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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보기)방언의 바른 개념.

사도행전 궁극이............... 조회 수 35 추천 수 0 2022.05.06 13: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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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2:4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 방언에 대하여.

 

방언의 시초가 어디서부터냐? 구약으로 보면 바벨탑 사건에서부터다. ‘바벨탑을 쌓아서 우리 이름을 날리세’ 라고 하며 쌓은 건데, ‘다시 홍수가 나더라도, 즉 심판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세’ 라면서 바벨탑을 쌓은 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한 행동을 당장 끊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대적할 것을 아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해서 온 지면에 흩어서 성 쌓기를 그치게 했는데, 여기에서 각 나라별로 사람들의 말이 달라졌으니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처음의 방언이다.

 

이 방언은 처음에는 같은 말을 썼는데 하나님께서 서로 의사가 통하지 않게 해서 된 방언이다. 이때의 방언은 지금 교인들이 혀를 이상하게 굴리면서 ‘닐니리 날나리 따따리 보따리’ 하는 것과 같은 방언이 아니라 각 나라의 말로 말을 하기 때문에 서로 의사가 안 통하는 방언이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닐니리 날나리 따따리 보따리’ 하는 마귀로부터 받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을 성경의 방언과 같은 것으로 전제를 하고 방언을 생각을 하기 때문에 방언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거다. 오늘날 교회에서 누구도 못 알아듣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보다 저 밑인데도 교인들이 이것을 성경의 방언보다 더 중요시 여기고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러면 성경의 방언을 무시하는 겁니까?’ 라고 하는데, 이렇게 묻는 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마귀의 방언을 옳은 것으로 딱 세워놓고 묻는 것이라서 앞에서 한 내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묻는 거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옳은 것을 가르쳐줘도 안 받는다. 말이 같은데 서로가 안 통하는 것은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영적인 면을 염두에 두고 거듭나야 되겠다고 하는데 니고데모는 말뜻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라고 대답을 했다.

 

그 다음에, 오순절에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서 많은 사람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능력을 입어서 방언으로 말을 하니까 유월절을 지키러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각각 자기가 하는 말로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놀라고 기이히 여기면서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라고 한 방언이 있다.

 

이게 제자들이 유대의 언어로 말을 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알아듣는 말로 들렸다는 의미 같은데, 어쨌든 이곳에는 유대나라의 말을 하는 유대인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고, 또한 유대나라의 말을 할 줄 아는 유대인이 외국에 나가서 살다가 유월절을 맞아 이곳에 모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방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유대나라의 말은 못하지만 유월절을 지키러 모인 사람도 있을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이 모든 사람들이 제자들의 말을 알아듣게 하려고 각 나라의 말로 들리게 하신 거다.

 

사도들이 유대의 언어로 말을 하는데 이방인들이 자기 나라의 말로 들린 것은 하나님의 역사다. 만능의 능력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이 만능의 능력자이신 하나님의 머리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궁리를 하고 연구를 해서 상상도 못할 기이한 것을 발견하고 발명을 해도 전부는 물질의 것이니 물질차원 이상인 천국에 해당이 되는 것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다.

 

사람들이 땅의 생각을 가지고 ‘영원히 영원히’ 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물질의 것이 자기에게 행복을 주니까 이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물질은 땅에 속하고 시간에 속한 것이라서 신령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영원히’다. 그러니까 이 ‘영원히’는 변질될 생각을 가지고 변질될 것에 놓고 말을 하는 ‘영원히’ 라서 그 성질은 신령세계인 천국에는 못 들어간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영원히’ 라고 하는 것은 죽음 저 너머 세계에까지 올라가고, 내가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거, 즉 주님으로 닮은 인격과 성품을 말한다. 이게 영원한 거고, 하나님의 신에 의해 되는 거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믿음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 되자’ 라고 하는 물질성적 개념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다. 세상적인 믿음을 가지면 이를 위해 죽도록 충성봉사를 해도, 목숨을 내어놓아도 영원에, 하늘에 해당이 안 된다. 그래서 성경에 육의 생각이 있고, 영의 생각이 있다고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를 붙들고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도성인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앉은뱅이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세상사람들이 영적인 면에서 귀신이 들렸고, 앉은뱅이요, 소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거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했을 때 당시에 예수님을 믿지 않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이것을 눈으로 봤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소경이라고 했다. 즉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는 거다. 이들은 모세오경의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경의 표면만 알았지 영인성장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을 닮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소경을 들어서 그들이 성경에 눈이 먼 소경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으나 자신들은 소경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고친 것만 알지 그 속에 무슨 뜻이 들어있는지를 몰랐던 거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에 우리보다 하늘의 것을 더 잘 아신다.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셨던 이 분이 하늘의 소식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늘의 소식을 전하실 때 하늘에서 쓰는 말로 전하면 인간은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 하늘나라의 말은 방언이 되는 거다. 하늘나라의 말을 알아듣게 하려고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말로 하늘의 소식을 전하셨다. 따라서 영적으로 보면 성경을 들고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을 수 있는 구원도리와 이치를 말한다면 이것은 하늘나라의 방언을 통역해 주는 거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늘나라를 말하는데, 이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이치와 도리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을 통해, 또는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 이것을 깨닫는 게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알아듣는 거다. 그런데 이건 없고 ‘예수 믿고 세상에서 부자 되고 복 받자’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가 없는 물질성적이요 세상적이요 육적인 신앙이다.

