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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2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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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29절-33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29절-31절: 이 말씀의 뜻의 신앙 사상적 내용이 이미 세상창조 때에 다 들어있다. 너희는 무엇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도 하지 말라고 사람부터 만들었느냐, 물질부터 만들었느냐? 물질부터 딱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구하느냐? 세상물질을 구한다. 언제부터? 선악과 따먹은 그 이후부터.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은 ‘먼저 생명과를 따먹고 그리고 일반과도 따먹어라’ 했다. 그리고 아담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입김을 인간 아담에게 불어넣었다. 그 뜻은 ‘인간아, 너는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존재다’ 그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는 이 말씀의 뜻은 ‘네가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한 눈으로 보는 기준 즉, 먹음으로 기준, 세상적 물질적 기준, 네 경험적 기준은 선악과이니 이 선악과를 너의 신앙기준으로 삼지 말고 말씀순종으로 생명과를 따먹어라’ 그 말이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건 하나님의 세상창조 때 이미 하신 말씀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명과를 따먹어라’ 했으니 천지창조 때 하신 이 말씀 안에 이 정신이 들어 있는 거다. 계:의 아시아 7교회에게도 누누이 이걸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타락되고 속화된 기독교가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지 않느냐? 이건 뭘 먹는 거냐?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거에 대한 뜻을 모르니까 계속 선악과를 먹이고 가르치고 있고, 교인들은 그거에 ‘아멘 아멘’ 하고 돌아가고 있으니 영적 차원에서 어찌 되겠느냐? 그렇게 나가게 되면 영적 차원에서 그 피해성이 신:에 있는 그대로 들어가는 거다. 이처럼 일반차원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앞으로 하나님의 징벌이 어떻게 나타나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면서도 왜 하나님께 얻어맞는 것이냐? 방금 말한 것과 같은 네 중심 사상부터 바로 잡자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서도 그걸 바로 못 잡으니 계속 징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그 중심 사상이 세상으로 다 가 있으니 이것은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고, 이방민족을 의지하는 것이고, 이방민족의 풍속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징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보면 그 분의 인격과 성품과 속성이 다 나타나고 있는 건데, 성령님의 활동이 다 나타나고 있는 건데 말씀 속에서 그걸 못 보니 교회에서 인격과 성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나가면서 ‘와 와’ 하고 떠드는 그게 그만 성령폭탄인줄로 안다. 그런 정신 사상은 지성미는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깨닫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런 교회마다 귀신이 들려서 감정과 흥분으로 치닫게 되는 거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떤 것을 더하신다?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면 세상물질의 것은 따라오도록 돼 있는 거다. ‘만물을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게 하겠다’ 하는 이 속에는 이런 사람으로 되면 그 사람에게는 물질성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돼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먹은 자는 위로부터 오는 단비를 먹고 자기 마음속에서 백배 천배 만배의 결실을 내게 되어 있다. 그걸 모르거들랑 산천초목에 열매가 맺히는 걸 봐라. 그래도 모르겠느냐? 그런데 창세부터 마지막 그 날까지 변치 않을 이 이치는 찾지 못하고 왜 세상 것을 자꾸 구할까? 그 이유는 선악과 먹은 사고방식의 발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고, 교회가 이렇게 나가게 되면 교회 안이 세상 판이 되는 거다. 그래서 ‘너희들은 어떻게 먹고 마실까?’ 하며 목적적으로 세상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은 인간을 만들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 말이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들을 지은 목적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지어졌다 그 말이다. 그런데 인본주의 교회에서는 이것을 지상의 어느 나라 어느 국가의 선악과 따먹은 차원의 의를 구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쉽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 구국주의가 나오고 사회주의가 나오는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쓰여진 것이냐? 이 말씀을 그렇게 보게 되면 거기에는 은밀한 뜻은 없다. 기독교인들이 다 달라붙어서 기준을 하나 세워놓으면 이게 그만 하나님의 의처럼 착각들을 한다. 만능의 능력자가 이 땅의 것을 통일을 못 시켜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냐?
