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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68 추천 수 0 2022.03.07 13: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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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2:6-9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26-9: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6: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려도 하나님 앞에 그 하나라도 잃어버린바 되지 아니한다 하는 것은? 1. 사람들이 참새를 잡으려고 틀이나 함정을 놓아도 안 잡히게 하신다는 말씀이고, 설령 잡혔다고 해도 다 도망가게 해 주신다는 말인지? 2.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조절하신다는 말씀인지? 3. 참새가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대로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간다는 말인지? 어느 게 맞느냐? 2, 3.

 

이런 경우가 있다. 어린아이가 엄마 태에서 죽어서 나오는 경우도 있고, 또 나오자마자 죽는 애도 있고, 나와서 조금 크다가 죽는 아이도 있고, 한참 사랑받을 때 죽는 아이도 있고, 그 조그마한 애가 죽지 않고 어른이 돼서 돈도 벌고 지상에서 할 일을 많이 하고 간다고 하면 사람구실을 다 하고 가는구나한다. 어쨌든 어린아이가 죽으면 아무 것도 못하고 안 하고 죽는 거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옳겠느냐?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나님의 뜻에 가깝도록 생각이 되고, 또는 어떻게 생각을 해야 자기의 이룰구원에 유익하도록 긍정적으로 건설적으로 신앙 믿음에 보탬이 되도록 들어가질까? 어떻게 생각을 해야 문제가 풀리겠느냐?

 

우리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런 일을 주권적으로 또는 허용적으로 일으키지를 않는 거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게 하고 우리로 경험케 하고 그 슬픔을 당하게 하는 것은 우리로 뭔가 깨닫게 하려는 것인데 왜 그런 거냐?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죽었구나.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구나그렇게 생각만 하면 되는 거냐?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겠느냐?

 

그 어린아이가 할 일을 다 하고 간 거냐, 다 못 하고 간 거냐? 다 못 하고 간 것이다. 다 못 하고 갔다는 생각은 안 믿는 사람도 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나가는 내 입장에서는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되겠느냐? 안 된다.

 

영의 눈으로 보면 말하자면 일찍 죽은 그 어린아이는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간 것이다. 그 어린아이가 내가 할 일을 다 하고 간다그런 건 아니지만 아는 우리 입장에서, 생각을 할 수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 어린아이가 할 일을 다 하고 가는구나.

 

그러면 무슨 일을 했다는 거냐? 그 어린아이가 눈에 보이는 가견적인 일을 해 놓은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 어른들에게 교육이라든지, 인간의 출생이나 생존이라든지 인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구나. 그래서 사람이 죽는 것은 어떻게 죽었던 일단은 안 좋은 것이지만 죽은 시체라도 산 사람의 입장에서는 슬프다고 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냐?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먼저는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구나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신앙적으로는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에 빨리 이룰구원을 이루자하고 깨달으라고 죽음이 있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을 한다면 농부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 일을 빨리 끝내야겠다하듯이 나이 든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 , 나에게도 죽음이 온다. 그러니 죽기 전에 빨리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설령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큼은 이뤄놔야 되겠다하고 생각을 해야 한다. 이게 긍정적이고 건설적이고 아주 고상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잔칫집보다 초상집을 가라고 하는 거다. 이제 말씀드린 그런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인생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세상 소원 목적 부귀 명예 영광성을 빨리 이루자는 쪽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 우리의 깨달음과는 완전히 180도로 뜻과 의미가 다르다. 그렇게 죽기 전에 뭘 이뤄놓으려고 하니 그게 얼마나 힘이 드느냐?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을 보고 깨달을 것이 있으니 우리가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그 면에는 내가 어느 환경적 상황이나 사건이나 어느 길을 가도, 어느 곳에 있던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입을 수 있는 환경적 조성은 다 있다. 농사를 지어도 그렇고, 사물을 봐도 그렇고, 장사를 해도 그렇고 전부는 우리의 이룰구원의 소재들이다.

