 참 교회를 찾기가 힘 드는 일인데 육에 속한 생각을 가지고서 세상에 있는 어느 교회를 다녀도 자기 주관에 맞는 교회는 하나도 없다. 그걸 알아라. 원리원칙상 교회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천국복음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향한 소원 목적이 교회에 들어오면 천국의 복음사상으로 바꿔놓는 게 교회이다. 주님의 이해타산 사고방식으로 바꿔놔야 한다. 그게 참 교회다. 그런데 교회에 사람이 오면 세상으로 처박아 버리니 이게 어떻게 교회냐? 십자가 달았다고 교회냐? 성경을 들면 다 참 교인이냐?
진리중심의 생각을 가지고 참 교회를 찾기란 참 힘 드는 일인데 하물며 세상 육의 생각을 가지고 자기 기준에 맞는 교회를 찾는다면 타락된 자기 기준에 맞는 교회 역시도 없다. 쉽게 말해서 어느 교회에서 싸우고 나가면 싸운 그 교인이 딴 교회 가면 안 싸우겠느냐? 또 싸우고 또 싸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교회가 인본주의로 해도 교인 하나마다 자기 주관대로 해주는 교회는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 했는데 예수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네 십자가나 똑바로 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너의 육의 생각, 부패성적인 옛사람의 성격 성질을 죽여야 그 다음에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들 수가 있지 자기의 더러운 성격 성질이 그대로 살아서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든다? 이건 아니다. 여기에는 사사건건이 원망이요 분쟁이요 불평이 나오게 돼 있다.
인본주의로 나가는 교회는 모두 자기 주장들을 펴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에게 맞출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제각기 믿고 모아서 ‘돈 내서 무엇을 합시다’ 해서 하고 가고 헤어지고 하는 것이다.
원칙상 교회는 세상 소원 목적을 가지고 들어와서 천국의 소원 목적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교회다. 교훈을 통해서 땅의 것을 하늘의 것으로, 썩는 것을 썩지 않을 것으로, 임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저질적인 것을 고차원적인 것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 교회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했으니까 예수님의 것으로 바꾸어진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들어가 있다 그 말이다.
자기를 예수님 것으로,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을 예수님의 것으로 바꿔 나간다면 자신이 모든 면에서 존귀 영광자가 된다. 쉽게 말하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면 그 반에서 선생님의 귀염을 받고 존영자가 되는 거다. 공부를 잘 하면 잘 할수록 올라가는 속도가 빠르다. 공부를 못하면 남은 다 올라가는데 뚝 떨어진다. 그러면 얼굴이 안 부끄럽겠느냐? 안 고쳐지면 그 사람은 물과 기름 같아서 스스로가 자꾸 외톨이가 된다. 남이 만드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자꾸 튕겨져 나간다.
오늘날 교회가 사람을 바꾸는 교회가 별로 없다. 내가 볼 때는 그렇다. 모이면 노는 클럽으로 만들어 버리고, 성경공부 한다 하면 그냥 문자적인 의미에서 해 버린다. 그런데 사람이 되는 것은 ‘속의 성격 성질 성분이 이질이냐, 본질이냐’ 하는 면에서 질이 다르고, 냄새가 다르고, 위치가 다르고, 어디 만큼 서 있는지 하는 게 있는 것이므로 그게 정확하게 나와야 자기가 ‘어디에 서야겠다’가 나오는 거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것으로 잘 바꿔놓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과 잘 통한다. 잘 통하면 친구처럼 대해준다.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 당신이 하실 일을 다 가르쳐 주신다. 성경으로 통해서 당신의 뜻을 잘 가르쳐 준다. 그러니까 안 속는 거다. 그 어떤 이단이 와도 안 속는 거다. 왜? 그 사람 앞에는 대낮같이 드러나 버리니까.
안 고쳐지는 사람은 세상 어디를 가도 부끄러운 꼴을 당하게 돼 있다. 그러니까 스스로가 자기의 꼴을 그렇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란 생각이 있는 거니까 세상 어디를 가도 그 사람은 불만이 나오게 돼 있다.
자기 사랑을 자기가 짊어지고 다니고, 자기 미움도 자기가 짊어지고 다니는 거다. 쉽게 말하면 못 고치는 사람, 안 고치려고 하면서, 예배시간도 잘 참석을 못하면서 우리교회보고 사랑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사랑이 뭔지 모르는구나. 주님이 사랑이 많으냐? 그 증거가 뭐냐? 그냥 죽어주는 것? 아가페의 교훈이 아니면 주님의 사랑을 못 나타낸다. ‘교훈의 정신이 이렇다’ 하는 것을 사건으로 보여주는 게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냥 죽는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불만이 나오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꾸 단체를 만든다. 그게 오늘날 거짓된 교회들이 하는 일들이다. 이단자들이 또 그러는 거고. 그렇게 하다 보니 집단이 또 하나 생긴다. 내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런 곳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집단이다. 자기들로서는 십자가를 높이 올리고 모여서 ‘예수 예수’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이 없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본질이 없는 것은 하나의 무리다.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제각각 소원 목적을 이루려는 하나의 무리다. 목적이 그렇게 들어가니 아무리 성경을 들고 다니고 십자가를 붙여도 그거는 교회가 아니다. ‘지옥 간다. 천국 간다’ 그 말이 아니라 교회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할 짓이 아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 말이다.