하나님의 의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로 말하면 성경을 통해서 들어가 있다. 예수님이 어느 나라를 구하고 있느냐? 우리에게 전도하신 것을 ‘하늘나라를 가르치시더라. 천국복음을 말씀하시더라’ 하셨는데, 이게 어느 나라의 의냐? 하늘의 것이다.
내가 말씀을 전할 때 내 말을 단순히 ‘재미있다. 재미없다’로 듣지 말고 거짓적인 것이 나오는 건지, 이단성적인 발언이 나오는 건지, 이치가 아닌 말이 나오는 건지 분별해서 들어야 한다. 학교 학생들도 공부하는 이치를 알면 재미가 있다. 그러나 모르면 재미가 하나도 없고 잠만 온다. 이러면 시험 치면 빵점 맞고 얻어맞고 청소를 하게 된다.
우리는 말씀에서 기준을 찾아야 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 기준을 찾아라. 자기가 기준을 잡았다고 할 때 창세 이후 마지막 시대의 사람들까지 내가 가진 그것을 보고 ‘네가 가진 게 옳다’ 이렇게 돼야지 복음이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이냐?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냐? 그렇다면 하나님도 달리지는 거다. 하나님도 늙는다거나 치매가 걸린다거나 하는 거냐?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리 세상이 발달이 돼도 인간 속의 도덕성은 변치를 않는다. 그런데 자꾸 뺑뺑 돌아서 변질이 되니 이 세상이 어떻게 된 것이냐? 그러니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원 교육의 이치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 먹고 타락된 세상은 그건 없다.
‘너희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 누구의 나라냐? 너희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지어졌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천국은 본점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천국지점이니 지점이라면 질적으로 본점을 닮아야 한다. 그게 옳은 거다. 그게 바로 된 거다. 너희들을 지은 목적은 짐승과는 다르다 그 말이다. 앞에서 이에 관한 예를 많이 들었다. 너희들을 지은 목적은 산천초목과는 다르다.
‘그의 나라’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곧, 신령천국이다. 그런데 왜 자꾸 ‘신령천국’이라고 하느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천국 천국’ 해도 그 개념이, 그 소원 목적이 지상에 둔 의미로서의 천국이라고 하기 때문에 굳이 신령천국이라고 붙이는 것이다.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들은 신령천국을 상속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 그 말이다. 상속받는다는 여기에는 영능의 기능적 지능적인 면의 실력이 들어 있다.
이 땅에서도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도 실력이 없으면 부모의 재산을 못 맡긴다. 실력 있는 다른 자식에게 맡긴다. 이 부모는 잘 하는 거다. 실력 없는 자식에게 맡기면 그게 하나님의 재산이요, 국가의 재산이요, 온 민족의 재산인데 그걸 다 허랑방탕 쓰고 자기 몸도 망친다. 그러니 모든 재벌가의 부모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재산관리가 들어가야 한다. 이게 원칙이다.
그런데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들이 재산을 어디에 빼돌리더냐? 그게 애국자냐? 진정한 의미의 애국자는 하나님의 집에 있다. 그런데 이 애국자들이 세상으로 타락이 되면 그 나라는 끝난다.
영적인 면에서 신앙적인 뜻이 따로 있는 거지만 이 세상의 원리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있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이 있기 때문에, 천지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세상에 두고 훈련을 시키려는 뜻이 때문에 아직까지 이 땅을 불로 사르지 않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늘 자기를 심사하고 사람 보기에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서야 한다.
신령천국은 하나님의 속성의 나라다. 그 나라에 가서 살 자라면 인격적 성품적으로 그 하나님의 속성대로 만들어져라. 또한 그 나라는 하나님의 도덕성의 나라요 하나님의 능력성의 나라이다. 그 나라에 가서 살 자라면 영능의 실력적으로 기능 지능적으로 그 나라의 속성대로 만들어져라.
