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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66 추천 수 0 2022.03.29 09:4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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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2:12-21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2절 12절-21절: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2절: 진리진실의 성도는 진리 자체화로 진리 인격화 진리 실상화로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체화로 되었다면 그의 성격과 성질과 성분성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 여물어져 있다고 봐야 하고, 또 여물어져야 한다. 그게 성령의 사람이다.

 

인격성이 성품성이 속성이 그렇게 되어야지 가견적으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면에 치중을 하면 안 된다. 그것도 중요하겠으나 그보다 더 심각성을 가진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의 속성적으로 실상화가 돼야 한다. 이게 기독교요, 이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원하심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라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육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싫다고 자꾸 물리치는 것이다. 자기에게 크고 작은 사건 환경들이 지나가기 전에 깨달아야 하겠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인데 그렇지를 않다. 육의 생각을 가지고 자꾸 그걸 밀어버리려고 한다.

 

왜 자기가 밀어버리느냐? 나쁜 거는 전부 마귀가 줬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니 예수님을 믿는 신앙관이 이방 신앙 사상관이 돼 버린다. 오늘날 기독교가 거의가 그렇다. 거의가 이방 신관화 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 종교인들과 손을 잡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선악과 따먹은 저주받고 타락된 지식의 기준 개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니 사람이 바뀌지를 않는 거다. 종교생활에만 강조를 했지 속사람이 바뀌지를 않는다.

 

목사님들 세계에서 목사님의 가르침에서 사람 바꿔지는 이치를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 분석을 못하고서 목회를 해 봐야 예수님의 반대쪽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거짓 종이 되고 자칭이 되는 거다.

 

진리진실의 성도는 진리 자체화로서 하나님의 생명적 주격으로 산다. 신앙의 성질이 본질로 산다. 이런 사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의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천국복음을 전하다가 아무리 어려운 고난을 당해도 자연생명이 죽을까봐 겁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있으리라 믿고 기다리게 된다.

 

우리가 천국복음을 전하다가 상황적으로 사건적으로 활동을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준비를 하며 기다려라. 준비도 안 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림 그 자체가 머릿속에서 딴 것이 돌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건 환경은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위해, 영능의 실력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이다.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께서 진리진실의 성도를 끌려가게 만드시는 것은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편이다. 마치 사도바울이 죄인으로 몰려서 로마로 끌려가서 복음을 전했듯이. 인간 편에서 쉽게 말해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서 전해야겠는데 차비는 없고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상대편이 죄인으로 몰아서 로마황제에 끌고 가게 해서 로마에서 도가 전해지게 했던 것이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도를 전하니 성령님께서 갑자기 빌립을 딴 데로 이동시켰다. 주님께서는 순간적 이동은 아무 것도 아니다. 변화 부활도 시키는데 순간적 이동쯤이야.

 

하나님께서는 천국복음이 당신의 일이요, 당신의 일을 하시는데 진리의 종들을 붙잡고 천국복음의 사람으로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쪽으로 주격적으로 들어가 있다. 목사님들은 그 일에 수종자들이다. 수종 들면서 만들어지면서 영능의 실력이 쌓이게 돼 있다. 마치 부잣집에 있는 종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시키는 그 일이 숙달이 되고, 그러면서 주인의 생각도 알아지고, 봄에는 뭘 해야 되고, 여름에는 뭘 하고, 가을에는 뭘 하고, 겨울에는 뭘 하고 하는 이게 주인의 뜻대로 척척 돌아간다. 그렇게 되니 주인이 그 종에게 그 집 일을 다 맡겨버린다. 그런 일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것과 같다.