 

성경이 전쟁을 들고 오던, 가난을 들고 오던, 지진을 들고 오던, 홍수를 들고 오던, 노래를 들고 오던, 시를 들고 오던 전부는 하나님의 온전을 두고 믿는 우리를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으로 만들기 위한 것에 목적이 있다. 그리고 성경을 안경으로 끼고 세상만사 만물을 보면 땅이나, 바다나, 어떤 사건이나 환경에서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다고 표현을 하는 거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 편재하신 분이라서 어디든 계신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주일에 교회의 예배시간에 참석했을 때와,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절간에 가서 불공을 들인다면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서 역사를 하시겠느냐? 교회다. 학생이 공부시간에 학교에 안 가고 다른 곳에 가서 놀고 있다면 그곳에서 공부의 실력이 커지겠느냐?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이 주일에 교회에는 안 나오고 절간에 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시겠느냐?

 

성경대로 보면 방언은 니므롯에서부터 나왔고, 각 나라의 말이다. 그런데 이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래서 통역자가 없어서 못 알아듣는다는 면에서의 방언도 있다. 성경대로의 방언은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이치, 하늘의 뜻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땅으로부터 된 것, 감정과 흥분으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은 구원의 이치와 하나님의 뜻이 없기 때문에 방언이라고 할 수 없다. 이걸 놓고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하는 거다.

 

‘일만 마디’란 이상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구원이 없는, 하나님의 뜻이 없는, 구원과 관계가 없는 말을 말한다. 세상의 철학이나 예수 믿고 세상에서 복을 받자고 하는 소리는 구원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런 소리를 백날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말 다섯 마디가 더 낫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이던 유대나라의 말로 전했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나라의 말로 가르치는데도 못 알아들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말씀을 하시는데도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못 알아들었다. 그러니 외국말로 들린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방언이 되는 거다. 오늘날도 믿는 사람 중에 성경을 방언으로 듣는 사람이 많다. 무슨 말이냐? 성경을 인간구원에 놓고 풀어야 하는데 세상을 위해 풀고 있으니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되고, 결국은 마귀장난에 놀아날 수밖에 없다.

 

성경을 표면적 역사적으로만 말을 하면 이건 일만 마디의 방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일만 마디의 방언’을 오늘날 교회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방언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구원이 전해지지 않는 말이 일만 마디의 방언이다.

 

세상으로 속화되고 세상으로 흐르는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 육적인 방언은 그 질이 육성으로 되어있다. 육 목적으로 들어있다. 이건 육의 생각에 속한다. 육의 생각은 땅에서 올라오고, 영의 생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지 땅에서부터 솟은 게 아니다. 하늘의 소식을 알려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하늘의 생각, 하늘의 소원 목적을 믿고 따라가면서 예수님의 성품으로 잘 만들어져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거다. 하늘 것으로 만들어졌으니 하늘로 올라가는 거다. ‘천국, 천국’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천국의 껍데기를 까면 천국의 기쁨과 천국의 성질과 맛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키셨는데, 우리 주님은 무에서 유를 만드셨기 때문에 물고기 한 마리로도 수천 명을 먹이실 수 있다. 몇 마리이던 당신이 하고자 하시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인 게 중요한 거냐, 그 이적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려는 뜻이 중요한 거냐? 이적의 떡을 먹은 사람이 중요한 거냐, 이적의 떡을 먹을 수 있게 떡을 드린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거냐? 성경은 사람을 위한 말씀이니 성경의 그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나 상황도 사람의 구원 쪽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놓치고 자꾸 사건이나 상황에 붙여서 해석을 하게 되면 사람이 온전케 되는 면이 없게 된다.

 

그 예가 구약에서 선지자의 생도가 나무를 벨 때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빠지자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했는데, 이것을 보는 우리 입장에서 도끼가 물에 빠진 게 중요하냐, 물에 뜰 수 없는 도끼를 물에 뜨게 한 선지자의 신앙이 중요하냐? 또한 모세가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드니까 홍해의 물이 갈라졌는데 아무나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리키면 홍해의 물이 갈라지느냐, 홍해를 가를 수 있는 모세라야 갈라지는 거냐? 그러면 모세가 다음 날 와서 또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들면 홍해의 물이 갈라지느냐? 안 갈라진다. 모세의 지팡이에 무슨 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면 시험에 들게 되고, 생각이 넓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못 찾는다. 하나님의 뜻이 안 나오는 생각은 소용이 없다.

 

성령의 열매가 인간의 용어로 아홉 가지라고 하는데, 이 말이 성령이 여기저기에 하나씩 아홉 군데에 있다는 거냐? 그게 아니라 한 분이신 성령께서 때에 따라,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나오는 맛이 다르다는 거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오는 맛을 인간의 용어로 표현을 하자니 아홉 가지라고 말을 한 거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밖에 없느냐? 이 맛과 저 맛을 섞으면 또 다른 맛이 나온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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