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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으로 -리처드 로어

 

오직 사랑으로: 교회를 되살려낸 프란치스코의 혁명적 복음

리처드 로어 지음,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20년 10월 15일, 신국판 336쪽, 값 14,000원.

Eager to Love: The Alternative Way of Francis of Assisi (Franciscan Media, 2014)

 

<책소개>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영향보다 플라톤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아 성육신 종교를 탈육신 종교로 둔갑시켰다고 믿는 저자는 성육신 신비주의 전통과 프란치스코의 평화주의 전통의 관점에서 에고 중심적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경쟁과 폭력의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예수처럼 하느님과의 일치를 따르는 사랑, 지혜, 체험 중심의 관상 전통을 통해 온전한 인격과 평화 실현의 길을 역설한다. 그는 복음을 원죄론과 대속신앙이라는 부정적 관점 대신에 하느님의 철저한 사랑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해명하며, 예수의 죽음보다는 예수의 삶이 우리를 더욱 잘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에고의 변화와 신화(theosis)라는 적극적 관점에서 구원을 해명하는 그는 이 책에서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되찾은 진정한 복음을 “대안적 정통주의”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밝혀준다. 교회가 제국의 종교권력이 된 이후, 예수가 보여준 하느님 나라의 체제변혁적 삶을 살아내기보다는 예수 자신을 예배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예수를 따르는 모험과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던 교회를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되살려냈는지, 그가 설립한 수도회의 기본적인 원리들은 무엇이었는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개신교 대속신앙은 왜 예수 장사꾼들을 양산했는지, 독생자의 피로 인류의 죄를 용서하신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은 왜 대체로 폭력적인지,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실 필요조차 없었는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죽이지 못한 예수의 꿈과 정신을 교회는 어떻게 죽였는지, 예수와 바울로, 프란치스코의 혁명적 복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또한 클라라와 보나벤투라, 스코투스의 신학 전통은 무엇인지, 왜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성직자들보다 역사적으로 더욱 큰 영향을 끼쳤는지,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바리사이들이 되기 쉬운지,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말의 참뜻은 무엇인지,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교회는 왜 자연 파괴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지, 하느님이 어떻게 초인격적이며 동시에 인격적인지, 그리고 대속신앙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지를 해명한다. 이처럼 저자는 인류문명과 교회가 모두 전대미문의 위기에 봉착한 암담한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을 되찾게 함으로써 위로와 희망을 주며 문명전환의 근원적 돌파구를 제시한다.

 

<목차>

머리말 옛 것과 새로운 것 __ 13

1장 “신비주의”란 무슨 뜻인가? __ 25

2장 행복한 내리막길: 고난을 겪은 이들의 내적 권위 __ 45

3장 내부의 가장자리에서 살기: 단순함과 정의 __ 61

4장 본거지(Home Base): 자연과 길 __ 73

5장 관상: 앎의 다른 방식 __ 91

6장 대안적 정통주의: 다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 __ 115

7장 프란치스코의 천재성: 부정적인 것들의 통합 __ 139

8장 가벼운 가슴과 확고한 발: 여성성과 남성성의 통합 __ 159

9장 클라라의 유산: 깊이의 삶 __ 179

10장 타인의 세상에 들어가기: 프란치스코와 이집트 술탄 __ 195

11장 보나벤투라: 사랑에 맡기는 것이 원천에 돌아가는 길 __ 203

12장 존 던스 스코투스: 멍청이 말고는 무엇이든 __ 219

13장 프란치스코: 자연적인 영적 천재 __ 237

부록 1 나사렛 예수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역동적 일체성 __ 257

부록 2 하느님이 인격인가? 신의 본성에 관한 견해 __ 279

부록 3 온갖 일은 어떻게 “초래되는가”? __ 299

 