 

진리진실의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기 자랑, 자기 배경, 자기 학력, 자기 부요, 자기 권력을 알아달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설령 자기에게 그런 것이 있더라도 그것부터 내세우지 않는다. 그런 걸 가지고 자기소개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부흥강사나 큰 교회 목사님들을 그런 걸 명함 같은데 잘 내세운다. 기독교 신문에 보면 그렇지 않은 목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그 사상이 뭔지를 영의 눈으로 못 보는 거다. 거기에다 큰 규모의 예배당까지 내세우면 교인들도 마찬가지니까 그런 걸 보면서 ‘아, 유명하다’ 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사상들이 ‘아, 이게 뭘 말하는구나’ 하는 그걸 모르는 거다. 요셉이나 다니엘이 총리가 돼서 자기 피알을 많이 했느냐?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셔서 자기 피알을 얼마나 했느냐? 예수님이 자기 피알을 했느냐, 안 했느냐? 했다. 해야 한다. 주님은 인간표현으로 말을 한다면 나는 누구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제사장이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했느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그들이 이 예수님에게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참람하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피알을 해야 한다. 왜냐? 하늘로부터 오셨으니까. 그런데 당신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니까 그들이 ‘에이, 자기도 인간이면서’ 하며 마리아를 갖다 대고, ‘그의 아버지는 목수 요셉이 아니더냐’ 하는 거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이 나가게 하고, 물 위로 걸어가고 하는 게 우리의 구원을 깨닫게 하려고 숨겨놓은 자기 피알도 들어있는 거다. ‘그래도 모르겠느냐?’ 하고서.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그런 존재도 안 되고 못하고 안 하고 그 능력도 없으면서도 자기 피알을 한다. 그러니까 그런 피알은 세상성으로 들어간 자기 피알이다. 천국 쪽으로 피알이 돼야 하는데 세상 피알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도 세상용어로 말을 하자면 일종의 자기 피알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역사를 하심은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래도 나를 모르겠느냐?’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심은 ‘나를 따라오너라. 나처럼 만들어 주마’ 하는 약속이 들어가 있는 거다. 이건 타락된 세상 사람들과 같은 동질의 수준의 피알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으로 많이 피알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말로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이구나’ 하는 게 따라 들어가야 한다. ‘나는 하늘의 사람이다’ 하고 말로만 하는 건 피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피알을 하시되 당신의 사역도 함께 들어간 피알이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가지고 그런 사람으로 되고 자꾸 주장을 하고 천국을 피알을 하면 은연중에 자기도 거기에 따라 들어가게 된다.

 

세상은 천국복음의 성질을 모른다. 세상의 대통령도 모르고, 학박사라도 세상성으로 들어가 있다면 모르는 거다. 세상의 철학자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긍지를 가져라. 이치를 모르면 안 된다.

 

진리성도를 끌려가게 만드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천국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끌려간 성도가 그들 앞에서 하는 말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발언이다. 그러니까 그 성도는 진리로써 인격화 돼 있는 것이니까 진리와 동반을 하시는 성령님께서 잡고 쓰실 수 있도록 잘 만들어진 사람이다.

 

우리도 성령님께서 언제나 잡고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이걸 예를 들면 내가 병(甁)이라고 할 때 그 병 안에 참기름만 가득 들어 있다면 인간이 그걸 기울이기만 하면 그 병에서 언제나 참기름이 나오듯이 자기 속에 진리이치로서 충만케 인격화 사상화 실상화 돼 있으면 주님께서 나를 살짝 기울이기만 하면 길이요 진리생명의 이치가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된다. 이게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사다.

 

진리진실의 선지 사도들이 하는 발언은 성령님께서 같이 들어가 있다. 안 들어가 있다면 말이 안 된다. 가령 추상적으로 생각을 해 본다면 선지자들이 가서 외쳤다 할 때 하나님께서 ‘누구 맘대로 외치느냐?’ 하니까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했습니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불러서 ‘네가 그 말을 하라고 시켰느냐?’ 하니까 ‘예’ 한다면 그게 누구의 말이냐? 이게 똑똑 떼어서 비유적으로 생각해 보는 말이다.