 

어린아이의 죽는 죽음 그 자체도 부모에게 인생을 깨닫게 한다. 어린아이가 죽은 걸 보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생을 생각을 해야지 괜히 죽은 아이를 놓고 펑펑 울면 몸 아파지고 머리 아프고 하게 된다. 모든 만물이 그렇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적절한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인간을 생산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부정모혈로 결합을 시켜서 인간을 통해서 생산을 하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 이치적으로 생각을 할 때 열매를 많이 거두려면, 좋은 열매를 거두려면 밭을 돌멩이가 없이 부드럽게 잘 갈아엎어야 하고, 그리고 최고의 좋은 씨를 심는 게 농부의 심정이다. 그 이치를 왜 가르쳐 주느냐? 인생도 마찬가지다. 시집장가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교훈적 차원도 마찬가지다. 이치는 변함이 없는 거다. 자녀를 기를 때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이 뜻에 맞게 키워야 한다.

 

모든 사물의 이치를 가지고 우리 사람의 마음을 많이 깨닫게 해 준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것들을 통해 깨닫고 고상해진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만물의 이치를 쓰지를 못하니 사람이 미련해지고 어리석어서 스스로 고통을 만들고 산다.

 

우리가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고통과 죽음이 왜 왔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선악과 먹은 지식, 선악과 먹은 지혜, 거기에서 나온 일반적인 도덕성, 거기서 나온 옳다고 하는 자기 기준의 판단, 이게 자꾸 자기에게 고통이 된다. 갈수록 고통이 불어난다.

 

가시나무가 땅에 떨어져서 처음에 새싹이 날 때는 예쁘다. 그런데 그게 점점 커서 가지를 뻗고 나올 때는 사람을 찌르고 피가 나게 하고 고통을 준다. 그러니까 이미 다 큰 후에는 얼마나 고통스럽느냐? 그 이전에 이게 무슨 씨며, 자라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그 씨의 성질을 안다면 그렇게 안 되도록 조치를 하게 된다. 우리에게 그런 지혜를 줬다. 예수 믿는 차원도, 설교의 차원도, 교훈의 차원도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오죽하면 성경에 영을 심사하라고 했겠느냐? 영이라고 해서 다 같은 영이 아니다. 전문가가 아니면 모르는 거다.

농사짓는 사람 중에 차조색깔과 가조색깔을 아느냐? 차조색깔은 약간 검은 색이 나고, 가조색깔은 노란색이다. 그런데 그 둘을 놓고 비교를 하지 않으면 모른다.

 

7: 그만큼 우리에게 신경을 쓰시고 관심집중을 하신다는 말씀이요, 왜냐하면 신령천국을 상속받는 사랑하는 아들들이고, 현세에서 이룰구원을 영능의 실력적으로 잘 이루고 가야 할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다면 신령천국이 있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좀 더 올라가면 거룩한 성도들이 없는 신령천국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더 올라가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놓지 않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나는 하나님이다해도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지금 천군천사가 있다는 것도 우리의 개개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고 우리에게 관심을 쓰신다는 의미가 그 안에 들어있다. 또 사단 마귀가 있다고 하는 것도 우리에게 관심집중이다. 우리의 신앙 믿음에 영능의 실력을 키우기 위한 것. 그러니까 모든 산천초목이나 우주만물 천계가 돌아가는 것은 전부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 전부가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너 하나하나에게 관심이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생각해보면 한 마리의 참새보다도, 참새가 한 트럭이 있다고 해도 그 많은 참새보다 자기가 확실히 귀하냐?

 

그러니까 너는 참새보다 귀하다하는 건 하나님의 관심집중이 들어있다는 것이고,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나니하는 것은 그만큼 세밀적으로 관심집중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오늘아침에 우리의 머리카락이 빠진 개수를 아실까? 파머 하다가 머리털이 빠진 숫자를 아실까? 뭘 말하고자 하는 거냐? 하나님께서 너에게 관심집중을 말한다.

