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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113 추천 수 0 2022.04.04 13: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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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2:20-24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2장 20절-24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자기의 신앙양심 마음속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들, 평소에 알던 사람이 기본적으로 믿음생활을 바로 못한다면 그 사람과는 손잡지 말아라. 그런 사람과 친하지도 말아라. 왜냐? 친하게 해 놓으면 세상 속된 말로 자기와 같은 줄로 알고 맞먹으려고 한다.

 

성도로서 기본적인 태도가 있는 것인데 인간 도덕적인 면에서의 인인관계도 바로 되지 못하고, 주일도 제대로 못 지키고, 공공장소나 공중도덕적인 면에서도 저질이고 한 사람인데도 그 사람을 알아주면 사람을 영원히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교회는 교회대로 시험 들게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지를 못한다. 이러면 교회가 난장판이 돼버린다. 내가 이런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

 

사람이 성격을 고쳤느냐, 성질을 고쳤느냐, 인인관계에서 마음의 심성이나 바르냐? 그렇지 않다면 그 속에는 사람을 들이받으려는 뿔이 돋아있다. 교회로 들어오면 그거 다 고쳐라. 말하자면 그 뿔을 잘라야 순한 양 같이 된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된다. 그래야 은혜를 받는다. 약속이 돼 있는 거다. 그런데 ‘사람이 그립다. 사람이 없다. 재산이 있다. 물질이 많다’ 그런 걸 가지고 그 사람을 자꾸 다독거려 키워놓으면 그게 커서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본문의 부자의 자연생명을 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냐? 하나님이다. 그런데 부자 자기는 자기의 출생목적, 자기의 존재목적, 나그네로 사는 자기의 재세기간의 목적을 모르고 말을 하는구다. 이 부자만이 아니라, 이방인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속화된 교인들은 ‘세상 물질축복 운운’ 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른다. 안다면 바로 될 텐데 모르기 때문에 구복주의 사회주의 신비주의 초절주의 극기 극복주의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신 원인 동기 목적을 안다면 성경을 다 아는 것이다. 왜? 성경이 그걸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 가르쳐 주는 데로 가라.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갈 수가 있다.

 

21절: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첫째는 인간 개인마다의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 뜻이 뭐냐? 어느 시대에 살았던, 어느 환경에 살았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자기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온전이다. 이걸 떠나서는 성경해석은 안 되는 것이고, 할 수도 없고, 이걸 떠난 해석은 사단 마귀 악령의 역사들이다. 질이 그렇다.

 

성부 성자 성령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사건을 동원시키고 내 앞뒤로 모든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조성시켜 놓고 시간 속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는 것은 인간 자기를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에 목적이 딱 맞춰져 있는 거다. 방편적인 뜻은 ‘너는 그 사건 환경 속에서 이런 지혜적인 사람이 되라. 이런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이걸 모른 채로 그저 세상에 속한 자기의 소원 목적만 이뤄달라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젊음 노력을 다 보내버렸다. 이렇게 하며 먹고 마신 거 전부는 사해바다로 흘러갔다.

 

이번에 일주일 내내 집회를 했는데(설 집회) 다 어디로 갔느냐? 마귀 대목장날에 부침개 붙여주고 찰떡 주고 하니까 그렇게 좋더냐? 꼭 먹고 싶으면 집회 참석하면서 못 해 먹는 거냐? 어떤 분은 설 집회에 와서 천국복음 잔치의 맛을 보았고 어떤 분들은 마귀 대목장 잘 세고 왔는데, 설 잘 쇠고 온 분들은 설 기간 동안에 직장도 쉬었을 텐데 거기에서 뭘 깨달았는지 내놔봐라.

 

두 번째로 보면 이 부자가 인간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구나. 예수 믿으면서 이 부자처럼 자기의 출생목적 존재목적을 못 깨닫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주님은 분초찰나 순간마다 인간 자기를 하나님의 온전을 향해서 그 온전의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려고 부지런히 사건 환경을 다 동원시켰는데 자기는 그런 생각도 못하고 잊어버리고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니 부자와 다른 게 뭐냐? 더더군다나 세상 속화된 교회에서는 기도로 세상에 속한 것을 다 이뤄달라고 하니 그거나 지금 이 부자나 다를 게 뭐가 있느냐?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도 제 뜻대로 믿고 있는데.