 

진리성도와 성령님은 늘 함께 하는 것인데, 이런 성도가 진리를 말하게 되면 이는 성령님과 같이 들어 있다. 말을 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같이 이 감화성이 들어가 있으면 다 같이 하나님의 뜻에 동화되고 화동이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질이 같지 않으면 그렇게 안 되는 거다. 그러니까 ‘성령을 달라 달라’ 할 필요가 없는 거다.

 

중생된 영과 함께 성령님은 항상 성도 속에 내재해 계신다. 중생된 그 영은 하나님의 질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거다. 그런데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중생한 성도가 진리말씀의 이치를 잘 깨달아서 의사성적으로 하나님의 본질로 잘 만들어져 나가면 그 다음에 성령님께서 그 사람을 붙잡고 활동적으로 쓰기가 좋은 거다. 그게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성령님의 활동이다. 진리가 없이는 이건 안 된다. 진리충만은 말씀이치의 충만이다. 신적인 도덕성으로 이치적으로 충만이다. 괜히 감정과 흥분을 가지고 성령충만이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런 집회나 그런 속에 들어가면 그것을 옮아서 그렇게 돼버리고, 그렇게 되면 맨날 그래야 한다.

 

사람이 속성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에 입각한 의사단일의 사람으로 인격적으로 속성적으로 실상화가 되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주님이 잡고 쓰시고자 한다면 성령님의 감화로써 얼마든지 잡고 쓰시는 거다. 그런데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지려고 하지는 않고 왜 자꾸 성령을 달라고 하느냐? 성령이 물건이냐?

 

13절-14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렇게 말을 한 것은 형이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동생의 유업까지 독차지해서인지, 아니면 형은 자기 노력 것 해서 부자가 되었고 동생인 자기는 게을러서 가난해진 것인데도 동생이 생각할 때 ‘부자가 된 형이 나를 좀 안 도와주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아무튼 동생의 요구대로 예수님께서 들어주었느냐? 안 들어줬다.

 

이 지구 땅덩어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세계 나라마다 자기 실력 것 크던 작던 땅을 차지하고 있다. 도시마다 그렇고, 집집마다 그렇고. 그래서 나라마다 다 경계가 있다. 그러니까 그 경계는 이 땅에서 소유적 부요적인 실력을 말하는 거다.

 

집집마다 경계가 있고, 개인소유가 다 있다. 그럼에도 만일 불법으로 가졌다면 재판이라는 게 있다. 그러나 아무리 치고받고 싸우고 전쟁을 해서 많이 가졌다고 해도 자기 죽을 때는 다 두고 가고, 세상 끝날 심판 날에는 모두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 두고 가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속화된 하나의 종교인들이 축복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은 본문의 형의 유업을 나눠서 자기에게도 주게 해달라는 동생의 소리와 같다.

 

모든 물질과 재산에는 다 소유주가 있다. 나라의 것도 있고, 시(市)의 것도 있고, 개인의 것도 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축복을 달라고 한다면 지구를 또 하나 만들어서 줘야 하느냐? 별도로 돈을 찍어서 줘야 하느냐? 축복을 받고 싶으면 ‘나를 부지런하게 해 주십시오. 나를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지혜롭게 해 주십시오’ 한다면 이치가 맞는 거지만 왜 무조건 축복을 달라고 하느냐?

 

어떤 권사님이 주일날도 장사를 한다고 하는데, 안 믿는 사람들이 주일날 그 식당에 와서 돈을 쓰는 거다. 그런데 그 가게에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 하고 붙여놨던데, 그게 어떤 의미가 깔려 있는 거냐? 주일날 장사를 하면 손님이 많이 오게 해 달라는 뜻이다. 안 그러면 좋은 뜻으로 ‘손님이 많이 오게 해서 주일날 장사를 안 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뜻이라면 그게 생각이 바로 된 거냐, 안 된 거냐? 말의 이치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아느냐?

