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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82 추천 수 0 2022.03.08 16: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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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2:28-3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대구샘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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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4VKFT_X8DJM 

성경본문 : 마가복음 12:28~34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창조절 아홉째 주일, 2021년 10월31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예수님의 공적인 삶은 3년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습니다. 활동 지역 범위도 좁습니다. 북쪽으로는 갈릴리 호수이고, 남쪽으로는 예루살렘입니다. 거리가 120여km에 불과합니다. 그의 공생애를 압축하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하여 성지 순례 차 들린 예루살렘에서 끝났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교 고위층들이 볼 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위험천만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과 민중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그를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말리는데도 예수는 굳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일주일간 머물게 됩니다. 예수의 운명에서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막 11장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습니다. 전국각지에서 순례객들이 모이는 그곳에는 사람들이 늘 붐볐습니다. 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런 종교 편의시설은 수익사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좌판을 뒤엎으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 이 소동을 접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다만 예수를 향한 민중들의 지지가 남달라서 자신들의 음모를 공개적으로 진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성전 소동이 벌어진 이후 당분간 예수님은 여러 신앙적인 주제를 놓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 12:28b) 계명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그가 답을 몰라서 이렇게 질문하는 건 아닙니다. 그는 서기관, 그러니까 유대교 신학자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내용을 예수님에게서 확인받으려는 뜻으로 이렇게 질문한 게 아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친절하게 대답하십니다. 그 내용이 그 유명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30~3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헬라어 성경과 루터 성경과 영어 성경 KJV의 뜻을 살려서 제가 개인적으로 다시 번역했습니다.

 

당신이 간절한 마음과 자기를 바친다는 생각으로, 또한 지극 정성스러우면서도 강력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적이며, 당신 이웃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그다음입니다. 이 둘보다 더 큰 계명은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은 신 6:4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 구절은 “쉐마, 이스라엘”로 시작합니다. 쉐마(???????)는 “들으라.”라는 뜻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레 19:18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 유대교 신학자는 맞장구를 쳤습니다. 세부적인 표현에서 약간 다릅니다. 이 신학자의 표현이 더 적극적입니다. 3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유대교 신학자는 이웃 사랑에 관한 항목에서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이라는 표현을 보충했습니다. 번제물은 유대교의 전통 제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련된 종교의식보다도 이웃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를 기특하게 생각한 탓인지 예수님은 이 율법 학자를 칭찬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근본으로 돌아가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의 핵심이자 근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유대인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핵심과 근본을 안다고 해서 그 내용대로 살기 힘들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어도 대다수 사람은 알게 모르게 거짓말을 하면서 삽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밑지고 파는 겁니다.”라는 말은 거짓말이겠지요. 살다 보면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저 사람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방향을 잡기 힘듭니다. 이럴 때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군더더기를 빼버리고 삶의 근본만을 붙드는 겁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지, 왜 살지, 우주가 얼마나 크지, 죽음 이후는 뭐지, 등등의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삶의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입니다. 그 근본을 붙들지 않으면 삶의 왜곡과 변질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내용이 ‘토라’로 불리는 모세오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아주 광범위하고 세부적입니다. 오늘날 문명국가에서 통용되는 헌법과 법률의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키우는 소가 이웃집 밭에 들어가서 농작물을 망가뜨렸을 때 어떻게 배상해야 하는지,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야 하는지도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런 세부사항에 매달리다 보니 정작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관념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법의 근본정신은 사라지고 그 해석으로 옥신각신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유대교의 제사 의식은 아주 정교합니다. 제사 바치는 성소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제사장 복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희생제물의 상태가 어떠해야 하는지 등등, 오늘 우리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꼼꼼하게 규정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분향 제단에 관한 규정은 출 37:25~29절에, 번제단 규정은 출 38:1 이하에, 제사장의 옷에 관한 규정은 출 39:1 이하에 나옵니다. 레위기는 27장 전체가 이런 규정 목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온갖 제사 의식을 정교하게 다듬었습니다. 그런 종교의식에 매달리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하나님 사랑이라는 근본은 사람들에게서 잊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순환입니다. 근본이 약해지니까 부수적인 데에 매달리게 되고, 부수적인 데에 매달리다 보니 근본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예수 당시의 유대교와 오늘 대한민국 교회는 다를까요, 비슷할까요?

 

