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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4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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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2장 47절-48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47절-48절: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비진리의 종들이 기독교 안에 많다. 이게 다 거짓 종들이다. 그러면 참 종은 어떤 게 참 종이냐? 진리의 종은 어떤 게 진리의 종이냐? 참을 알면 거짓은 그냥 드러난다. 그런데 설령 거짓 종을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도 참을 모른다면 자기가 거짓일 가능성이 많다. 참을 알아야 참 사람이 된다. 그래야 주님처럼 만들어진다. 참을 모르면 참 사람이 안 된다.
주님처럼 인격이나 성품이나 소원이나 목적이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이 신적인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다면 살면서 모든 관계성적인 면이 바로 된 것이 아니다. 밥 먹고 살았다고 해도 인격적 관계성에서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누군가 좋은 기술이나 좋은 뜻을 가졌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가고, 다음 세대가 잘 살도록 만들어 놓고 간다. 그런데 또 보면 일반사람들 중에는 물려줘서도 안 되고 물려받아서도 안 될 것을 물려주고 물려받아서 사람이고 가정이 망가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주님의 것을 알고 주님의 것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 당신이,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교훈하고 깨닫게 하는 모든 것이 금방 쓰고 없어질 것을 주고 간 것인가, 아니면 창세 이후 마지막 그날까지, 또는 신령천국에 올라가서도 그것이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있는 효력성을 볼 수 있는 것을 남겨주고 갔던가? 또 예수 믿으면서 자기가 그걸 취했나?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걸 지식적으로 모르니, 제일 먼저는 자기가 자기를 모르니 출생목적과 재세기간 동안에 무엇을 하고 가야할지를 몰라서 자기가 자기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이다. 거짓적인 자기에게 이용을 당하는 거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남에게 속는 자는 먼저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거다. 자기가 자기에게 똑똑하다면 남에게 안 속는다. 원리가 그렇다.
예수를 믿어도 옛사람 자기 즉,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자기 속에 들어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거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분명히 거짓 종들이나 이단자들에게 속게 돼 있다. 속을 사람으로 돼 있는 거다. 언제 속아도 속을 사람으로 돼 있다. 우리는 신앙을 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분명히 알아서 그런 허점이 안 생겨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의 이룰구원의 적중성을 아는 자가 자기를 아는 자이다. 이에서 벗어난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그것은 자기와 남을 속이는 거다. 밥만 먹고 배가 부르면 ‘자자’ 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받아들여지지를 않는다. 예수 믿으면서 생각도 하고, 구별도 하고, 신앙이 뭔지를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래도 낫다.
마귀자식이란 머리에 뿔이 달려서 마귀자식이라고 하는 거냐, 그 신앙사상의 중심이 마귀가 좋아하는 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마귀자식이라고 하는 거냐? 후자다. 그걸 알아야 한다. 모르면 쉬운 말로 자기 속에 귀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걸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래도 정신이 멀쩡한 사람은 자기 속에 나쁜 생각이 싹 들어왔다가 나가는 걸 느낄 줄 알지만 정신이 흐리면 그걸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이방 불신자라도 다 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자기가 진리로 나가는 믿음이냐, 비진리냐? 말하자면 자기가 하나님이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쪽으로 실상화로 들어가는 건지, 아니면 예수이름으로 종교적 활동위주로 나가는 건지?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한다.
성경을 보면 그 이치가 예수님께서 먼저 무장을 시켜서 제자들을 내보낸다. 제자에서 사도로 만들어서 내보내는데,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혀서 보낸다. 일반적으로도 국가대표로 나가는데 하루도 훈련을 안 한 자를 내보내느냐? 갈고 닦고 갈고 닦고 한 거기에서 뽑고 또 뽑고 해서 실력이 있는 자를 내보낸다. 군대도 훈련이 안 된 군대는 전쟁에서 다 죽는다. 사람의 숫자가 많아도 다 죽는다. 그러나 특공대로 만들면 사람의 숫자는 적어도 이기고 돌아온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키우는 것도 그렇다.