그렇게 만들어지려고 듣고 배우고 깨닫고 활동을 하면 다 공급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활동 속에는 이룰구원이 들어있는 거다. 지금 이 말이 돈을 벌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목적을 어디에 두고 돈을 벌고 일을 해야 하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금생내세의 약속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32절: ‘그 나라.’ 누구의 나라냐? 아버지의 나라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 아버지의 나라에 욕심이 없는 듯하다. 기독교 신문의 광고나 교회의 전도지를 봐도 전부는 세상을 구하고 있다. 세상을 구하지 않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교회와 목사가 몇 명이나 될까?
‘적은 무리여’ 하는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진리생명의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이런 사람들은 처음은 비록 미미하고 어리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그런 성도들에게 그 나라의 통치권을 주시기로 기뻐하고 계시니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그 약속을 믿고 있으라는 말씀이다. 그 약속을 이들에게 성취하겠다는 것이다. 이게 믿어지느냐?
그런데 설날에 부침개 하나 더 얻어먹으려고 교회의 집회(주-궁극교회는 세상 명절휴일 기간에는 말씀집회를 함)에는 참석을 안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느냐? 세상친구 만나서 전도한다고? 그래, 전도가 되더냐?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대우를 못 받는다고 했다. 이 말씀이 여기에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가 일가친척 동기간들이 주격으로 이뤄졌다면 거기에는 다른 교인이 안 들어온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말씀이다. 세상 것으로 발판삼아 올라가려는 그들에게는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약속이 없다. 자기가 올라간 것은 교회의 목사로 말하면 고작 해봐야 노회장 총회장, 장(長)자리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올라가려고, 장로 하나 따려고 몇 억씩이나 주고, 그렇게 해서 안수장로 안수집사가 되면 더 알아주는 것 같으냐? 주님 앞에서는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하는 목사는 어떤 목사인지는 몰라도 가룟유다가 목사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데리러 오면 우리는 그 분을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못 따라가는 목사나 교인들도 있겠다. 왜 그러냐? 평소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천국복음의 사상이 아니라 예수 믿어 부자 되고 세상에서 만사형통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사고방식의 질이 잔뜩 들어 있으니 그런 걸 놔두고 그게 아까워서 어떻게 따라가겠느냐? 말하자면 성질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이 오셔서 부활을 할 때는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는 것인데, 성도들이 부활할 때의 그 상태를 질적 성분적인 면으로 생각을 해 보자면 모르긴 해도 주님이 오시기 전에 주님 오심을 학수고대하며 성령의 기름으로 잘 준비된 성도는 멀리서 오시는 주님의 그림자만 봐도 ‘기다렸나이다’ 하며 두 손을 내밀고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기분 좋게 올라가겠지만 세상에 잔뜩 정을 들여놓은 성도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인 하나의 교인들은 세상을 버리고 가는 게 아까워서 안 올라가려고 롯의 아내처럼 되게 뭉그적거리겠다 그런 느낌이 든다.
그렇게 뭉그적거릴 때 힘 있는 천사가 그 교인의 목 뒤의 옷을 꽉 잡고 끌고 올라가려고 하면 그 교인은 목덜미가 붙잡힌 채 안 가려고 질질 끌려가다가 신발 하나는 저리로 벗겨져 나가고, 입은 옷은 찢겨져 나가고 하는 장면이 있지 않을까? 왜 그런 장면이 있을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그 이치를 깨닫는 집회의 장소에 오기를 왜 그렇게 더디 하고, 뭘 하느라고 그렇게 오기가 힘들까? 세상의 때가 잔뜩 끼어서 그런 것이니, 이런 교인이라면 부활 때 그런 장면이 연출되지 않겠느냐?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올라가봐야 장(長) 이상 더 있느냐? ‘장’ 할 때는 권세를 가졌고, 권위를 가졌고,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상납하고 그런다. 그래서 그런 걸 욕심을 내는 거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올리시려는 것은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로 성령에 충만한 자요, 이런 자는 내적으로 성령의 불이 붙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도는 마귀를 따라 성전 꼭대기로 올라가지 않는다. 장자리를 따려고 그런 것에 목매지 않는다. 마귀는 어디에 올려주는 것이냐?