<저자>

리처드 로어 신부(1943- )는 프란치스코회 사제로서, 오랜 영적 지도와 상담을 통해 애니어그램, 남성들의 영적 성숙, 역사적 예수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보편적 그리스도』(2019) 등 20권 이상의 주옥같은 책들을 발표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1971년에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새 예루살렘 공동체”를 설립했으며, 1986년에는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 “행동과 관상 센터”를 설립하여 토머스 머튼을 이어 관상 전통을 되살려내는 일에 헌신해왔다. 그는 예수의 복음에 철저하며 토마스 머튼을 이어 관상 전통을 강조하며, 우주와 성서와 인간의 영혼 속에서 하느님의 신비와 사랑을 통전적으로 찾고 있다. 특히 가톨릭 신부들을 위한 피정을 17년 넘게 인도하고, 앨버커키 교도소 지도신부로 14년간 사목한 경험을 바탕으로 『불멸의 다이아몬드』,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위쪽으로 떨어지다』, 『벌거벗은 지금』 등 이미 아홉 권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질문들>

말라죽어가던 교회에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새로 생명을 불어넣었는가?

그리스도교는 왜 성육신 종교로 시작해서 탈육신 종교로 둔갑했는가?

‘오직 믿음’을 강조한 개신교 대속신앙은 왜 예수장사꾼을 양산했는가?

빌라도가 죽이지 못했던 예수의 꿈과 정신을 교회는 어떻게 죽였는가?

독생자의 피로 용서하신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은 왜 대개 폭력적인가?

인간의 영혼 구원만을 강조하는 신자들은 왜 나르시시즘에 빠지는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태어날 필요도 없었는가?

예수는 정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오신 것인가?

예수와 바울로, 프란치스코가 살아낸 혁명적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보나벤투라, 스코투스의 핵심적인 신학 전통은 무엇인가?

믿음의 반대는 왜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과 확실성에 대한 요구인가?

자연 파괴와 팬데믹 사태에 대한 전통신학의 근본적 책임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가 되살아나기 위해 가장 시급한 신학적인 혁명은 무엇인가? 

 

<서평>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비밀을 풀어냄으로써 리처드 로어 신부는 또 다시 프란치스코 전통의 기초적인 주제들을 알기 쉽고 놀랍게 적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그 영성의 영원한 특질을 우리 시대에 새로운 방식으로 밝혀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느 곳에서 살든지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큰 선물이다.”

?Daniel P. Horan, O.F.M, The Last Words of Jesus:

A Meditation on Love and Suffering 저자

 

“리처드 로어 신부는 직조(織造)의 대가로서, 새로운 개념들을 씨줄로 삼고 새로운 이해를 날줄로 삼아 아름답고 근본적으로 통합된 전체로 짜낸다. 이 책에서 그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걸어간 길이 온전함을 향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밝혀준다. 13세기의 영성을 빅뱅 우주론 속에 직조함으로써 로어 신부는 프란치스코의 삶의 방식을 우주가 펼쳐지는 선봉에 자리매김 한다. 이 새로운 책은 그의 영적인 천재성을 반영한다.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책을 읽어야 한다.”

? Ilia Delio, O.S.F., Compassion:

Living in the Spirit of St. Francis 저자

 

“리처드 로어 신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지혜를 밝혀주는 가장 진정한 목소리 가운데 한 분인데, 이 영원한 지혜는 오늘날 합창으로 울려 퍼지면서 우리를 이분법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모든 문화의 중심에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말로 이 책은 깊은 관상의 삶으로 인도하며, 매일 시장 한복판에서 산(山) 정상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모델일 뿐 아니라 산에 대해 성찰하는 삶의 모델이다. 이 책을 여는 순간 지혜의 노래가 울려 퍼져 우리로 하여금 기쁨 가운데 복음을 이 세상 속에서 춤추도록 초대한다.…