‘진리냐, 비진리냐’ 하는 것을 예수 믿는 자기란다면, 기독자라면 모두 분별할 줄 알아야 하겠는데 대부분의 교인들이 자신부터 모르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어느 교회에 나가던 ‘이 교회가 진리교회냐, 비진리 교회냐’ 하고 분별을 하는 자도 별로 없다.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목사부터가 그렇다. 이게 오늘날 교회 종들의 실정이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조직신학적으로 보면 안 된다. 어떤 상황이건 최대한 그 분과의 인격적 관계적으로 봐야 한다. 왜? 전부는 하나님이 나에게 와서 ‘어떻나 저떠냐, 아프냐 건강하냐, 살만하냐 금방 죽겠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게 다 인격적인 관계다. 그래서 학적 이론만 가지고 따지면 안 된다. 인격적으로 안 될 때는 이론적으로 들어가야 하겠고, 또 이론을 말할 때는 인격적 관계성을 갖자는 의미에서 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는 실상적인 존재인데, 이 분을 인격적 관계성이 아닌 인간 모양새처럼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되겠느냐? 이런 거는 아무짝에도 못 쓴다. 성경을 들고 무슨 말을 해도 이룰구원으로 되어있지 않으면 아무리 새롭고 거창한 이론을 대도 이건 학식에 불과한 거고, 그 위주로 나가면 사람이 못 쓴다.
사람이 따뜻하기도 하고, 어떤 때 가서는 차기도 하고, 어떤 때 가서는 풍성한 맛도 있어야 하는데 맨 학적인 이론만으로 어떻게 신앙이 들어가느냐? 인격의 성장에 못 써먹을 학을 어디에 쓰겠느냐? 공부를 했느냐? 밥 잘 먹고 생활을 편하게 하는 면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머리만 돌리고 있다면 그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다는 게 사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안 들어가면 그게 뭐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자타의 구원에 활용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인데 우리가 이것들을 그 면에 활용을 못할 바에는 하나님께서 지어놓은 의미가 없다. 이론만 가지고 비판을 하면 소용이 없다. 안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들어가서 말씀이 내 일생의 전반적인 생활화로 됐을 때 내가 말씀화로 만들어지고, 점령도 되고, 사는 것도 재미가 있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이 비진리인지 진리인지 이걸 모른다. 그저 자기들끼리 모여서 붙잡고 뛰어 놀면 그 분위기에 ‘이게 교회고 이게 신앙인가’ 하며 그 재미로 나가고 있다. 이게 무슨 신앙이냐? 그렇게 되니 자기 신앙이 생명과 먹은 지식인지, 선악과 먹은 지식인지 그 지식 자체도 모른다. 그러니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것은 더 캄캄한 거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신앙의 질을 모르면 성령의 감동인지 악령의 감동인지, 어느 영의 감동인지를 모른다. 그러니 이런 것은 깨어있는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라면 말씀에 깨어있고 이치에 깨어있어야 한다.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자가 누구냐.’ 주님의 집에는 종이 있고, 그 위에 청지기가 있다. 믿는 사람은 종이란다면 다 종이지만 하는 역할 면에 있어서 청지기도 있고 종도 있다. 종들이라 할 때는 예를 들면 교회 안의 직분자도 종들이요, 교인들도 크게 말하면 다 종들이다. 왜냐? 전체가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들기 때문이다.
종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줄 자는 청지기다. 그러니까 청지기는 직분상 그 집의 주인의 대행자이다. 주인집의 살림살이 전반을 대행한다. 따라서 청지기는 주인의 종들에게 줄 양식을 주인의 창고에서 가져다가 때를 따라 나누어 주어야 한다. 직분상 체계가 그렇다 보니 주인집의 열쇠는 청기지가 갖고 있게 된다.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는 성경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창고에 있는 것을 때를 따라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의 입장에서 이건 절대다. 질적으로나 성격으로나 성분적으로나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주면 안 된다. 질적인 면에서 이걸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거짓 종들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세상 것, 썩어질 것을 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불타고 심판과 형벌이 크다. 말하자면 마귀는 세상 것이 자기 것이 아닌데도 자기 것처럼 교인들에게 세상정신을 넣어주고, 또 교인들은 그것을 받고 있다.