일곱 교회를 보면 마귀가 역사하는 교회가 있다. 발람이 발락 왕에게 동원이 돼서 발락이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했는데 발람이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는 이스라엘에게 저주 대신 축복을 했지만 그 마음속에는 세상에서 한 자리 해 보려는 정신을 품고 있었다. 그러면 그 축복이 진짜 축복이냐? 뭐가 담긴 축복이냐?
강대상에 올라온 봉투가 두꺼우면 기도가 길고, 얇으면 기도가 짧고 한다면 이게 뭐가 담긴 축복이냐? 설마한들 그런 목사가 있을까? 그런데 왜 없겠느냐? 사람 사는 세상에 별 희한한 일들이 다 일어나듯이 목사들의 세계에서도 별 희한한 짓들이 다 일어난다. 목사가 하나님이냐? 신처럼 여기지 말아라.
진리의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기를 기뻐하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향하여 계속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뛰어내리라고 한다. 옳은 성도는 마귀의 그런 소리는 안 듣고 계속 올라간다. 장자리를 주던 말던, 떨어뜨리던 말던 상관이 없다.
우리의 내적 신앙은 이치 깨달음으로 하나님 앞에 만들어지면서 계속 올라가는 것이다. 그게 참 성도요 참 옳은 종이다. 그렇게 나가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성도가, 그런 종이 다 보고 간다. 어느 종이 마귀에게 동원이 됐는지, 어느 종이 인본주의 사고방식을 쓰는 건지 다 보고 가게 된다.
33절: ‘너의 소유를 팔아라.’ 소유라 할 때 무엇을 소유라고 하느냐? 자기에게 다 소유가 있다. 무엇을 자기 것이라고 하느냐? 무엇을 내 것이라고 하느냐? 은행에 맡겨놓은 돈, 자기의 젊음, 자기의 재산 등 일반적으로 법적으로 자기 것으로 된 것은 다 자기 소유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살아가는데 이용하고 활용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소유다. 그런데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그것을 사용 이용 활용을 못하고 있다면 그건 자기 소유의 가치성은 없다.
장사꾼은 돈이 있으면 그걸 활용해서 불려나간다. 그런 것처럼 자기가 가진 것을 활용을 해야 불어날 것이고, 안 불어나더라도 활용을 하는 것을 통해서 깨달음은 있는 것이다. ‘아,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이게 있는 것이다.
소유에는 첫째는 물질적인 소유가 있다. 쓰고 먹고 마시고 하는 육에 속한 소유. 육신의 양식이나 논과 밭, 활동의 소유, 재물 등의 물질적인 소유가 있고, 그 다음에 일반 지식적인 면에서의 소유가 있다. 학교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이 아는 것, 경험을 많이 해서 많이 아는 것. 이것은 지식적인 면에서의 소유다. 또한 신앙 면의 소유가 있는데, 영적 말씀의 이치를 많이 깨달은 소유. 사람 사는 도리를 말씀에서 이치적으로 많이 깨달은 것도 자기 소유다. 그 다음에 영인성장을 위해서 쓰여지는 자기의 육신, 자기의 자연목숨 등등도 소유다. 그래서 소유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 했는데, 가만히 보면 제자들은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기 때문에 물질소유는 없다. 여기에는 계시가 들어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제자들도 실은 영적인 면의 소유가 있고, 자연목숨도 있고, 건강도 있고, 일생의 시간도 있으니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게 자기의 소유다. 영적 면의 소유는 예수님께서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자타의 구원에 해당되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구제를 할 수가 있다. 이 구제는 자기에게 없어지는 구제가 아니라 없어지지 아니하는 구제이다. 이 구제를 통하여 다함이 없는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어서 무한정으로 채워 넣을 수가 있다.
주머니라 하면 넣는 것이다. 우리의 위장(밥통)도 일종의 주머니다. 이 밥통 주머니 속에 된장국도 들어가고, 쌀밥도 들어가고, 고추장도 들어간다. 이처럼 넣는 것이 주머니더라. 그런데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는 물질에 속한 주머니가 아니다. 물질에 속한 주머니, 또는 가죽부대는 도적이 찢고 훔쳐간다.
