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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서기관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80 추천 수 0 2022.03.08 16: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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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2:38~4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대구샘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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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서기관

막 12:38~44,

창조절 열째 주일, 2021년 11월7일

 

오늘 설교 성경 본문에는 짧은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입니다. 과부를 칭찬하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서기관에 대한 비판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신상에 이롭지 않은 행동입니다. 그 비판이 너무 노골적인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한 비판인 마 23:3~7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조금 더 보십시오. 마 23:13절에서 이렇게 비난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가 있으리라는 표현이 마 23장에 여러 번 반복됩니다. 27절에서는 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직격’합니다. 예수님은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하시는 걸까요? 그들이 그렇게 몰염치하고 파렴치한, 그야말로 인간말종인가요?

 

서기관은 율법 교사로도 불립니다. 유대 역사에서 전통 깊은 엘리트 계급입니다. 당시에는 글자를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다루는 전문가이기에 유대 사회에서 지적인 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들인 셈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들은 유대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주축 세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순간에 산헤드린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마 26:57절에 따르면 그곳에 대제사장 가야바와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였고, 막 14:53절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판단했습니다. 사형 선고입니다. 이런 일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권력이 막강했다는 뜻입니다.

 

서기관을 오늘날의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판사나 국회의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들 중에서 수준이 안되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인간 세상의 어느 집단에나 그런 이들은 있습니다. 교수 사회에서도 이상한 사람이 있고, 목사나 신부나 승려 중에서도 기본이 안 된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대법관을 존경하듯이, 아니면 최소한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듯이 당시 사람들은 서기관을 존경하고 부러워했습니다.

 

예수님은 38, 39절에서 서기관의 행태를 세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닙니다. 둘째,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받습니다. 셋째, 회당과 잔치에서 상석을 차지합니다. 매우 사실적인 묘사입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판사와 의사는 제복을 갖춰 입습니다. 일종의 ‘긴 옷’입니다. 그 옷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독일교회에서 목사는 모두 고유한 목사 가운을 걸치고 예배를 인도합니다. 문 대통령이 이번 유럽 순방에서 만났던 교황이 입은 옷은 대표적입니다. 문안을 받고 상석에 앉는다는 말도 그 사람의 지위에 대한 예우니까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서기관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어서 그들의 위선적인 행태를 4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이 서기관은 정말 뻔뻔스런 행동을 한 겁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과부는 고아와 더불어 법률적 보호 대상이었습니다. 출 22:22~23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이런 말씀을 이미 잘 알고 있던 서기관들이 과부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강탈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게 나름 합법적인 방법으로 자기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율법 전문가니까 그가 과부에게 조언해주면서 과도한 돈을 요구했을지 모릅니다. 물질을 향한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별로 없습니다.

 

그 순간에 서기관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유난히 길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거의 습관적으로 그런 기도를 드렸을 겁니다. 위선이 몸에 밴 겁니다. 그의 내면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의 눈에는 코미디처럼 보일 겁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본심과 정체를 감추려니까 불행한 사람이겠지요. 예수님은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라고 단정합니다. 공동번역은 더 실감 나게 번역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합니다. 첫째, 서기관만 왜 더 엄한 벌을 받아야 합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만큼만 벌을 받아야 하지 않나요? 더 엄한 벌을 받는다면 공정한 처리가 아니지 않을까요? 서기관이라는 자리가 문제입니다. 존경받고 주목받는 자리이기에 그 사람의 위선은 많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합니다. 적당한 예인지 모르겠으나,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연예인들이 자동차나 냉장고나 화장품을 선전하면서 최상의 행복을 구가하는 듯한 연기를 보이면 대중들도 그런 방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으려니, 하고 생각합니다. 속는 겁니다. 대중들은 정치 지도자들의 선전·선동에도 열광합니다. 속는 겁니다.

 

구약성경 중에서 유대의 왕정 역사를 다루는 전기예언서에 가장 자주 나오는 문구의 하나가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더라.”입니다. 대다수 왕이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왕들이 유독 악한 인간이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은 높은 지위를 감당할만한 능력이 본래 없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대통령 일을 제대로 감당할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이며, 대법원장 일을 제대로 감당할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본래 능력이 없는데도 주변에서 부추기니까, 또는 자기 욕심으로 높은 지위를 향해서 돌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팔복’(마 5장)에서 가난한 자가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서기관은 더 엄한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둘째, 서기관들이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더 엄한 벌을 받게 될까요? 그렇다고 믿기는 힘듭니다. 법망만 피할 수 있다면 아무리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천수를 누립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끌어모은 사람이 더 불행해진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돈을 끌어모으지 못한 사람이 더 불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실상이 이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근거로 서기관이 더 엄한 벌을 받는다고 말씀하실까요? 무엇을 근거로 가난하고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걸까요? 이런 주제의 말씀은 복음서 곳곳에 나옵니다.