로어 신부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어둠 속에서 알게 된 빛을 우리가 감지하도록 손짓함으로써, 프란치스코와 그의 친구이자 자매였던 클라라를 빛과 생명의 스승이라고 가리킨다. 여기서 그는 왜 지혜가 영원한지를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고통 속에서 관상의 삶을 살 것을 제시하며, 또한 어두운 세계이지만 빛으로 가득한 자비의 장소로 안내한다. 로어 신부의 기쁨과 번득이는 유머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가 복음과 오늘의 세계를 대조시키는 것을 통과해서 그 자비의 장소로 가도록 도와준다. ? Fr. Dan Riley, O.F.M., Mt. Irenaeus Franciscan Mountain Retreat 창립회원

 

<본문 속으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프란치스코 이후에 나타난 지속적 영향과 완전한 새로움을 검토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아마도 그의 혁명적인 생애를 더욱 큰 놀라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5-16쪽)

 

우리 자신의 정신, 가슴, 몸, 영혼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너머에는 어떤 “구원”도 없고, 하느님을 알거나 기쁘시게 할 비밀스러운 도덕적 명령도 없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우리는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가르침, 즉 우리 모두가 매일 매일 간절히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핵심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의 제목을 『오직 사랑으로』(Eager to Love)라고 정했다.(35-36)

 

제도화된 종교는 예수께서 결코 단 한 번도 언급하시지 않은 문제들(산아제한, 낙태, 동성애)에 훨씬 많은 주의를 기울여왔으며 또한 그분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마태오 19:21])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해왔다.(131쪽)

 

그러나 나는 이것이 예수님의 혁명적인 복음의 핵심이며, 바울로의 깊은 체험의 핵심이며, 또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그처럼 단순하고 우아하게 살아낸 핵심적 통찰이라고 믿는다. 부정적인 것을 통합시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야손의 집에 모였을 때처럼 여전히 “온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들”(사도행전 17:6)을 만들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장님이며(요한 9:39-41),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장님인 것이다.(140)

 

기본적으로 우리가 스코투스가 주장한 것처럼, 하느님의 완전하며 절대적인 자유와 사랑에 열심이시라는 이해를 잃어버리게 되면, 인간은 계산의 세계로 전락한다. 모든 것은 측정하고 계산하고 조금씩 베풀고 갚아야만 한다. 이것이 영웅적인 희생이나 필요한 속죄에 대한 개념이 사람들의 심리에 끼친 영향이다. 또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성전종교가 하느님의 은총을 “사고파는” 모든 시도들과 함께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한 2:13-20). 그런 모습에서는 하느님을 달래주어야 하며, 그처럼 기분에 좌우되며 화가 나 있는 신에게는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예수님이 가르친 메시지가 아니다. (232-233)

 

우리가 공식적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었다고 믿었지만, 그러나 우리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탓에,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오직 신이었던 반면에, 우리는 오직 인간뿐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매우 중요한 요점을 놓쳤는데, 그것은 그분 안에 인간성과 신성을 함께 놓은 다음에는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서도 그와 똑같은 것을 감히 발견해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포용적인 구원자(Savior), 즉 우리가 모방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구원자를 매우 배타적인 하느님으로(오직 예수님만이 하느님이라고 믿고) 예배해야 하는 속량자(Redeemer)로 둔갑시켰다.(269)

 

<독서일기>

역자 주... 가 생각해 볼거리가 많이서 옮겼다.

1.저자가 그리스도교가 탈육신 종교가 되었다고 보는 이유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인해 몸, 물질, 여성, 자연에 대한 멸시만이 아니라, 은총 대신에 업적과 성취 중심의 종교, 삶 대신에 말(이론, 신학, 논쟁, 머리) 중심의 종교, 용서와 사랑 대신에 심판과 보상의 종교가 된 때문이기도 하다. 참조, 『불멸의 다이아몬드』, p. 26-27, 역자주.