그러면 교인들이 마귀로부터 그런 걸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썩고 불타질 것에 힘을 쓰게 된다. 마귀는 교인들로 하여금 먼저는 소원 목적을 그렇게 갖게 만들고, 시간을 그렇게 낭비하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교인들은 예수이름으로 세상 불타고 썩을 것을 구하게 된다. 그렇게 ‘복복, 축복받아라’로 들어가면 전부는 거짓 종이요, 마귀의 종이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인들과 똑같은 신앙사상이다.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고, 이제는 제 멋대로 살면 될 텐데 왜 주일마다 모여서 계속해서 말씀을 듣고 배우는 거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쪽 귀를 달아놨으니까 이쪽 귀로 듣고 저쪽 귀로 내버릴 수 있는 거지 만일 귀를 하나만 만들어 놔서 이 한 귀로 듣기만 하고 내보내지를 못한다면 머리가 깨질 것 같다. 그런데 귀를 두 개를 만들어 놓은 것은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한 쪽으로는 그냥 흘려버릴 수 있도록 하게 하려고 두 개를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믿을 사람은 양쪽 귀로 들어서 속으로 들어간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주님이 주시는 것, 하늘의 것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교회에게 하늘의 것을 주셨다. 교회는 천국복음을 양식으로 먹이는 것이다. 하늘에 갈 사람이 하늘의 사람으로 자라다가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면 나는 변화되어서 하늘로 올라갈 것이고, 내가 죽은 후에 오시면 나는 부활을 입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하늘의 것을 담고 먹고 자란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는 거다. 이치가 그렇다. 그런데 교회에서 세상에서 부자되라는 정신을 먹이면 그 종은 사단 마귀의 종이 된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는 소돔 고모라 같고 노아홍수 때와 같다고 하신 것은 마지막 때의 교회의 신앙의 상태를 말씀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자기를 생각을 해야 한다. 의의 도로 주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야 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아는 것에 자라라고 하느냐?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누가 더 유익이냐?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더 잘 알게 되고, 예수님을 더 깊이 더 높게 더 넓게 질적 양적으로 많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서 나를 인간으로 만드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되고, 이렇게 되면 인생의 삶의 목적관과 재세기간의 나그네 생활의 목적관이 뚜렷해진다.
이 목적관을 좇아 모두가 마음을 같이 하여 자원적 순종을 하면 모두 주 안에서 자기를 잃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자로서의 존귀영광성이 자기 것으로 보전이 된다. 안 잃어버려진다. 이렇게 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자가 된다. 이것이 아닌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더 잘 알아야 한다. 그 분의 소원이나 목적이나 취미성이나 추구성이나 간구성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 당신이 가난하고 못나고 힘들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당신이 주는 것을 다 받기를 바라심에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고 ‘세상의 썩어지고 불타질 것을 소원 목적적으로 받아라’ 하면 이런 건 얼른 받는다. 하나님의 것을 받은 줄을 모른다. 가르쳐줘도 안 받고, 받은 것 같은데 가다가 내버리고 가고. 그러니 이런 자는 사람 자체가 복된 사람이 아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렇지를 않다. 사람도 복 있는 사람이 있고, 복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 예수님을 알았으면 얼마나 알았는가? 하나도 모르고 죽음의 선을 넘어간 자가 얼마나 많을까? 우리 모두 자기도 어느 순간에 죽음의 선을 넘을 텐데, 예수님을 안다면 얼마나 알고 갈 것인지를 생각을 해 봐라.