 

8-9: 시인(是認)은 인정한다는 것. 문제는 무엇을 인정을 하는 것이냐?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누구든지하는 여기에는 우리 모두가 포함된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정하면. 그러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적으로 시인하는 것. 온 인류의 구원자는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 성경을 구구절절 모른다고 해도 온 인류의 구원자는, 나의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이건 대단한 거다. ‘온 인류라는 여기에는 벌써 자기 신앙의 절대적인 게 들어있다. 누가 빼고 박고 하는 게 없다. 아주 절대적이다. ‘온 인류의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하고 존재적으로 시인하는 거.

 

두 번째는 그 분의 말씀을 믿는 것. 그 분의 말씀은 전부가 예언이요, 그 예언성은 시대적 사건 예언도 들어 있지만 그 사건이 결과적으로 오기 전까지의 진행 속에 우리 개개인마다 살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오는 사건이 있고, 지역적으로 오는 사건이 있고, 세계적으로 오는 사건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그 예언이 다 들어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크고 작은 사사건건을 다 이기려면 영능의 실력을 네가 준비하라하는 것. 영능의 실력이란 사건이라는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정신 사상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거다. 다른 말로 하면 시대적 유행바람이다. 그런 건 영원히 가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른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모르면 그런 데서 자꾸 흔들린다. 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바람이 있다.

 

각자 자기는 좋다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이 다가오고 있는 거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거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 자기도 그 쪽으로 가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다. 성경은 그걸 깨닫게 해서 자기가 거기에 들어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너는 그런 일을 당하지 말아라하는 게 성경이다.

 

이것을 교회적으로 보면 정신 사상적으로 악령의 종류들, 귀신의 운동들, 사단 마귀 짓이 많이 있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이 기준이 돼서 예수 믿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옛사람의 부패성인데 거기에는 얼마든지 악령류들이, 오만 귀신 잡탱이들이 그 사람의 고치지 못한, 바꿔지지 못한 성격과 성질을 붙잡고 여러 가지 자기의 쑈를 만들어낸다. 이게 다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부르는 것들이다.

 

기독교는, 우리는 성령의 눈을 가지고 영적 세계를 보는 눈이다. 그러나 영이 다 똑같지가 않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고 해서 다 똑같으냐? 말은 똑같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믿고 사는 소원 목적은 제각각이다. 그 때 그 배후에 어떤 영이 운전을 하고 있는지?’ 그게 있는 거다.

 

길을 갈 때 같은 길을 가지만 소원 목적성은 다 각각 다르다.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길은 같은데 정신 사상 면에서 그게 보여져야 한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 같이 예수 믿는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무리를 향해 되돌아서면서 내 제자가 되려면 뭐 뭐 뭐를 내버리고 오너라했느냐?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 ‘부모 형제 처와 자식 그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 다시 말하면 그들을 미워하라.

 

이건 일반 사고방식으로는 말이 안 된다. 이 말이 일반 상식적인 지식을 가지고 해석이 되느냐? 안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들어가면 맞다. 톱니가 딱 맞아지듯이 딱 맞아 들어가는 거다. 억지가 아니다. 성경은 억지로 푸는 게 아니다. 성경은 이치에 딱 맞는다. 그래서 말씀을 외침에도 이치가 틀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

 

그 분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뜻을 말하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의 소원 목적성, 그 분의 간구성, 주님의 취미성, 주님의 추구성, 주님의 오각의 오감성 이런 걸 다 옳다고 인정을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 그러냐? 그 분의 언행심사 전부는 하늘의 것이고, 영원한 것이고, 고상한 것이고, 타락되지 않은 것이고, 사망적이 아닌 생명적인 것인데, 그것을 다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를 배우는 것이다. 배워서 지식이 전환되면 닮는다 그 말이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 분의 하늘나라의 말씀을 영접한다는 뜻이고, 말씀 영접은 하나님의 뜻을 영접함이고,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면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으로 변화가 된다. 그러니까 질이 하나님 쪽으로 변화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언행심사가 온전히 변화되면 그 사람의 모든 이해타산 가치평가성 판단이 주님처럼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주님의 지식을 받아들이면 주님의 성품이 되고, 주님의 성품이 되면 가치판단 평가성이 성령님이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내리는 것처럼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언행심사는 다 영원 궁극적인 구원에 해당이 된다. 왜냐? 이 사람은 만물의 존재목적을 알기 때문에, 잠깐 있다가 가는 사건 환경의 목적도 알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목적도 알기 때문에, 인간의 출생목적도 알기 때문에.

