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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9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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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20-02-27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마트(mart) 안이 더 위험하다.
시91:1-7
다들 ‘코로나19’로 마음도 세상도 정신도 얼어붙었는데, 성암교회는 뭔 배짱으로 주일 예배를 하느냐고 하는 물음을 던지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여러분에게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은 다양한 관점이 각축하는 전장입니다. 저는 그 관점들이 모두 동등한 수준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눈길을 주고, 권위에 굴하지 않고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여러 가설과 경쟁하며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관점들이 그렇지 못한 관점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의미를 준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사소해 보일지라도 모르는 그 차이를 분별해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가 먼 훗날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간격이 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p6-
김승섭 이라는 고려대 보건대학 교수가 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저자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이 일상화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은 돼지들을 몰살시켰습니다. 몇 해 간격으로 사스-신종플루-에볼라-메르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낯선 지구 생명체 친구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지식이나 경험을 적용하여 살처분하고, 격리하고, 두려움과 공포로 숨어버리면 먼 훗날 돌이킬 수 없는 간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지 말고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여러 가지 가설들과 경쟁하며 살아남는 관점들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제시한 것이 세종대왕의 생각과 삶이었습니다.
‘미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어린 아들과 동네 마트에 온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피를 흘리며 뛰어들어 와서 “안개 속에 무언가 있다”고 소리 질렀고, 실제로 사람을 해치는 괴생명체가 있었습니다. 마트에 갇혀 외부와 단절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대처합니다.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사람들, 어떤 정보도 믿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 종말의 징조라며 타인을 제물 삼으려는 사람들로 나뉩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안개 속 괴물보다 마트안에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코로나19’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짜 위험에 관해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안개 속 괴물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코로나19’가 괴물이 아니면 뭐가 진짜 괴물일까요?
대개의 바이러스가 비슷하지만, 이번 ‘코로나19’나 인간의 ‘탐욕 바이러스’는 닮은 점과 다른 점이 같습니다. 닮은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는 전자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탐욕 바이러스도 또한 저지른 일의 흔적을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습니다. 기획단계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라는 철학자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의 대명사인 자본주의가 ‘기관이 없는 몸’이라고 했습니다. 탐욕은 기관 즉 대사작용과 같은 생물학적 기관이 없죠.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 또한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체라서 먹고 싸는 기관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삽니다. 탐욕 바이러스나 코로나바이러스나 오직 증식만 있습니다. 탐욕 바이러스도 예측, 상상, 경쟁 등을 통해 무한하게 증식을 하죠.
그럼 다른 점은 뭘까요?
코로나19는 원래 동물의 몸에 기생하고 있었으며, 탐욕은 인간의 몸에 기생하면서 상대방을 거덜 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바이러스 창궐의 시기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세계영화의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이 시대의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속 깊은 뜻이나, 창궐하는 바이러스 사태는 결국 인간들의 계층화를 인식하게 해줍니다.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12명 중 7명은 대구의 D 병원에 격리되어서 10~20년을 살아온 최하층 정신 취약자들입니다. 사망할 당시 몸무게가 48kg 그 언저리들이었다고 하는데, 병원에 두 달 만 있어도 몸의 모든 근육이 파괴되고 소실됩니다. 그런데 10~20년을 갇혀 살면 이미 죽은 분들입니다. 욕망의 바이러스는 자신의 숙주가 사회적 신분이 상승할수록 다른 인간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 진영에 들지 못한 인간에게는 자신을 어떻게 증강 시킬 것인지 절치부심하게 합니다. 결국 ‘코로나19’ 는 양극화 되어가는 현실의 인간 차등을 더욱 가속화 하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불안과 공포가 확장될수록 인간의 차별화가 극대 되는 것이죠.
사실 코로나19는 인간보다 앞서 존재한 생명체입니다. 인간이 진화적 관점에서는 후손이죠. 앞서 존재하기 시작한 코로나와 뒤늦게 등장한 인간은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존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지닌 탐욕 바이러스가 아주 먼 선대인 코로나바이러스를 인간의 삶과 몸 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코로나에게 인간의 탐욕이라는 새로운 숙주는 새로운 영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문명과 이기를 통해 미개척의 고속도로를 달리라고 문을 연 셈입니다. 인간의 문명인 도시형태, 도로, 삶의 양식은 코로나바이러스에게 해방공간이나 다름없습니다. 맘대로 활개 칠 수 있는 자유 세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애석하게도 사회적, 신체적, 경제적, 심리적인 저항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이 쓰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상위 계급들이 아니라 하위의 계층만이 저들의 증식 숙주가 된 것입니다.
다행히 인간은 백신을 만들어내는 이성 바이러스도 있습니다. 풍랑의 배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번뜩이는 예수도 있습니다. 시편 문건은 대략 기원후 1세기에 정리가 되어 성서에 실리게 됩니다. 과거의 인류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천재지변입니다. 그것이 바람이건 물이건 불이건 전염병이건 다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 시편의 문장도 그런 상 황 속에서 의식과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대목입니다. 생각과 태도 방식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공진화하는 변종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인간들의 집단 지성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큰 시선으로 대응해왔습니다. 허약한 인간이 그 온갖 재앙으로부터 여기까지 존속한 것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가호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코로나19’를 계기로 마트안에 갇혀서 벌벌 떨며 지낼 게 아니라 과감히 마트 밖으로 나가 욕망의 맹목적인 요구대로 자연과 우주를 갈취했던 도구적 이성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물색해야 합니다.
나아가 ‘욕망의 바이러스’ 대신에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며 상생하는 생태 바이러스를 키워야 하는 강력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욕망의 바이러스를 증식시키는 현대문명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지구는 수백만 종의 생명체가 함께 사는 유일한 낙원입니다. 누가 독점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19’는 그 오만에 대한 항거입니다. 일본의 마사히로는 <무통문명>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욕망을 위해 ‘인간을 가축화’함으로 진정한 고통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모르는 무지를 벗으라고 말합니다. 문명의 질적인 전환을 도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무통문명
특정 집단을 표적 삼아 공동체에서 그들을 내모는 것으로 책임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좀 더 근원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물도 아니고 무생물도 아닌 코로나19의 창궐로 인해 누군가를 제물로 삼으려고 하고, 마스크 속으로 잠적하여 침묵하고 외면하며, 단절이 최선으로 알고, 다가오지 않은 고통에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과연 누가 가장 위험하고, 무엇이 가장 위험한 것인지를 묻는 거 만큼 중요한 신앙적 과제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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