 

평소에 장사가 잘 되게 해 줘서 날 주일날 장사하지 않게 해 달라는 뜻으로 그렇게 써서 붙여놓은 것이라면 이 사람은 그 속성을 고치지 않는 한 어떤 시험을 통과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설령 그렇게 해서 평일에 장사가 잘 된다고 해도 주일날 장사를 하게 되는 거다.

 

시험을 이기고 나온 사람과,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 편안한 자리로 올라가면서 예수 믿는 것과는 다르다. 신앙이 올라가려면 반드시 시험과 시련이 오게 돼 있고, 와야 되는 거다. 그런데 보통 보면 시험과 시련을 안 당하려고 하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 그게 영이냐, 육이냐? 육에 속한 사람이다.

 

타락된 세상에서는 부부끼리도 형제끼리도 동기간끼리도 이웃끼리도 동족끼리도 세상 법정 앞에 가서 피터지게 싸운다. ‘이게 사람인가?’ 하고 느낄 정도로. 예수님은 땅의 것을 해결해 주시고 땅의 것을 교육을 시키는 분이 아니고 하늘의 것으로 교육을 시키는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믿는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물질적인 개념으로 축복을 달라고 매달려야 하는 것이냐? 그런 기도를 안 하면 빌어먹느냐?

 

성경을 보면 모세가 미디안 광야를 가면서 겪은 고난성, 양 키우고 하며 십보라와 결혼하고 한 그 장면과, 야곱이 형에게 거짓말을 하고 광야로 해서 삼촌 집에서 양도 키우고 짐승도 키우고 하다가 20년 만에 나오며 사람 얻고 물질 얻고 나온 것을 생각해 보면 비슷한 것 같으나 전혀 다른 각도이다.

 

두 사람이 광야생활을 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모세가 부자가 되려고 이드로의 집에서 일을 한 것이냐? 아니다. 모세가 양을 키우다가 하나님을 만나서 신발을 벗으니까 즉, 내 주관성대로 하는 그 신발을 벗으니까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끄집어내는, 해방을 시켜내는 큰 일꾼이 된다. 그런데 야곱은 신발을 벗었느냐? 벗으라는 데도 없지만.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지 않았느냐? 거기에서 약속한 것도 있는데 그 약속도 안 지키고, 그러다가 디나가 고통을 당하는 그런 일들이 생기고, 야곱이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바로 왕이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으니까 야곱의 입에서 ‘조상들의 나이에 비하지는 못하지만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고 했다.

 

그걸 생각해 보면 두 사건이 계시를 보여주는 면은 다르지만 그 양쪽 다를 나에게 보여주는 것은 내 쪽에서 판단을 할 때 ‘그 사람들의 신앙이 나쁘다. 좋다’ 하기 전에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목사님들은 자기 신발을 벗어야 할는지, 자기 주관대로 할 것인지? 보면 대개가 안 벗었다. 그러니 자꾸 연속적으로 고난이 닥치고. 이 진리를 받는 목사님들은 자기 신발을 안 벗으면 안 된다. 신발을 신으면 자기 주관성대로 마음대로 뛰어다니려고 한다.

 

15절-21절: 일반적으로 탐심이란 남의 것을 탐내거나 부당한 욕심이다. 본문의 부자는 인간의 목숨이 빨리 죽고 오래 사는 것이 물질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사실 세상을 탐하는 자는 우상 숭배자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글자적 문자적 개념으로 성경구절을 갖고 와서 기도로 가르침으로 ‘세상 것을 이루라. 구하라. 입을 크게 넓게 벌려라. 채워주리라’ 하는 것은 세상을 탐하는 우상 숭배자이다.

 

우리가 알고 보면 온 세상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요, 자기의 몸도 하나님의 것이요, 영혼도 하나님의 것이요,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아브라함아, 너 논밭 짐승이 많이 있지? 좀 사용하자’ 할 때 ‘예, 사용하십시오’ 그렇게 들어간 아브라함의 신앙이다. 아들까지 바쳤는데 그 말이다. 본문을 그와 같은 이치로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처녀 된 네 깨끗한 몸 좀 내가 빌려 쓰자’ 하니까 ‘예, 주의 뜻대로 이뤄지이다’ 했다.