옳은 신앙노선을 발견한 성도가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비진리요 세상 육적 인본주의 세상주의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곳을 조용히 나와야 한다. 인사할 필요가 없다. 왜? 인사하러 들어가면 붙잡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나오지도 않고 그 안에서 자기편을 만든다고 공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진리신앙이 아닐 수도 있다. 그걸 잘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진리이치를 가지고 인격적으로 높이지도 못하면서, 쉽게 말하면 소금도 아니면서 간을 맞추려는 건 안 된다.
특히 목사님들은 자기를 고치지 못한 성격 성질에 의해 사단 마귀의 조종을 받게 돼 있다. 그러면 자기와 포섭된 그 사람들도 의견충돌이 또 나오게 돼 있다. 왜 그러냐? 의사단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다른 곳으로 또 가게 된다. 그러면 이게 무슨 꼴이냐? 교회는 그런 게 아니다.
6절-7절: 새 중에 흔한 새가 참새이다. 참새는 흔한데, 한국에서는 길거리의 포장마차에서 술안주로 먹기도 한다. 식용으로도 쓴다. 데나리온은 로마화폐의 명칭으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16이다. 그러니까 참새가 그만큼 싸다 그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싸게 팔려도 그 때로 보면 로마군인들이 참새를 술안주로 썼을까? 참새는 못 기를 것이다. 기르려고 하면 성질이 급해서 얼마 못 살고 죽을 것이다.
참새는 아무리 싸게 팔려도 하나님께서 날아다닐 수 있는 생명으로 만들어 놨다. 참새 다리는 굉장히 약하다. 그런데 참새의 피가 얼마나 뜨거운지 몰라도 겨울철 영하의 기온에 그 가는 다리가 안 얼고 총총거리며 잘 돌아다닌다. 신기하다. 사람은 얼어 죽는데 왜 그런 새들은 안 얼어 죽느냐?
만일 하나님께서 지구상에 참새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들은 참새 떼가 뭔지 모를 것이다. 또 아닌 말로 인간의 표현으로 참새가 멸종이 된다면 인간들이 보기에는 멸종이 됐으니까 하나님께서 멸종이 된 것을 모를 것 같은데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이 이 참새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참새 떼가 지구를 다 덮어버렸다고 해도 하나님이 모르실까? 어떤 사람이 참새를 포장마차에서 양념 고추장에 몇 마리나 찍어 먹었는지 하나님은 모르실까? 모르실 리가 없다. 다 아신다. 그러니까 마귀가 지은 것은 하나도 없다.
성경에 가룟유다를 보고, 바리새인들을 보고 아무리 ‘마귀새끼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해도 마귀가 지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천지만물 온 신령계와 물질계를 통틀어서 마귀가 창조자처럼 지은 것은 하나도 없다. 마귀 자기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왜?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기르기 위한 영물로 마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걸 시인을 안 하면 마귀는 악신이 되고, 하나님은 선신이 되는 하나님이 둘이라는 이론이 돼버린다.
그런데 신학교 다닐 때 신학생들 중에는 ‘하나님은 선한 분인데 어떻게 악한 마귀를 만들었느냐?’ 한다. 우리의 영적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 영물인 마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계: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귀를 무저갱이 넣었다 뺐다 한다. 지금 넣으면 되는데 안 넣고 있는 것은 우리의 영능의 실을 키워주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든 모든 피조물들이 마귀의 말을 듣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들어있는 거다. 마귀가 지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에게 ‘너는 처음부터 마귀라’ 했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했다고 해서 말하자면 참새는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가룟유다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마귀가 만들었다는 말이냐? 이들은 모두 마귀의 자식들이라서 참새보다 못한 사람들이냐? 아니다. 그런 말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성을 모르면 어린아이들처럼 글자 그대로 보고 말하게 된다.
그러면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려도 그 하나라도 잃어버린바 되지 아니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1. 사람들이 참새를 잡으려고 틀을 놓아도 함정을 놓아도 하나도 안 잡히게 하신다는 말이고, 설령 잡혔다고 해도 다 도망가게 해 주신다는 말이다? 2.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조정하신다는 말이다? 3. 참새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간다는 말이다? 정답이 있느냐? 정답은 다음 주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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