오늘 이야기의 병행구가 눅 10:25 이하에 나옵니다. 질문이 약간 다릅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의 대답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오늘 우리 설교 본문에 나오는 내용과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 계명대로 살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비슷한 내용입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에게 다시 이웃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웃이 누군지 알아야 사랑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닙니까. 원수를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자기 동족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악인이 아니라 착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게 내 이웃과 아닌 자를 구분하는 데에 열을 올리다가 ‘이웃 사랑’이라는 근본에서 멀어졌습니다. 오늘날 잘 먹고 잘살려고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삶의 근본을 놓치는 일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원래 이기적이고, 기만적이며, 배타적이기에 삶의 근본을 놓친 게 아닙니다. 다른 민족도 그렇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생활도 그렇고 교회 생활에서도 근본을 놓치기 쉽습니다. 교회의 근본이 무엇인지 들어보셨는지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론의 근본에서 볼 때 한국교회에 만연한 개교회주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대형교회와 미자립 소형교회가 한 나라 안에 존립할 수 없습니다. 지난 목요일 10월28일 대구 경북 지역 에큐메니컬 목사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영남신학대학교 윤리학 전공 은퇴 교수도 참석했습니다. 그분과 잠시 대화하는 중에 장로교 통합 측 총회 결정 내용 중에서 한 가지를 전해 들었습니다. 목사의 이중직을 허용하기로 했다는 내용입니다. 목사가 다른 직업을 병행해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신학적으로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 현실론에 근거하여 결정한 것이겠지요. 교회가 재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해서 이미 많은 목회자가 이중직으로 삽니다. 택배기사나 대리기사 일을 합니다. 카페 운영자들도 있습니다. 모든 직업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이니 목사가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물론 없습니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개교회주의에 묶여서 미자립교회 목사 생활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장로교 통합 총회에 속한 전체 교회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자립교회 문제를 남의 일로 생각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닙니다.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에 한국교회가 찌든 겁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 생활에서도 그렇고, 일상생활에서도 그렇듯이 세월이 흐르면서 끼었던 군더더기를 매 순간 조금씩이라도 걷어내야 합니다. 그럴 때 영혼의 성숙이 일어나고, 현실에 안주하면 영혼의 성숙은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심을 기울인 유대교 신학자에게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옳습니다.

 

종교개혁 504주년

 

오늘은 종교개혁 504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다른 게 아니라 복음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세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이라는 뜻의 라틴어 ‘솔라 스크립투라’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에서 무엇이 기준이냐, 하는 신학 논쟁 가운데서 나온 개념입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성경만이 아니라 교회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생성 역사에서 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교회라는 구체적인 공동체 안에서 생성되고 보존되고 평가되고 선택되는 과정을 통해서 경전의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전통에 근거해서 요즘도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말을 성경의 가르침 못지않게 중요시합니다. 루터는 이런 성경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일단 경전이 결정된 후에는 성경에만 모든 권위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지난 교회 역사에 허다했고, 그게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솔라 스크립투라’ 전통을 따르고 있을까요? 아니면 세속적인 경제 논리를 더불어서 따르는 건 아닐까요? 성경은 종교적 교양을 쌓기 위한 교재일 뿐이고 실제로는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 시대정신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건 아닐까요? 그걸 누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가톨릭 교회보다 우리가 더 떳떳하다고 말할 자신이 없는 건 분명합니다.

 

2) 솔라 피데- 오직 믿음이라는 뜻의 라틴어 ‘솔라 피데’는 칭의가 믿음만으로 가능한지, 아니면 행위도 필요한지에 관한 논쟁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건강하게 보이는 가르침입니다. 믿음만 좋지 실제의 삶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세상에서 얄미운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나 불교보다 신뢰가 떨어진다는 말을 우리가 종종 듣습니다. 그 이유는 개신교회가 본받을만한 행위가 없는 종교집단으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개신교회 신자들이 가톨릭이나 불교 신자들보다 더 부도덕한 건 아닙니다. 사회봉사나 돌봄 영역에서 실제로는 개신교회가 더 적극적입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서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일부 대형 개신교회의 반사회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칭의에는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의 칭의를 절대적인 사건으로 보았기에 인간의 착한 행위가 거기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인정받는다고 말입니다. 비유적으로, 착한 사람만 가을 햇살을 받고 악한 사람은 못 받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만 맑은 공기로 호흡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의라는 절대적인 사건에서는 ‘오직 믿음’뿐이라는 루터의 생각이 옳다고 봅니다. 다만 그가 말하는 ‘솔라 피데’ 개념에는 이미 행위까지 포함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3) 솔라 그라티아- 오직 은총이라는 뜻의 라틴어 ‘솔라 그라티아’는 세 가지 중에서 가장 핵심적입니다. 루터는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질 뿐이지 우리 업적에 대한 보상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당시 가톨릭교회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에만 의지하면 안 되고 거기에 상응하는 업적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한 복음이 다시 율법 신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복음이라는 말을 쏟아내면서도 그 내면에는 율법주의가 팽배합니다. 목사들도 목회 업적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런 업적이 떨어지는 목사는 회사 경영 실적을 올리지 못한 CEO가 이사회에서 사퇴 압력을 받듯이 당회에서 사퇴 압력을 받습니다. 방법이야 어쨌든지 목회 업적을 쌓은 목사는, 즉 교회를 부흥시킨 목사는 무조건 인정받습니다. 노회와 총회의 교회 정치에서도 막강한 실력을 과시합니다. 한마디로 못할 게 없습니다. 개신교의 교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종교개혁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사랑하신다면 우리가 모르는 방식과 모르는 순간에 그런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종교개혁의 근본으로 부단히 돌아가는 겁니다.

 

유대인 신학자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신앙의 근본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의 삶에서 무엇이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오해도 많고, 그 실천에서 시행착오도 적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어도 사랑의 능력이 더 강해지는 게 아니라 제자리에 머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유대인 신학자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질적으로 영혼의 깊이에서 받아들이고 그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예수님의 판단과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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