 

2.안셀무스의 속죄론은 흔히 “만족설”이라 부른다. 그것이 교회 역사에서 “가장 불행하게 성공한 주장”인 이유는 가장 일반적인 속죄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로 인해 하느님의 정의와 명예가 실추된 것에 대해 하느님은 반드시 당신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 정의와 명예를 회복하실 필요가 있었으며 따라서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서 하느님이 만족하셨다는 이런 주장은 중세시대의 정의와 명예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특히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 나온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정의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피를 흘린 것처럼, 십자군 역시 무슬림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 군주들과 하느님의 명예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피를 흘릴 필요가 있다는 정치 선동적 맥락에서 이용된 폭력적인 속죄론으로 비판받고 있다. Cross Purposes: The Violent Grammar of Christian Atonement (Harrisburg,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2001), 103-4; Kwok Pui-lan, Postcolonial Imagination & Feminist The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5), 13; Elizabeth A. Johnson, Creation and the Cross: The Mercy of God for a Planet in Peril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2019) 참조.

 

3.대속 이론들은 우리가 개종시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심을 불어넣어주었을 뿐, 이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속론은 많은 진지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장삿속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신화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마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처럼 매우 어렵게 흥정하시는 분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느님이 사랑하실 수 있고 자기 자녀들을 용서하실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빚을 갚을 필요가 있으며 심지어 (독생자의 피를 요구하는) 매우 폭력적인 거래를 필요로 하시는 분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이것은 화가 나 있으며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학대하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서 우리가 믿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처럼 일반적이며 매우 잘 먹혀들어가고 있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깊은 치유를 필요로 하며, 내가 남성들의 영성에 관해 쓴 책들의 핵심이었다.) (p. 230-31)

 

4."그리스도교가 지난 몇 세기에 걸쳐서 더 많은 신비가들과 성인들을 낳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또는 흔히 의식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 아버지 하느님과 연합하기를 바라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런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자신의 피조물들을 돌보시기 위해 피로 갚아드려야만 했는데, 이것은 옹졸하고 처벌하는 모습이며, 따라서 우리는 일관성 없는 메시지와 우주로 끝장나게 되었다. 바울로는 우리에게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1 고린토 13:5)라고 말했지만, 분명하게 하느님은 이 규칙에서 예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영혼이나 성숙한 영성을 위해서는 먹히지 않는다."

 

5.저자는 우리 모두 에고 중심의 사고방식에 중독되어 있다고 보며, 신앙이 인식론의 회심에서 출발한다고 역설하는데, 에고 중심의 비교하며 경쟁하는 이분법적(dual) 사고방식에서 불이적(non-dual) 사고방식으로 회심할 것을 강조한다. 저자는 종교가 흔히 성/속, 선/악, 정결/불결로 나누고 자신은 성스럽고 선하며 정결한 집단에 속하는 것처럼, 자기 눈 속에서 대들보는 보지 못한 채 타인의 눈 속에서 티끌을 찾아 정죄하는 바리새적인 위선과 가짜 자기(에고)의 팽창을 초래하지만, 하느님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화육 신비주의 입장에 서 있는 저자는 화육이 영/육, 신성/인성의 이원론을 극복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플라톤주의의 뿌리 깊은 잔재일 뿐 아니라 계몽주의 이후 합리주의, 과학주의, 세속주의와의 싸움에서, 그리스도교가 신비, 사랑, 지혜, 체험, 관상중심의 종교에서 이분법적 인간중심, 믿음중심, 머리중심의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한다(The Naked Now [2009], p. 110). 저자는 자신의 신학적 요점을 정리한 책제목을 Yes, And (2013)로 붙일 정도로 사고방식의 회심을 역설한다. 우리는 불의한 사회 현실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 악한 현실에 대해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Yes!”라고 인정하고 출발해야 “악의 세력”과 “원수들”조차 배제하지 않은 채, 진정한 비판과 용서와 비폭력적인 화해가 가능해진다는 입장이다.

