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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책 내용 요약이 아니라
책을 읽고 한 챕트에 하나씩 최용우가 묵상한 것을 최용우의 말로 기록한 독서일기입니다.
1.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가 비싼 이유는 상황에 따라서 변하지 않고 언제나 다이아몬드의 성분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이었다가 아니었다가를 넘나드는 기회주의자가 되면 안 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을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2.진짜 거듭난 사람
예수님을 선심 쓰듯 ‘믿어주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전 인격과 인생을 쏟아부어 악착같이 예수를 붙잡습니다. 한번 문 것은 절대로 놓지 않는 진돗개 같은 강한 정신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진짜 거듭났다면 거듭난 자의 믿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3.거듭남
육체적 출생은 누구에게나 일어난 평범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영적인 출생이며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아주 특별하고 신비한 기적입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출생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별한 권리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출생입니다.
4.지적 이해
복음주의적 이성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지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무엇을 공부했느냐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12제자 중 ‘가룟 유다’만 예루살렘 대학 출신이었는데, 그는 다른 제자들은 물론이고 갈릴리 지방 출신인 예수님 조차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지적’으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5.영적 이해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나사렛이라는 지방 출신이라는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정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지방 출신인데 어디서 저런 놀라운 교훈을 배웠는가?’(요7:15) 그것은 예수님이 성경의 진리를 ‘영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6.진리는 사는 것
진리를 ‘아는 것’이 진리인가? 아닙니다. 진리를 ‘살아가는 것’이 진짜 진리입니다. 기독교 신학을 공부해서 진리를 지적으로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인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학 같은 것은 몰라서 진리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시골 노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삶 가운데 진리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진짜 진리입니다.
7.저절로 주어짐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거나 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굳이 하나님께 하지 않아도 다른데 빌 곳이 많습니다. 팔공산 갓바위 같은데 가서 비는 것이 더 효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아버지께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주어지는 것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8.하나님이 계신 곳
믿음의 사람이 혼자 광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설교자가 당당하게 설교를 하고 당당하게 설교한 대로 실제로 살아낸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인 성도가 오직 하나님께 응답을 받겠다는 일사 각오로 주님만 바라본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9.위로인가 진리인가
오늘날 사람들은 세상살이에 너무 지쳐서 교회에서라도 ‘달콤한 위로’를 들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현대 교회 안에서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민감한 주제와 사람들의 양심을 찔러 각성시키는 설교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설교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교양 강좌’가 되어 버립니다.
10.예수님이 사랑하는 목회자
아무개 목회자님이 말하기를 “우리 교회 교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하고 글을 썼습니다. 저는 “그거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목회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좋아하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좋아하십니다.”하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11.양심
성경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는 항상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사용됩니다. 양심은 충분히 깨달은 것이고, 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은밀히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양심의 근원은 그리스도의 은밀한 임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이 빛이 바로 양심이고 그리스도이십니다.
12. 화인 맞은 양심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어떻게 의사 표현을 하실까요? 성령님은 참 빛이시며 그 빛을 비추는 ‘조명’이십니다. 그 조명은 바로 ‘양심’을 향해 비춥니다. 아무리 많은 성경 말씀과 설교를 듣는다 해도 성령님의 조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화인(火印)맞은 양심은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한다(담전4:2)고 합니다.
13.더러운 혀
어떤 사람의 혀가 더럽다면 그것은 양심에 질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의 혀가 방금 설교를 끝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혀가 한 시간의 기도를 끝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양심에 백만개의 파괴 세포가 생긴 것입니다. 성령님이 아무리 빛을 비추어도 더러운 양심으로는 비추어 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14.가면의 사람
현대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데, 그 가면이 벗겨질 때는 그 사람이 분노할 때입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인자한 사람이 화가 날 때 독설을 퍼붓는다면 그 사람의 본 모습은 독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화가 났을 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확하게 파악이 될 것입니다. (요8:44-47)
15.광야와 같은 마음
지금 우리의 마음은 정원보다는 광야에 더 가깝고, 하나님의 동산보다는 요단강 너머의 넓은 땅을 더 닮은 것 같습니다. 광야에서는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고 말은 하지만 믿음의 열매를 볼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은 불신자들이 보아도 꼴불견입니다.
16.어디에 있느냐?
유튜브에서 ‘설교’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제목을 다 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설교 동영상이 뜹니다. 그런데 마치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스라엘 땅과 같이 하나님의 음성도, 성령의 감동도, 예언도 없는 황량함만 느껴집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다들 광야로는 안 나가고 도시로만 도시로만 몰려갑니까?
17.잘 산다는 것
현대에는 과거에 없는 신기하고 새로운 기술이 날마다 만들어집니다. 인간의 삶이 더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더 살기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적, 지적 발전이 우리를 더 선하고 착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과학이 발전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인간의 목숨을 더 많이 더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18.방관자가 된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도덕적 타락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구닥다리 생각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어기는 것을 오히려 찬양하고 노래하면서 즐긴다면, 우리는 조만간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눈감아주고 방관한 종교 지도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통곡을 하게 될 것입니다.
독서일기 최용우
<들꽃편지641호> 읽을꺼리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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