 

세 번째는 세상만사를 깨닫지 못한 자로구나. 세상만사가 일어나서 사건적으로 조성이 되면서 왜 자기에게로 향해져 오는 것인지 자기에게 오는 환경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예수 믿으면서 직장에 다니고 월급 타고 한 달 먹을 만하니 그냥 사는 것 같으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심사하면서 ‘자기의 신앙이라는 정신 사상이 어디에 가서 무게를 잡고 놀고 있느냐’ 하는 면에서 어떤 사건이 나도 모르게 자꾸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느냐?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20년간을 사람 얻기 재산 얻기를 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가 됐다. 그렇다면 벧엘 신앙으로 얼른 와야 하는데, 중간에 하나님 앞에 언약한 돌을 세운 그 제단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 사상을 찾아가야 하는데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했느냐? 얍복강가에서 무릎을 꿇고 약대무릎이 되도록 기도를 했지만 환도 뼈가 부러졌다. 그게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런데 20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형의 군대가 자기에게로 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구, 이거 큰일 났구나’ 해서 1차적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2차적으로는 그 다음으로 덜 중요한 거,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맨 뒤에, 자기는 더 맨 뒤에. 참 약아빠졌다. 정말 야곱이 약은 거다.

 

이 야곱이 믿음이 좋은 거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야곱이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될 만한 거냐? 아니다. 이름도 욕심쟁이 즉, 남을 속이는 자다.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을 보시고 사람으로 만들어서 데려가야 하겠는데 사람이 돼먹지를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편적으로 시련 연단을 주어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여기서의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지배하심,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라는 뜻인데, 이걸 좋은 뜻으로 보면 신앙이 올라가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다’ 하는 뜻이다. 이건 긍정적으로 들어가는 거고, 또 하나는 ‘이건 아주 못 돼 먹었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에게 사건적으로 나타나서 사건을 몰아붙여서 두들겨 패고 쥐어짜고 해야 되겠다’ 하는 부정적인 면으로 다스림을 받는 이스라엘이다.

 

자기는 긍정적인 면으로 다스림을 받는 이스라엘과, 부정적인 면으로 다스림을 받는 이스라엘 중에 어디에 속했느냐? 예수 믿으면서 자기의 속마음 들어다보면 자기의 마음이 무슨 색깔을 띠었으며,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정신이 어느 쪽으로 더 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 건지 보이는 거다. 성경을 보고 깨달으면 자기가 훤하게 보이는 거다. 이건 표면적 가견적 현상적인 기준으로 자기가 보이는 게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예수 잘못 믿은 거다. 이런 사람은 껍데기만 아는구나. 껍데기만 알면 속는 거다. 마귀가 천사처럼 목사님 뒤에 여러 가지 배경을 가지고 오면 속는 거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이와 같으리라’ 이게 무슨 말이냐? 결론이 어디로 내려져 있는 거냐? 오래 산다? 죽는다는 것이다.

 

‘오늘 밤이라도 네 목숨을 거두어 가면 네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기에 적합한 구절을 본다면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또 ‘자고새가 자기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고 있으면 그 알이 부화가 돼서 자라면 날아가 버린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이게 교인 너보고 하는 말이다.

 

네가 지금 가슴에 뭘 품고 사느냐? 날아가고 없어질 것, 제 것 네 것도 안 될 것을 네가 품고 있느냐? 네 것이 될 것을 품고 있어라. 진리생명의 말씀을 네 인격화 시키고 그 정신 사상을 네 마음속에 품어서 키워나가면 네 것이 된다. 그런데 왜 네 것이 안 될 것, 세성 정신 욕심,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품고 사느냐? 그건 네 것이 아니다.