 

그런데 오늘날 처녀총각들이 자기 목적이 이뤄질는지 안 이뤄질는지도 모르면서 세상욕심을 부리고 있다. 지구는 자꾸 도는데, 지구가 돈다는 것은 세상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것에, 바람 불면 날아갈 것에, 불나면 불에 탈 것에, 지진나면 진동 나서 땅에 꺼질 것에, 시간 가면 썩어질 것에 목적을 두고 목표를 두고 그것을 이뤄달라고 하고 있다. 이건 마귀시험이다. 이 마귀의 시험에 다 빠지고도 빠진 줄을 모른다.

 

지구 땅덩어리는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시사철도 하나님의 것, 눈보라 비바람도 하나님의 것, 해가 뜨고 달이 지고 하는 것도, 공중의 별들도 다 하나님의 것, 생물들의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것, 시간의 흐름도 하나님의 것, 쓰고 먹고 마시고 하는 것도, 거처지도 다 하나님의 것이다. 자기 스스로 생겨나고 가지고 온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원인 동기 목적 하에 인간 자기는 잠깐 들렸다가 고향으로 가는 나그네이다.

 

예수 믿고 깨닫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게 분명한 건데, 그런데 본문 15절의 비유의 부자는 인간의 목숨이 재산이 많으면 오래 살고, 재산이 없으면 금방 죽는 것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구나. 이 부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도 은근히 그 마음을 깔고 있다. 인간의 목숨이 물질소유에 달린 것처럼 그런 면에다 저울을 자꾸 내린다. 그러나 인간의 목숨은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달린 거다.

 

16절: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밭도 하나님의 것, 씨도 하나님의 것, 사시사철 일기의 조절도 하나님이 하시고, 법칙도 하나님이 하신다. 인간 자기가 한 것이라고는 씨를 논과 밭에 심고 김을 맨 것뿐이다. 그렇게 하게 하심도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구원이치와 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부자는 소출이 풍성한데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도 없다.

 

17절: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행복한 걱정이다. 이웃에 나눠줄 마음은 왜 없었을까? ‘하나님께서 주신 거다’ 하고 전제하고 볼 때 논 밭 갈고 밭을 매주고 한 그 노력을 통해서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도 고맙다. 안 그러면 게을러서 맨날 술만 먹고 병만 들 텐데.

 

그런데 18절에 ‘작은 곡간을 헐고 더 큰 곡간을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다 쌓아두자’ 했다. 쥐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도둑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누림성으로 들어간 거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지금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 평생 먹고 살 모든 것을 큰 창고에 쌓아둔다면 문자대로 본다면 들쥐도 파먹으려고 들어오고, 좀과 동록도 파고 들어올 것이고, 인간 도둑도 파고 들어올 것인데 그걸 모르는 건가? 자기 육신의 생명마저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 속에 산 것 같다.

 

자기 육신의 병이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걸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냐? 오장육부에 생기는 병이 안 생기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더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 때부터 우리 인체에까지 법칙으로 이치적으로 만들어 놨다. 이치대로 만들었다 함은 이치나 법칙 없이 네 마음대로 막무가내로 함부로 쓰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우리에게는 법칙적으로 이치적으로 쓰는 자유가 있다. 자기 몸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법칙을 지켜라. 네 신체의 모든 돌아가는 신진대사는 하나님의 법칙에 맞도록 돼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살면 너는 죽는 거다.

 

사람이 땅의 생각만 하고 살면 신경질적이고 까다롭고 물질만을 따지게 된다. 이건 이미 그 머리가 병든 것이다. 나이 많으신 분들 중에 할 수 있는 대로 생각이 그 쪽으로 안 빠지도록 하는 게 지혜이다. 좋지 않은 생각을 자꾸 하는 건 이미 병이 든 것이다. 눈에 나타나는 병이 들지 않았다고 해도 심각한 것이다. 이러면 집을 뛰쳐나가고, 사람도 못 알아보고 할 가능성이 항상 깔려 있다.