 

6.이처럼 전 지구적인 식량과 자원의 독점으로 인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종족학살(genocide)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종자학살(biocide), 기후붕괴로 인한 지구학살(geocide)은 약한 생명체들부터 대량 학살하는 “전 지구적 아우슈비츠 체제”이며 인류 스스로 벼랑 끝을 향해 치닫는 자멸적인 체제다. 인류 역사상 인간의 죄와 악의 구조가 전 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시대, 특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시대, 그리고 적자생존과 각자도생, 숙명론과 허무주의라는 악령이 더욱 휩쓸고 있는 묵시종말적 시대는 교회가 “악마의 맷돌” 속에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고, 상생의 가치관과 생태문명의 비전을 제시하고, 정치경제 구조를 변혁시킬 생태공동체 건설과 생태신학/영성 형성과 확산에 전념할 때다. 시장자본주의 체제의 무한 경제성장과 사적 이윤 추구는 이처럼 대량 학살의 체제이기 때문에, 에고 중심의 탐욕과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특히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비판),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심뿐 아니라 만물의 하나됨과 연결성/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이 시급히 요청된다. 그러나 성서보다 “새로운 우주론”에 기초한 창조영성/신학은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를 막지 못한다. 만물의 연결성은 서로 돌봄의 기초인 동시에 포식자/피식자의 연결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Daniel Castillo, 2019:15). 따라서 성서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죄와 구조악을 극복하기 위한 구원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한 인간의 구원과 정치적 생태학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한국적 생태해방신학을 구성하는 과제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의 근본 원인인 생태위기에 대해 교단 총회들은 아무 언급조차 없다. 주일 예배에 자주 참석하는 사람일수록 생태계 문제에 대해 “지배와 정복”(창 1장) 모델을 따르기 때문이다(Wesley Granberg-Michaeloson, 1987:3). 창조주의 전능성을 믿는 초자연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기후위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David. R. Griffin, 2019:318). 이런 점에서, 동정녀 탄생을 종교적 진리가 아니라 생물학적 진리, 즉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믿는 성서 문자주의는 결국 인간이 자행한 생태계 파괴와 그 회복에 대한 책임성을 부인하고 전능하신 하느님(또는 메시아)의 초자연적인 기적에 의지하도록 만들 따름이다.

 

7.카렌 암스트롱(The Lost Art of Scripture, 2019)에 따르면, 성서는 뜻밖의 역사적 충격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염원의 문서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인, 에서, 하갈, 이스마엘은 잔인하게 거절당한다. 대홍수, 계속되는 기근, 노예생활, 국가의 멸망과 유배생활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적 의심과 무의미성을 되씹게 했다. 이집트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는 정책,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본문은 민족의 절멸 위기를 반영한다. 실제로 아시리아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가까이 계셔서 돌보시던 하느님은 성전 파괴 이후 자신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표현한다. “내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말고, 너희 자신의 일이나 염려해라!”는 뜻이라고 한다(p. 103). 하느님은 이제 더 이상 초월적인 인격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만물 전체 안에 내재하신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거룩성”을 존경해야 하며, 민족적 배타주의가 아니라 희년법과 같은 철저한 평등주의가 요청된다. 낯선 사람들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만 한다(레위기 19:34). 성서는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 선택”을 현실적 비극에 대한 극복 방법으로 제시하며 또한 하느님의 역사 개입을 염원해왔다. 그러나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는 지금은 더 이상 하느님의 초자연주의적인 개입을 희망할 수 없게 만든다. 삼라만상 안에서 하느님을 인식해야 하며 생태계 파괴와 인류의 멸종은 철저하게 인간의 책임에 달려 있다. 따라서 성서를 철저히 재해석해야 하며, 예수님의 체제전복적 비전이 그만큼 중요해졌다.

 

8.예수님의 영향보다 플라톤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았고, 삶보다는 말(교리, 논쟁)에, 가슴보다는 머리에, 사랑보다는 보상에 치중해 성육신 종교가 탈육신 종교로 전락했다고 보는 저자가 쓴 이 책은 우리의 교회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이 바울로의 신학을 오해하여 “오직 믿음”을 강조하고 대속신앙을 가르친 것이 어떻게 오늘날 수많은 예수장사꾼을 만들어냈는지를 깨닫게 한다.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독생자의 피를 요구하신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은 왜 대체적으로 폭력적인지,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날 필요조차 없었는지, 인간의 “영혼 구원”을 강조한 교회는 왜 소수자들의 인권과 생태계 파괴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지를 밝혀준다.