 

이걸 아는 사람은 그런 것을 품고 사는 사람을 참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한다. 이 말이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사는 목적을 거기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주를 위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거고,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미가6:8에 있듯이 기독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로움을 사랑하여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 모든 물질은 다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하나님이 그 사람과 같이 있다면 그 사람이 뭐가 부족할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고, ‘머리가 되게 하고 꼬리가 되게 하지 않겠다’ 하셨는데 여기에 뭐가 부족할까?

그럼에도 머리 쪽으로 향해서, 하나님 쪽으로 향해서 사랑하고 욕심내서 갈 줄은 모르고 자꾸 세상 속화되고 타락되고 저주받아서 나온 그런 차원의 것을 자꾸 달라고 하고 금식하고 철야기도하면 그게 얻어지더냐? 그렇게 하다가 귀신들린 목사들이 얼마나 많으냐? 악령 들린 목사들이 얼마나 많으냐?

 

성경에서 이치는 안 찾고 뭘 보겠다는 것이냐? 뭘 듣겠다는 것이냐? 성경에 다 주었다. 네가 성경에 있는 것만 다 가져도 세상에서 신처럼 될 것이다. 그런데 왜 허송세월을 보내고, 왜 헛 시간 보내고, 왜 젊은 청춘 자기의 한 인생을 다 보내느냐? 왜 그렇게 사느냐?

 

22절-24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자기를 새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자기가 새보다 더 귀하냐? 예수님께서 22절의 말씀을 하신 후에 ‘너희는 새보다 얼마냐 더 귀하냐’ 하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이 말씀은 새보다도 더 못하게 살았다는 것이냐, 새보다 월등하게 살았다는 말이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비교 판단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으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교 판단을 해서 가치평가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비교 판단을 할 때 쥐보다도 개가 더 좋다. 개보다도 소가 더 좋다. 참새보다도 앵무새가 더 좋다. 가시나무보다 무화과나무가 더 좋다. 사람이 개보다 더 좋으냐? 사람이 뱀보다 더 좋으냐? 그런데 사람이면서 허우대가 멀쩡하면서도 개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 테레비에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면 어떤 여자는 남편이 월급 타서 꼬박꼬박 주는데 남편의 건강을 위한 먹는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고 크고 작은 뱀을 아파트에서 기르면서 자기 침대에 올려놓고 같이 자고 한다.

 

여자가 밖에 있다가 집안에 들어오면 이만한 뱀이 입을 벌리면서 혀를 날름거리면 ‘아, 건강하구나’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도 뱀이 가만히 있으면 ‘이거 몸이 아프구나’ 한다. 신랑과는 자지 않고 뱀과 자고 뱀과 입 맞추고 한다. 그런데 그 남편은 왜 그런 여자와 사는지 모르겠다.

 

또 보면 요즘에는 아파트에서 개도 키운다. 사람이 아닌 개와 같이 사니 개를 키우는 집에서 냄새가 안 나느냐? 개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더더군다나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면 견디기 어려운 냄새가 난다.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기독교 전체성으로 보면 개 같은 세상이 되는구나. 교회를 보고 못 깨닫겠으면 사회 조직이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봐라. 왜냐? 원칙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세상의 빛인데 이 교회가 빛의 역할을 못하니 세상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다. ‘이래도 모르겠느냐?’ 하고서. 그러니까 개처럼 살면 언젠가는 때려 잡히게 되는 건데, 개를 언제 잡느냐? 복 날 잡는다. 또 성경에 보면 새의 밥이 되려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자기가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무슨 밥이 되겠느냐? 그래도 모르겠느냐?

 

성경에 보면 ‘네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그 눈을 빼고 차라리 한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말씀도 있다. 문자적으로 볼 때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눈을 빼는 사람은 없다. 설령 죄 지은 오른 눈을 빼었다고 해도 그러면 왼쪽 한 눈만 가지면 범죄를 안 하느냐? 그러니까 진짜로 눈을 빼라는 말씀이 아니라 ‘네가 지옥에 가는 것을 내가 두 눈을 뜨고 못 보겠구나’ 하는 뜻이고, 계시적으로 보면 세상과 천국 양쪽을 욕심내지 말고 천국 쪽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보는 눈은 뽑고 천국 쪽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차라리 그게 낫다.