 

인간에게 이해타산 가치평가성을 넣어준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법칙적으로 쓰고 이치대로 쓰는 면에서 자유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제 마음대로 하는 자유와, 법칙과 이치적으로 쓰는 자유와 어느 자유가 더 좋으냐? 하나님의 이치와 법칙을 어기면 남이 아닌 네가 죽는다.

 

인간이 사는 모든 면에서 자유에도 정도가 있다. 어떤 것은 어기자마자 생명에 직접 위험이 되고, 어떤 것은 어기면 고통이 되고, 더 어기면 고통이 더 짙어지고, 심지어는 죽음까지 온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따르는 자유와, 따르지 않는 자유를 가졌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멸망과 심판에 이르고, 따른다면 큰 기쁨과 평안과 축복이 오게 돼 있다. 이건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게 믿어지느냐? 약속을 믿는 사람으로서 약속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야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돼 있는데 왜 ‘축복 주십시오’ 하느냐? 이건 이치가 틀린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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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7 요한복음 성전을 회복하라 요2:13-22  강승호 목사  2022-03-16 237
17316 고린도전 하나님이 먼저다 file 고전7:32-35  이익환 목사  2022-03-15 306
17315 고린도전 부흥의 씨앗 file 고전6:9-11  이익환 목사  2022-03-15 155
17314 고린도전 누룩 없는 교회 file 고전5:6-8  이익환 목사  2022-03-15 230
17313 고린도전 마인드버그를 제거하라 file 고전4:3-5  이익환 목사  2022-03-15 137
17312 고린도전 가장 좋은 선물 file 고전3:16-17  이익환 목사  2022-03-15 224
17311 고린도전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삶 file 고전2:8-10  이익환 목사  2022-03-15 196
17310 고린도전 문제 해결의 열쇠 file 고전1:18  이익환 목사  2022-03-15 236
17309 다니엘 마지막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 단12:13  이익환 목사  2022-03-15 240
17308 누가복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눅12:8-10  김경형 목사  2022-03-15 77
17307 시편 마트(mart) 안이 더 위험하다 file 시91:1-7  허태수 목사  2022-03-12 199
17306 요한복음 나는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노라 요4:27-38  허태수 목사  2022-03-12 104
17305 사도행전 성경 속에서 성경 읽기 행16:8-10  허태수 목사  2022-03-12 95
17304 요한복음 나는 내가 증거한다 요8:12-18  허태수 목사  2022-03-12 81
17303 누가복음 아흔아홉을 보는 눈과 하나를 찾는 마음 눅15:1-7  허태수 목사  2022-03-12 135
17302 신명기 우리는 트루-빌리버, 진짜 신자다. 신4:15-24  허태수 목사  2022-03-12 117
17301 이사야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 사45:1-7  허태수 목사  2022-03-12 130
17300 마가복음 제목새 술을 담아 익혀 마셔라 막2:18-22  허태수 목사  2022-03-12 80
17299 열왕기상 축복의 단비를 주소서! 왕상18:1-2  전원준 목사  2022-03-10 229
17298 미가 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5:2-5a  정용섭 목사  2022-03-08 107
17297 누가복음 성령과 불 눅3:7-18  정용섭 목사  2022-03-08 92
17296 누가복음 빈 들에서 눅3:1-6  정용섭 목사  2022-03-08 119
17295 누가복음 늘 깨어 기도하라! 눅21:25-36  정용섭 목사  2022-03-08 209
17294 요엘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욜2:21-27  정용섭 목사  2022-03-08 99
17293 히브리서 하나님께 가까이! 히10:19-25  정용섭 목사  2022-03-08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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