 

9.많은 설교자들이 “오직 믿음”과 “대속신앙”과 “영혼 구원”과 “천당”을 가르칠 뿐 아니라 “성공과 번영의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중산층에게든 가난한 사람들에게든 시장자본주의 체제의 수탈과 무한경쟁과 고통을 잊게 만드는 “인민의 아편” 판매상이 되는 이유는 설교자들이 사회적 기존질서(status quo)에 편승하는 것이 목회 현장에서 보수적인 평신도 지도자들과 신학적으로 다투지 않고 훨씬 편하게 목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하느님의 본성과 예수님의 복음을 완전히 왜곡한 채, 사회적 기득권자들의 “기생충”이 되는 길로서, 예수님의 체제전복적 꿈과 정신을 죽이는 길이며 교회를 죽이는 길임을 이 책은 분명히 깨닫게 한다.

분명한 것은 성서의 야훼 하느님은 노예를 해방한 반제국주의적이며 반체제적 신일 뿐 아니라, 신들의 세계에서조차 반역적 신이라는 점이다. 야훼는 애당초 가나안의 지존자 “엘”의 아들들 중 하나로서 야곱족속을 할당받은 신이었다가(신명기 32:8-9) 나중에 엘과 병합되는데, 시편 82편에서는 야훼가 여전히 “엘의 아들들” 중 하나로서, 엘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편들지만, 야훼는 가난한 소작농들을 옹호하며 다른 신들을 탄핵한다. 사회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끝장내려는 체제변혁 과업에 참여하지 않는 유대-그리스도교는 야훼와는 무관한 집단일 따름이다.

나아가 이 책은 생태계 파괴와 팬데믹 사태에 대해 전통 신학의 근본적인 책임은 무엇인지를 묻게 만든다. 특히 전 세계적인 경제적 불황만이 아니라 기후 재난들과 대규모 난민들로 인해 생존 조건이 더욱 악화됨으로써 이미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극우파 혐오주의자들이 사람들의 깊은 절망감을 이용하여 더욱 득세하고 있는 현실에서 조만간 북반구에서 식량폭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때, 교회가 또다시 크리스천 파시스트들과 같은 폭력 집단의 선봉에 서게 되지 않을 수 있는 신학적 대책은 무엇일지 성찰하게 만든다.

결국 교회가 이처럼 문명전환을 위한 진보적 역할을 하기는커녕 “인민의 아편” 판매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우리의 에고 자폐증을 치유하지 못한 탓이다. 따라서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은 “더욱 풍성한 생명”을 위한 복음을 어떻게 우주-지구-생명-인류-문화 진화의 관점에서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복음이 우주적인 원리인 다양성, 서로 주체성, 친교를 확장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10.저자의 첫 번째 대안은 정통주의 신학에 결여된 복음과 구원의 우주적 차원을 회복하는 길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빅뱅에서 시작된 화육과 “우주적 알”(cosmic egg)이 우리의 정체성의 일차적 맥락이다. 우리의 구원을 가장 방해하는 에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실재 중심의 겸손한 신학을 회복하는 길이다. 그래야만 삼라만상의 모든 인연과 같은 근원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적대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 번째는 특히 개신교 전통의 “오직 믿음” 대신에 “오직 사랑”을 복음의 핵심으로 회복하는 길이다. 루터에게도 “믿음을 통한 칭의”는 우리가 자신의 불치병을 깨닫고 전능한 의사이신 하느님의 손(은총)에 완전히 내맡기는 결단이다. 하느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퇴원하여 세상에서 “정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로마 6:13). 말(신학, 설교)과 머리 중심의 탈육신 종교에서 벗어나 온몸으로 하느님의 아픔에 참여하고 상생을 실천하는 진정한 성육신 종교를 회복하는 길이다.