 

우리가 살면서 보면 개보다 못한 사람이 참 많다. 우리 인간은 판단하고 구별하는 존재로서 남을 보고 판단은 잘 하지만 자기 스스로에 대한 판단은 잘 안 한다. 할 줄 모르고, 안 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될 사람은 누가 자기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아, 과연 그런가? 내가 생각을 해야 되겠다’ 한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학졸업을 했어도 무식한 사람은 누가 자기의 잘못을 지적을 해 주면 그냥 부르르 한다. 대립 마찰과 충돌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도 그런 사람과 친하면 안 된다. 네 얼굴이 똥 된다. 자기의 차원이 낮으면 그런 사람과 사귈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해 보면 몸이 옷보다도 얼마나 귀하냐? 옷보다 몸이 훨씬 더 귀하다. 이 귀함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귀함이다. 사람의 목숨보다 음식이 훨씬 귀하냐, 음식보다 사람의 목숨이 훨씬 귀하냐? 몸이 조금 더 귀한가, 훨씬 더 귀한가? ‘훨씬’이라는 이 말의 의미는 비교급 아니라 귀함성이다.

 

그런데 보면 비교급보다도 못한 사람이 있다. 음식을 막 퍼먹고 ‘아이고, 배야’ 하며 병원에 실려 가는 사람이 있다. 식탐하는 사람은 육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음식이 문제냐, 그렇게 퍼먹는 인간 네가 문제냐? 미련하다 그 말이다.

 

그리고 믿는 사람이 그럴 정도로 먹지는 않았다고 해도 위에 부담이 되도록 먹어서 소화가 안 된다면 얼른 소화제를 먹고 나서 다음엔 그렇게 안 먹으면 된다. 그런데 그냥 버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정도는 자기가 어떻게 하는 게 자기 몸에 더 좋은지 알 수 있는 게 아니냐?

 

사람들에게 물으면 목숨이 음식보다 귀하고 몸이 옷보다 귀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몸을 해롭게 하는 사람은 목숨까지 위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즉 사람들이 몸에다 옷을 맞추어야 할 텐데 옷에다 몸을 맞추는 사람이 있구나. 그런 사람들은 몸보다 옷이 더 귀하다는 식이 된 것이다. 옷에다 몸을 맞추려니 허벅지 살을 옷에 쑤셔 넣게 된다. 또한 신발에다 발을 맞추자니 걸음을 제대로 못 걷는다. 이렇게 되면 장단지 통증, 무릎 통증, 허리 통증이 온다. 그런 경우도 몸보다 의복이 중하다는 꼴이 된 것이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세상이 교회에 들어와서 판을 치는구나. 예수 믿는 기독자가 자기의 추한 꼴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바람이 든 것이다.

 

자기 마음속의 심성이 진리로 잘 다듬어져서 그게 선행 의행으로 나타난다면 사람이 고상해지는 건데 그게 아닌 시간이 지나고 나이 들면 찌그러질 고깃덩어리 육체의 미모성을 내느라고 자기 살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 올 때는 긴 옷을 입어라. 신령천국에 들어가면 스랍들이 발을 덮은 긴 옷을 입고 ‘거룩 거룩’ 찬송을 한다.

 

목숨보다 음식이 중요하냐? 목숨을 위해서 음식이 있느냐, 음식을 위해서 목숨이 있느냐? 어느 것이 더 귀하냐? 음식이 맛이 있거나 또는 음식이 남으면 아깝다고 하며 억지로라도 먹는데 이러면 배가 앞으로 나오다가 나중에는 옆으로 돌아간다. 음식을 옆으로 돌아가도록 먹고서는 ‘배불러 죽겠네’ 하는 건 목숨보다 음식이 더 중요하다는 꼴이 된다. 말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지금 그렇게 사는구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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