세상 사람들이 고향에 갈 때 빈 손 들고 가려고 하느냐, 잔뜩 이고 지고 가져가려고 하느냐? 하다못해 인사는 가야겠고 하는데 돈이 없으면 세상 속된 말로 소주 한 병이라도 사 들고 가려고 하지 않더냐? 그러면 예수 믿는 오늘날 자기의 고향은 어디냐? 천국이다. 그게 우리의 고향이요 우리의 조국이다. 참 아버지가 거기에 계신다. 우리가 그곳에 갈 때 뭘 가지고 가겠느냐?
그곳은 물질성의 요소는 못 들어간다. 세상 학박사로는 못 들어간다. 이런 것들은 천국의 문지기에게 차단이 된다. 천국에 정말로 문지기가 있기는 있는 거냐? 천국에 문이 있으니까 문지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문이 내가 들어가야 할 문인지 아닌지를 내 쪽에서 판단이 될 것이다. 자기 몸이나 얼굴에 뭐가 묻으면 밝은 데로 가려고 하느냐, 어두운 데로 가려고 하느냐? 어두운 데로 가려고 한다. 그게 자기 마음이다. 누가 어두운 데로 가라고 한 것이 아니다. 누가 그 사람을 닦아주려고 ‘밝은 데로 나와 봐라’ 해도 자꾸 어두운 데로 찾아들어가게 된다. 사람이 돼 먹길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과 같다.
47절: 적게 맞을 자도 있고 많이 맞을 자도 있는데, 적게 맞을 자는 어떤 사람이냐?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한 사람은 적게 맞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않고 그 뜻대로 행치 않은 사람은 많이 맞는다.
그렇다면 이왕 맞을 바에야 알고 맞는 게 좋으냐, 모르고 맞는 게 좋으냐? 죽어도 알고 맞는 게 좋으냐? 많이 맞고 적게 맞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하는 말씀인데, 인간 자기가 맞을 때 하나님께서 살짝 때릴지라도 자기는 뭐가 부러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많이 맞는다’ 하는 여기에 자기가 속할 때는 자기는 죽었다고 생각을 해야 한다.
주인의 뜻을 계시적으로 살펴보면 주인의 명령 전부는 종들을 청지기를 유익되게 하고, 크게 되게 하고, 영원히 존귀 영광스럽게 받들어 주고 싶어 하시는 소원 목적성이 들어있다. 그래서 명령도 하시고, 권고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징계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망도 징계도 나를 크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만일 종들의 생각이 저질이거나 짧거나 미련해서 주인의 소리를 못 알아들으면 자기의 주장만 펴다가 자타의 구원을 망쳐놓고 심판으로 비참하고 가련한 인생으로 마감이 되는 거다.
주인의 집에 누가 청지기로 세웠느냐? 주인이 세웠다. 이게 원칙이다. 주인이 청지기를 세웠는데 그 주인이 ‘청지기야, 내 창고의 것을 주지 말고 네 창고의 것을 주어라’ 하는 거냐, ‘주인 당신의 것을 때를 따라 좋은 것으로 나누어 줘라’ 하는 거냐? 주인 당신의 것을 좋은 것이 있으니 때에 따라 그것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다가 주라는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은 주는 것은 주인이 세운 청지기가 아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주인의 종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는데, 불의한 청지기란 어떤 자냐? 원칙상 청지기의 것은 아예 없는 거다. 그러니까 참 옳은 청지기는 주인의 창고에서 꺼내주는 건데 불의한 청지기는 누구의 것을 주는 거냐? 다른 데서 도둑질을 해다가 주는 게 아니냐? 그러니까 불의하다는 게 뭐냐? 왜 불의하냐? 글자대로 보면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주는 것 같지만 그런 뜻은 아니다.
왜 불의냐? 청지기는 날 때부터 자기 것이 있느냐, 없느냐? 없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도 세상에 태어나서 쓰고 먹고 해도 그게 우리의 것은 아니다. 왜냐? 자기가 태어날 때 세상에 가지고 왔어야 그게 자기 것인데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누구의 것이냐?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것이 아니다.