 

세 번째는 하느님을 철저히 사랑한 예수님을 인간 영혼의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운 “본보기”로 이해하고, 예수님과 프란치스코처럼 기존체제의 변두리 밑바닥에서 우리들 자신이 본보기가 되는 길이다. 대속신앙에 대한 대안적 돌파구가 여기에 있다. 본보기가 보여주는 실천적 사랑의 전염만이 고통당하는 이들 앞에서조차 돌처럼 굳은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내에 열한 번째로 번역된 저자의 이 책은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의 구원과 우리의 이웃과 생태계에 대한 책임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매우 건강한 대안이다. 문명전환의 책임성과 교회를 죽이는 “인민의 아편”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우 시급하게 요청되는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을 강조한 건설적인 종교비판이기도 하다.

 

11.성서 전체, 특히 예수와 바울로의 복음이 일차적으로 제국신학과 성전신학 같은 거짓신학과의 싸움인 이유는 그런 거짓신학의 특징이 에고의 팽창과 차별, 혐오, 배제와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짓신학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본성과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와 구원을 왜곡한 것이다. 그러나 빅뱅 이후 삼라만상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 그리스도”를 역설하는 이 책의 저자는 프란치스코의 지혜를 따라 날카로운 신학 논쟁이 아니라 “대안적 정통주의”를 온몸으로 살아내는 방법을 부드럽게 우리의 마음에 호소한다.

 

12.Jon Sweeney는 당시 교회와 금욕적 성자들이 이 세상을 멸시하고 실제 삶보다는 교리 논쟁에 몰두하고 또한 일곱 가지 성사(성례전)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것으로 가르쳤지만, 프란치스코는 창조세계를 받아들였으며, 신학 논쟁과 교리 진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삶의 많은 부분에 대해서 불가지론적이었고, 또한 성사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교회 밖에서 아름다움, 노래, 숲, 타인들, 예술 속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찾고 믿음을 경축하도록 격려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중세 시대에 방랑하던 “하느님의 음유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그는 수도원의 안정과 특권과 신학 연구보다는 충만한 영혼으로 자신의 신앙적 기쁨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했으며, 이런 변화가 교회를 변화시킨 것으로 설명한다. 이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번째 회칙이 신학이나 가족계획 같은 윤리가 아니라 “복음의 기쁨”이라는 것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When Saint Francis Saved the Church, pp. 20-27.

 

13.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기간(1182-1226)은 초기 자본주의가 시작된 시대였으며,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던 시대였을 뿐 아니라, 교회 권력이 최고에 달해 부패함으로써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개혁운동을 일으키던 때였으며, 또한 “아더 왕의 원탁의 기사”와 파르시팔(Parsifal, “완전한 바보”) 같은 성배(Holy Grail) 찾기 이야기들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1180년대부터 1350년까지)였다. 저자는 당시 교회가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우주적 지배자로서 예배하는 일에 몰두했으며, 믿음이 사랑과 희망과 같은 삶의 실제적 문제보다는 교리 문제에 치중하여 신학조차도 “달을 바라보지는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관해서만” 옳고 그름을 다툼으로써 예수님의 위대한 복음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모험적인 영적 여정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평신도들이 영적 여정의 필요성 때문에 성배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성배 찾기 여정은 에고가 원하는 작은 틀(세계)을 벗어나 예수님처럼 보다 큰 생명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이런 성배 찾기 이야기들은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 이야기 이후 2천 년 만에 다시 등장한 남성들의 영적 모험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교회가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칠 뿐 아니라 참된 여성성을 잘못 오해하여 사제들은 성전종교에만 몰두하고 신자들을 “교회의 쥐새끼들”처럼 교회생활 중심으로 만드는 시대에도 남성들의 위대한 영적 여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Richard Rohr, Quest for the Grail, pp. 9, 55, 68; 『야생에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남자들의 영성에 관한 성찰』(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6), pp. 26-27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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