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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핵심 진리만을 따르라.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길을 잃은 사람이다.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이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할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길을 잃은 사람이다. 모든 인간의 삶에 안정과 평안을 가져다줄 본질적 진리가 있다. 첫째,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다. 둘째, 오직 하나님만이 지혜로우시다.

셋째, 하나님을 떠나면 모든 것이 무익하다. 넷째,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만 결국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수고로운 인생은 수고한 사람과 함께 죽어 없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우리의 모든 수고에 불멸성을 부여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한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다섯째, 인간의 죄는 실재한다. 여섯째,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신다. 일곱째, 하나님은 우리가 영생에 이르도록 지켜주신다.

 

2.진리를 따를 것인가, 행복을 택할 것인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람 곁에 서서 그 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그를 결코 바로잡을 수 없다. 그의 길을 가로막고 “당신은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가십시오”라고 말해주는 사람만이 그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세상의 도덕적 기준과 종교관이 그리스도의 교훈에 위배 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당당히 ‘노’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죄되는 잘못된 가치관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문제에는 하나님 편에 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3.막대 사탕만 핥는 신앙에서 깨어나라.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진지한 교육 프로그램을 최대한 적게, 오락 프로그램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직 하나님만 기뻐하고 그분만을 사모하는 모임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세상을 향해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더러움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와 자신을 깨끗이 지키는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신자들의 모임’이다. 만약 어떤 교회가 문을 닫는다 해도,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신자들은 다른 교회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4.믿음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붙잡아라.

 너무나 많은 곳에서 ‘믿음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 새로운 그리스도인 세대가 탄생했다. 하지만 성령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첫 번째 삶은 아담 안에서의 삶이다. 이것은 육적인 동기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죽어야 한다(롬8:5-8). 두 번째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다.(롬6:1-14). 

 

5.참된 신앙에는 의지적 결단과 능동적 선택이 뒤따른다.

 참 신앙은 영적 도덕적 변화를 일으키며, 정확한 내적 증거를 갖게 하는데 이런 변화와 증거는 우리가 ‘신앙’을 믿기를 중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진다. 참 신앙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처음 믿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교훈에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도록 요청한다. 

 

6.하나님의 임재 처소는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는 ‘은밀한 방’이 있으며, 거기에는 그의 존재의 신비로운 본질이 거한다. 이 신비한 본질은 인간의 복잡한 여타 다른 본성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그를 창조하신 자존자로부터 선물로 받은 그의 고유 본질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은밀한 방’으로 들어오시길 원하신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들어오실 자격이 있다.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삶의 다양한 부문들 사이에 있는 높은 담을 허물고, 그것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하나님께 봉헌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거룩한 봉헌이었다. 

 

7.하나님께 거룩한 상처를 구하라.

 600년전 ‘줄리안 여사’는 영적 향기로 가득한 아름다운 삶을 통해 영국에서 위대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는데, 이런 명성을 얻기 전에 하나님께 한 가지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이 기도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오, 하나님! 저에게 세 가지 상처를 주옵소서, ‘회개의 상처’, ‘긍휼의 상처’,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를 주소서.” 모든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상처받은’ 영혼들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사병에 걸릴 정도로 그분을 사모하길, 그 상사병이 우리의 마음에 상처가 될 만큼 그분을 갈망하기를, 우리가 언제나 그분을 찾고 또 찾기를 원하신다.

 

8.새 십자가가 아니라 옛 십자가를 전하라.

 오늘날 새로운 십자가가 복음주의 진영에 슬며시 생겨났다. 이곳에서 복음주의적 테크닉이 생겼다. 새로운 형태의 집회, 새로운 종류의 설교이다. 옛 십자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새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지 않고 단지 그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새 십자가는 죄인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그가 품위 있게 즐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준다. 새 십자가는 제 고집대로 사는 사람에게 “와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신의 뜻대로 살아라”라고 말한다. 이기적인 사람에게 “와서 주 안에서 네 자랑을 늘어놓아라”라고 말한다. 짜릿한 것을 추구하는 자에게 “와서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의 짜릿한 맛을 보라”하고 말한다. 옛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완벽한 죽음을 의미했다. 타협하지 않으며, 수정하지 않으며, 봐주지 않는다. 옛 십자가는 사람을 완전히 영원히 죽인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시려는 생명은 ‘옛 생명을 개선하여 만들어낸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생명은 죽음을 통해 나온 생명이다. 그것은 언제나 십자가 저편에 서 있다. 이 생명을 소유하려면 누구나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이 생명을 얻으려면 누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정당한 죽음의 선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옛 십자가를 전해야 한다. 감히 우리가 몽당연필로 하나님의 청사진을 지워버린다거나 시내산에서 보여주신 성막에 대한 본을 바꿀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옛 십자가를 전하자. 그러면 2천년 전 주님의 능력이 지금 다시 나타날 것이다. 