자기의 몸도 가죽부대 주머니이다. 자기 몸의 뼈에 살 껍데기로 가죽을 입혀놓고 그 속을 채워 넣으면 탱탱해진다. 그러니 자기의 몸도 가죽부대다. 이 가죽부대는 안의 것에 의해 반응이 된다. 그런데 일반적인 물질적인 가죽부대는 밖에서 들어가게 돼 있지만 영적인 면의 가죽부대는 귓구멍으로 들어가서 안에서 성령님의 작용이 일어난다.
그래서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입을 줬고 또 감화성을 주었으니 하나님 앞에 예배 시 찬송할 때 힘 있게 불러라. 그러면 웬만한 잡병은 다 나간다. 안 부르기 시작하면 자기 목청이 굳어져 간다. 안 하고자 하는 버릇을 가지면 그 사람은 모든 걸 안 하고자 하게 된다. 그러면 무슨 맛으로 사느냐? 오각의 오감성의 희로애락을 준 것은 정말 좋은 선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이나 육신의 병이 들어서 제각기 대체의학이니 하고 있는데 목사들도 무슨 침을 배워서 고쳐준다느니 하고 있다. 목사님들의 안수가 잘 안 통했던 모양이지? 그런 것으로 고쳐주려고 하는 걸 보니까. 또 음악으로 고친다고도 하고. 그러니까 그런 것에는 인간의 사고방식만 있고 하나님은 없다. 또 보자마자 웃게 하는 게 있다. 내가 웃으니 상대방도 웃고, 서로 서로 웃으면 병이 낫는다고 한다. 말씀을 전할 사명이 있는 목사들이 그러고 있으니 이건 귀신이 안 들리고는 이럴 수가 없다. 그런데 주님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니 당신의 말씀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안수하심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 당신의 이 생명과를 먹임으로써 인간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세상 육에 속한 생각, 그리고 그 발상, 그리고 육에 속한 사고방식 소원 목적, 그런 생각을 하는 생각의 주머니도 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세상에다 쌓고자 하는 그 생각의 주머니.
그러나 세상에는 절대 안전한 곳은 없다. 은행의 비밀창고에 넣어도 거기에도 도둑이 있다. 싸워서 가져가는 도둑도 있고, 사기 쳐서 가져가는 도둑도 있다. 사람을 납치해서 돈을 안 주면 죽이는 도둑도 있다. 부모형제 간에 훔쳐가는 도둑도 있다. 수도 없이 많다. 영의 눈을 가지고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교회 안에도 사단 마귀의 종들이 여러 가지 악령 들린 이단과 거짓된 삯군목자 도둑이 참 많다. 그러면서도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
교회에서는 영적 차원에서 자기가 좋아서 비진리인 운동에 막 갖다 주고 충성봉사하고 목숨을 바치는 게 있다. 이것은 사기요 도둑맞는 거다. 첫째는 옛사람이 주격이 된 자기에게 자기가 사기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그럴 때는 자기와 질이 같기 때문에 ‘아멘’하고 막 같이 그리로 가게 된다.
성령이나 악령의 활동은 눈에 안 보인다. 그러니 성도들로 하여금 그 정신 사상의 이치를 바로 깨닫게 해서 하나님 앞에 적중성으로 걸어가게 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에게 차원 높은 영적인 말씀의 뜻을 바로 깨닫게 해서 영적 차원에서도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물질봉사 활동봉사 시간봉사 노력봉사 자기 목숨봉사를 하면서 자기 일생을 도둑맞는 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예수님 덕으로 세상에서 부귀영광이나 얻어서 살 목적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도둑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 사상 자체가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발상들은 이미 구멍이 뚫린 자루와 같아서 그 사람은 절대로 깨달음으로 채워지지를 않는다. 이런 것은 알고 보면 새사람이 주격이 아니고 옛사람 주격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는 벌써 도둑으로 노출이 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믿게 하는 것은 성도들이 주님을 실상적 속성적 성품적으로 닮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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