 

:에도 보여주는 게 생명과가 먼저 나온다. 생명과를 따먹으면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땅에 편만하고. :에도 그렇다. 그래서 죄 중에 제일 큰 죄는 일반적으로 보면 사람을 죽인 죄인데 하나님 앞에서 보는 죄는 선악과 따먹은 죄다. 이거는 하나님 앞에 저주가 들어간다.

 

다윗이 왕이 됐어도 범죄를 했다. 사람을 죽이고 신하를 죽였다. 물론 하나님께서 죽이라는 것은 전쟁에서 죽이지만, 그게 아니라 다윗이 자기가 스스로 신하를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렇지만 이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는 것보다는 가볍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다음에는 사기 거짓말 시기 질투 미움이 나온다. 사람 죽이는 건 아예 새끼를 달고 나온다. 그런데 다윗은 비록 사람을 죽였지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지옥은 안 가지만 이룰구원 차원에서 계속 얻어맞는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즉, 이질적인 지식을 먹게 되면 사람이 통째로 망한다. 이걸 에덴동산에서 다 가르쳐 줬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으니 결국 죽는데, 죽기까지 맨날 너 때문에 못살겠다.’ 전부가 너 때문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너 때문이라고 하게 된다.(아담이 하와에게) ‘너 때문에하는 사람은 전부는 선악과 따먹는 정신이다.

 

이렇게 들어가니 그 다음에는 형제끼리 살인이 나온다. 형제끼리 살인이 나오는데, 가인이 살인한 그 마음을 말하는 거다. 그로 인해 땅에 가시가 돋는다는 것은 사람의 이룰구원 면을 죽여 버리면 그 사람 속에는 가시가 나게 된다는 것. 못된 생각, 죄 된 생각이 나오게 된다. ‘안 그렇다가 아니라 원리가 그렇다.

 

그 마음이 왜 그렇게 됐느냐? 인간표현으로 보면 가인이 예배를 잘못 드렸구나. 예배 잘못 드리면 은혜를 못 받는다. 은혜를 못 받는다는 것은 가시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거다. 그렇게 되면 미움이 나오고 찌르고 죽이게 된다.

 

사람을 죽인 자는 땅에 고정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자기 마음 자체가 죄 때문에 가만히 못 있게 된다. 그러니까 매일 달아나야 한다. 도망을 다녀야 한다. 유리방황이다. 유리방황하게 되는 원리다. 모든 원리를 성경에서 볼 수가 있다.

 

가치판단 평가성이 주님처럼 나오는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면서 왜 빨리 변화가 되지 않을까?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느냐? 파고 들어가면 자기 자신이다. 자기가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을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세상의 인간적인 이해타산 사고방식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이걸 못 느껴도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그걸 안다. 어린아이가 고집이 센데, 그 어린아이는 자기가 고집이 센 걸 모른다. 그러나 어른이 보면 그 어린아이가 고집이 센 걸 안다.

 

구원이치의 말씀을 늘 듣고, 사건을 경험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고,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영적인 말씀에 민감해지기 시작하면 깨닫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을 하나의 종교적인 지식으로만 알지 말고 말씀이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일단은 지식의 변화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씨를 심으면 금방 싹이 나는 게 아니듯이 이 진리를 듣고 빨리 바꿔지는 사람은 희귀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진리를 지식적으로 한 번 듣고 내가 순교를 하겠다고? 옛말에 빨리 뜨거워진 냄비는 빨리 식는다고 했듯이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격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쉬 뽑혀서 나가게 된다.

 

잘못된 지식을 받으면 변화가 안 된다. 옳은 것을 받으면 자꾸 옳은 것으로 옳은 것으로 물려 들어가게 된다. 이러면 변화가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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