 

9.깊은 고독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라.

 대부분 위대한 신앙인들은 고독했다. 고독은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라고 생각된다. 신약시대 이전의 선지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매우 달랐다. 그런데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고독한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독은 그가 경건하지 않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기 때문에 생긴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뿐만 아니라 심지어 경건한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까지도 종종 삼가야 한다. 

 

10.한 마음으로 서로 교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에 동참하라.

 성도의 교통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함께 누리는 것이다. 성도간의 교통의 울타리로 들어오려면 진리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다른 문은 없다. 여기에 타협이란 결코 없다. 성도의 교통의 또 다른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실체 없는 시적 은유가 아니다. 신약이 매우 강조하는 진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다. 

 

11.자아라는 가장 질긴 잡초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랑이나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그의 관심은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바뀌었다. ‘인생’이라는 동산에서 자라는 가장 질긴 잡초들 중 하나는 바로 자아이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이것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자신의 자아가 죽었다고 우리가 확신하는 그 순간, 자아는 어디선가 건재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서 우리 삶의 열매들에 독을 뿌리고 우리의 평안을 파괴한다. 그러나 승리하려면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일을 우리도 겪어야 한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거부당하고 포기하고 격리되고 추방당해야 한다. 

 

12.참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적 삶으로 전진하라.

 2천년 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때, 그분의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은 과거의 삶을 즉각 포기하고 제자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이런 단호한 헌신이야말로 그들에게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영적인 삶으로의 전진을 위해서는 첫째, 믿음으로 바라기만 하는 단계를 극복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습관들을 버려라. 셋째,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셔라. 넷째, 성령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오셔서 당신을 충만케 하시도록 초청하라. 다섯째, 당신 자신에게 엄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라. 

 

13.성령을 힘입어 믿음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으로 무장하라.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신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이 지금 하늘에서 주권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런 진리는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지식이다. 이런 믿음의 지식보다 더 순수한 지식이 있다. 직접적 영적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습득되지 않고 체험된다. 

 

14.영적 체험의 건전성을 시험하라.

 어떤 교리나 종교적 현상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이것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라고 묻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것이 ‘위로부터’ 왔는지 ‘아래에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영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하나님에 대한 나의 개념에,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이다. 둘째, ‘나의 새로운 체험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셋째, ‘그 체험이 성경에 대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넷째, ‘그 체험이 나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피는 것’이다. 다섯째, ‘그 체험이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을 향한 나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여섯째, ‘그 체험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와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라고 묻는 것이다. 일곱째, ‘그 체험이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15.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보물은 없다.

 이제껏 인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이 보물들을 찾겠다고 발버둥 쳐왔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에게 저주와 고통만 안겨주었을 뿐이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것들을 얻을 수 없다고 깨달은 사람들중 일부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것들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보물들이라면 그들의 시도 역시 심판받게 될 악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실 분이라고 믿기를 바라신다. 

 

16.진리의 정원을 가꿀 뿐만 아니라 담대히 진리의 편에 선다.

 정원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면 잡초가 무성해지듯이, 적극적으로 진리를 찾아 받아들이고 오류를 찾아내어 제거하는 일을 게을리한 사람의 마음은 금방 ‘신학적 광야’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진리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교회나 교파는 머지않아 길을 잃고 이단과 오류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으로 포용적 태도를 취하며 동시에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일이다. 

 

17.진노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다.

 성경을 제대로 배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사랑만큼이나 거룩하며, 하나님의 진노와 그분의 사랑이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진노이고 어떤 것이 그분의 진노가 아닌지 구별할 줄 안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영원히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거룩하지 못한 것’에 대적할 때마다 싸움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피조 세계의 건강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18.기쁨에 찬 영광스러운 소망을 바라보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고 기대하며 기쁨으로 충만한 승리의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몇 명이나 되는가? 어린애 같은 사람들, 순결한 사람들 그리고 소박한 사람들만이 ‘치유해주고 깨끗케 하고 통합시켜주는 종말론적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세계적인 대재앙이 일어나 사람들의 거짓 신앙을 깨뜨리고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돌려놓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영광스런 소망을 잃어버린 세대가 그 소망을 회복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독서일기 ⓒ이재익 목사 (일본 니이가타교회)

<들꽃편지638호>읽을꺼리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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