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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창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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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진리본질의 신앙을 가지려면 생각을 하고 분석을 해야 하는데, 들었던 거, 알았던 거, 미심쩍은 것을 연구해서 확실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구원이라고 할 때 이룰구원에 강조를 두는데, 성경 대부분이 일반적 일방적 보편적인 기본구원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룰구원 차원에서 강하게 권고도 하고 책망도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주님께서 이뤄놓은 기본구원에만 머물지 않고 기본구원을 바탕으로 하고 주님의 본질로 자라 가야지 주님의 성품으로 자라는 것은 없이 제멋대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을 떠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이 사람은 고난과 고통의 회오리 속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물질위주로 사는 방편을 찾게 되고, 이 맛을 본 사람은 계속 그 길로 나가려고 한다. 이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거다. 진리는 여기에서 탈출케 해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한다. 주님은 적극적 개혁적 돌격적인 사람을 원한다.
우리가 성경을 깨달을 때 한 면만 알아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원칙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성경에 아담과 하와를 꾀인 뱀을 향해 ‘저주를 받아 땅에 기어 다닐지어다’ 라고 한 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그러면 뱀이 처음에는 발로 걸어 다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을 한다던데, 뱀이 짐승이냐, 나무냐? 짐승이다. 그러면 그 때 에덴동산에 뱀만 있었느냐, 다른 짐승도 있었느냐? 다른 짐승들도 있었는데 뱀만 다리가 있어서 서서 다녔고 다른 짐승들은 기어 다녔느냐?
짐승은 인격자도 아니고 영도 없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땅의 것을 먹지 하늘의 것은 못 먹는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방 불신자들의 소원 목적이 땅의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짐승과 같다’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사는 이방인들이 네 발을 가진 짐승이라는 말이냐? 사람에게 짐승과 같다고 하는 것은 땅의 것으로 본능적으로 사는 마음을 말하는 거지 네 발을 가진 짐승이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에 뱀을 향해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라고 한 게 무슨 뜻이냐?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자에게 하는 말이다. 짐승은 인격이 없기 때문에 타락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다. 인간에게 ‘짐승만도 못한 놈아’ 하고 꾸중을 한다. 그런데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라는 말씀을 액면적 글자적으만 보고 말씀의 의도성을 모른 채 ‘뱀이 처음에는 발로 걸어 다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은 뱀이 인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거다.
그러면 뱀을 들어서 왜 이 말씀을 하신 거냐? 그 때 그 때마다 사람 속에 들어있는 타락성의 성질이나 성격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세상의 것을 들어서 비유적으로 말씀을 하는 거다. 이것을 놓치면 자칫 잘못하면 성경의 글자와 문자에 매여서 이치도 아니고, 뜻도 없고, 말도 아닌 희한한 생각을 하게 된다.
성경에 뱀을 들고 오던 짐승을 들고 오던 전부는 비유로 들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뱀이 문제가 아니고, 짐승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이 문제라서 사람이 깨달으라고 그런 것을 들고 말씀을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 산천초목과 우주만물을 만들어 놓으신 것은 당신의 백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우주만물을 만드셨고, 인간에게 교육을 하고, 가르치려니 말씀도 주시고, 성경도 주시고, 신실한 종들도 주시고, 성령도 주시는 거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환경은 우연한 게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인간들에게 생명과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땅에 편만하라고 한 명령을 지키고 실천할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재료들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우리 인간에게 ‘나처럼 되어라’ 하는 모본으로 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주님의 언행심사는 우리가 주님처럼 닮아지는 설계도다. 기독교는 이방종교처럼 공이나 드리고 하는 게 아니라 깨닫고 만들어지고 자체화 되는 거다.
성경에 보면 ‘의인 롯을 생각하사’ 라는 말씀이 있는데, 롯에게 왜 의인이라고 한 거냐? 롯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의인이라고 한 거냐?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을 때 롯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느냐?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악을 행하고 있을 때 롯은 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서 상당한 근심 걱정을 하며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걸 보시고 롯을 의인이라고 인정을 해 줬다.
그 다음에 온 게 부끄러운 구원, 불탈 구원인데, 롯이 타락된 소돔 고모라성에서 탈출을 해야 하는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오죽하면 천사가 손을 잡아끌었을까? 세상을 외치고 자랑하는 것은 전부가 소돔 고모라성의 정신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곳에서 얼른 탈출을 해야 하는데 계속 거기에 붙어있으면 그 결과가 부끄러운 구원, 불탈 구원뿐이다. 잘못되었으면 얼른 대책을 쓰는 게 신앙이고 믿음이다.
다니는 교회에서 은혜가 안 되고, 자라지 못하고, 마음에 걱정 근심만 생긴다면 그곳에서 왕이 되려고 하지 말고 빨리 탈출을 해야 한다. 그래야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말세가 될수록 교인들에게 이런 게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신 거다.
사람에게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이 사람의 신앙도 잘못된다. 이렇게 되면 잘못된 지식이 이 사람의 평생을 다스린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자기의 잘못된 것을 깨닫고 고치고 바른길을 가야 한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면 안 된다. 누가 말을 하던 옳은 말을 하면 거기에서 이치를 찾아서 옳은 쪽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 ‘내 말을 하는구나’ 하고 틀어지면 이 사람은 기본자세가 안 된 거다.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가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이 마음이 넓고 여유롭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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