이걸 비유적으로 보면 부잣집 주인의 것을 청지기가 자기 집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낭비하고 탕진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성도가 비구원적으로 나가는 것은 전부가 불의다.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옳지 않게 쓴다는 면에서의 불의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쓰기는 쓰되 주인의 허락 하에 주인의 명령대로 주인의 설계대로 써야 하는 건데 불의한 청지기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제 멋대로 썼다는 면에서의 불의다.
그런데 16장에 보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했으니 해석이 참 어렵다. 16장의 불의란 제자들이나 사도들이나 교인들이나 목사들이나 세상 것은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네가 쓰기는 쓰는데 하나님의 것을 쓴다는 면에서 불의다. 네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 그걸 쓴다는 면에서의 불의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것을 즉, 물질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되 영원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물질을 가지고 주님을 사귀는데 쓰고, 같이 천국에 들어갈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리 원칙적으로 보면 거짓 종들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자기 노후대책으로 쓰는데, 이건 앞에서 말한 불의의 청지기에 속하는 거고, 16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한 이 불의성도 그 질에 있어서 똑같이 들어가는 거다.
청지기를 주인이 세웠은즉 주인은 자신을 대행할 수 있도록 청지기에게 할 것을 다 가르쳐 주는 것이다. 청지기에게 할 일을 안 가르쳐준 주인은 없다. 그러니까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는 청지기라면 거짓 종임이 틀림이 없다. 청지기라면 주인이 가르쳐 주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청지기라고 하면서도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이건 주님이 세운 게 아니다.
주인의 대행자는 역할이 그렇다는 것이니, 가정에서도 식구들에게 영양적인 면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엄마는 아침의 메뉴가 다르고 점심의 메뉴가 다르고 저녁의 메뉴가 다르다. 참 좋은 어머니다. 가정 식구들의 건강이 어머니에게 맡겨져 있는 거다. 한 교회로 말하자면 교회 성도들의 신앙 면의 건강성은 그 교회의 목회자에게 맡겨져 있다. 그렇게 들어간다.
국가적으로도 대사가 그 나라의 지도자의 밀서를 밀봉해서 가지고 간다. 그런데 악한 지도자일 것 같으면 밀봉해서 보내는데 그 내용이 ‘이걸 가지고 가는 자를 죽이라’ 하는 것도 있다. 교회적으로 말한다면 설교의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정확해야 전해야 하는 건데 ‘예수 믿어 복 복’ 한다면 이게 옳은 청지기냐?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는 청지기라면 주님이 보낸 종이 아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교인들을 사단에게 다 잡아먹히게 한다. 세상적으로 가르치는 목사라도 성경을 들고 나오지 여성동아 잡지를 들고 나오지를 않는다. 그리고 예배순서도 어떻게 보면 더 재미있게 한다.
청지기가 주인의 뜻을 알고 예비치도 않았고,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도 나눠주지 않고 굶겨놓고, 종들을 일을 못한다고 때리고, 목숨까지 바쳐서 충성봉사 하라고 윽박지르고,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허랑방탕 술에 취하고 있다면? 1.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한다? 2. 적게 슬슬 맞아야 한다? 3. 하나도 안 맞았으면 좋겠다? 1번이 확실하냐?
예수 믿으면서 비진리에 대한 분별도 안 하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할 마음도 없고,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도 저버리고, 잃어버린 양도 찾지 않고 있다면 이런 교인은? 1. 많이 맞아야 한다? 2. 살살 맞아야 한다? 3. 하나도 안 맞았으면 좋겠다? 1번이 맞느냐?
세상 모든 인간은 알던 모르던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돼 있는 게 인간이다.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안 간다. 그래서 보면 자기 그림자는 자기를 따라가지 절대로 저 사람이 예쁘다고 자기 그림자가 그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 나는 못생겼는데 내 그림자가 잘 생긴 사람을 따라가는 걸 봤느냐? 이런 일이 없는 건데 영의 눈으로 보면 그런 게 있다. 실질적으로는 없는 건데 영의 눈을 가지고 실상적으로 예수 믿는 정신을 보면 따라가는 게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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