 

눅 14:7~11절에 잔치 자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잔치가 벌어지고, 초청받은 손님들이 왔습니다. 상석에 앉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낮은 자리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눅 14:11절이 아주 인상 깊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이와 다르게 작동합니다. 자기를 높여야만 겨우 자리를 보존하고, 자기를 낮추면 한정 없이 낮아집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를 사람들에게 선전합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우리는 강요받고 유혹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 경험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신 걸까요?

 

잔치 자리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서 눅 14:12~14절에 잔치 초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친구나 형제나 부자 이웃이 아니라 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와 장애인을 초대하라고 했습니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그 잔치 주인에게 오히려 복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현실을 몰라서 너무 이상적으로만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일부러 힘들게 하거나 삶을 모호하게 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를 삶의 깊이로 끌어들이십니다. 그 깊이로 들어가지 않으면 예수님 말씀은 비현실적으로 들릴 겁니다. 그 삶의 깊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4)라는 표현에 놓여 있습니다. “의인들의 부활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실행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그 ‘때’는 바로 지금일 수도 있습니다. 그 구원 실행의 ‘때’를 아는 사람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까지 기꺼이 환대하고, 나아가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말씀, 즉 서기관이 더 엄한 벌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불쌍한 서기관을 여러분에게 다시 소개합니다. 그는 긴 옷을 입고,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받고, 회당이나 잔치 자리에서 상석을 차지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에게 환영받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그럴듯한 인생입니다. 진짜 그런가요? 그가 행복해 보이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눈에는 오히려 불행해 보입니다. 주목받지 못하거나 환영받지 못하는 순간을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들은 눈만 뜨면 사람들을 찾아다닙니다. 최대한 자기를 대중들에게 노출 시키고 주목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대중들의 환호를 받으면 하늘을 나는 기분일 겁니다. 아무리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늘 환호하는 대중들 앞에서만 사는 건 아닙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틀림없이 그에게 옵니다.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에게 그 시간은 공허합니다. 그래서 그는 불길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다시 인기를 구걸하러 나섭니다.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배설하듯이 쏟아냅니다. 그게 반복하면 그의 인격이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에도 비슷한 위험이 있습니다. 대중적인 목사들의 인기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못지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친절하던 목사가 집에 들어가서 신경질적이고 때로는 난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내를 폭행하는 목사들도 아주 간혹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주목받지 못하는 순간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보다 더 엄한 벌을 받는 거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사회적인 지위를 포기한 채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뜻으로 서기관을 비판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기관처럼 높은 신분을 유지해야만 행복한 삶이 보장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문제입니다. 그런 가치관과 세계관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서기관이 오히려 더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르게 인생을 살 겁니다. 그 다른 인생이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41~44절 말씀이 대답입니다. 여기에 가난한 과부가 나옵니다.

 

성전 헌금함에 헌금하는 장면을 예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큰 액수를 넣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푼돈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그 누구보다 더 큰 액수를 헌금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넉넉한 중에 헌금했으나 이 과부는 가난한데도 자신의 소유 전체를 헌금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를 한다면 약장사 설교자이겠지요.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는 헌금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에게는 ‘올 오아 나씽’(all or nothing)만 가능합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밀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돈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돈을 사랑하라고 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하나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시대정신입니다. 21세기 우리 기독교인은 구조적으로, 숙명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를 사는지 모릅니다. 안타깝지만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엄중한 실존입니다. 이런 실존에서는 아무도 가난한 과부를 이해할 수도 없고, 말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그런 삶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가난한 과부처럼 산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앞에서 인용했던 잔치 자리와 초대에 관한 이야기 바로 뒤에 다시 ‘잔치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과 깊이 연관되어서 눅 14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으니 나가봐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소를 샀으니 시험하러 가봐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장가갔으니 바쁘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잔치 주인은 거리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 비유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눅 14:24) ‘내 잔치’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요, 생명 사건입니다.

 

일상에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요즘 가을의 정취가 더해갑니다. 가을 정취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놀라운 구원 사건입니다.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사실 자체가 황홀하게 놀라운 구원 사건입니다. 가을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눈길을 주다가 지나칩니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다 놓치는 겁니다. 가난한 과부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이라서 저절로 가을 햇살 안으로 들어가서 가슴 저미는 경험을 할 겁니다. 서기관과 밭을 산 사람이 바빠서 놓친 삶의 알맹이들을 과부는 다 붙들 수 있습니다. 모든 소유를 헌금한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실제로 가난한 과부가 되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운이 좋거나 큰 노력으로 서기관의 자리에 올라가면 축하해드리겠습니다. 인간 삶의 근본에서 본다면 과부나 서기관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둘 다 주어진 분량만큼만 숨을 쉬고 먹고 마시다가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본다면 서기관이 불행해질 개연성이 더 큽니다. 제가 대기업처럼 작동하는 대형교회 목사였다면 제 영혼이 불행했을 겁니다. 그런 자리에 올라간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향한 성찰이 더 깊어져야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성찰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coram Deo) 겸손한 태도로 선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더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저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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