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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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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장 14절-28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은 병자 고치고 이런 걸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 분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영의 눈이 뜨이는 것을 말한다. 그 분을 안 믿고 그 분의 뜻에 무식이면 그 분의 영광을 못 본다. 그 분의 영광을 보면 그 분을 찬송하게 되는데, 그 분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은 인간 자기가 그 분의 영광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체험이 있어야 나오는 거다.
그 분께 감사를 하는 것도 그 분으로부터 아무 것도 안 받고 감사를 한다면 미친 거다. 받은 게 있고, 받은 그게 얼마나 귀한지를 알 때 감사가 나온다. 그런데 교회에서 육덩이 설교를 듣고 육덩이 소원 목적, 세상소원 목적으로 구하면서 ‘주실 줄 믿사오며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면 이게 뭐냐? 이건 간사를 떠는 거다. 육덩이 마음으로 구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시겠느냐? 하나님의 본질로 적중된 신앙을 모르면 이런 허튼 짓을 하게 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이 하나님이 계신다. 그 분의 언행심사, 곧 그 존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분의 언행심사가 되어질 때마다 그게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그 분이 하나님 자체다. 하나님 자체가 안 되면 말씀이 안 된다. 믿는 우리가 살아계신 말씀을 깨달아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진다는 건데, 그 분이 말씀으로 오심은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어 주겠다는 소원성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선지자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시켜 주셨고, 사도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일을 확인시켜 주셨고, 또한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의 감화 감동을 입혀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게 해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도록 하신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기만 하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람이 된다.
15절-16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세례요한을 보내신 그 분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충만’이 무엇이냐? 물질의 것은 다 한계가 있다. 그러나 신령한 하나님의 것은 무한이다. 본질의 진리이치에서 나오는 말씀에서는 깨달음이 무한히 나온다. 설교가 이게 아닌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세상의 말, 웃기고 울리는 말은 깨달음으로 충만케 되는 게 아니다. 진리이치의 깨달음에 충만이 되어야지 분위기에 휩싸여서 감동 감격을 하는 것은 충만이 아니다.
은혜는 거저 받는 거다. 신령하고 무한한 이치는 거저 받는 거다. 이건 돈으로 살 수 없다. 그런데 은혜를 거저 주신다고 하니까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말씀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한 이치 두 이치 깨달으면 이 이치끼리 결합이 되어서 또 다른 이치가 나오면서 충만해지는 건데, 이게 아닌 ‘예수 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 되자. 만사형통 되자’ 라는 소리는 백 날 들어봐야 이치가 없다.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셨다면 물세례는 누가 준 거냐? 세례요한이 주었다. 물세례 속에는 회개의 세례가 들어 있다. 이 세례를 받아야 그 다음에 주님의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 성경도 모르고, 사람도 안 바뀐 채 하늘의 소원 목적이 아니라 세상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건 100% 악령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질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면 성령을 받은 게 아니라 귀신이나 악령을 받은 거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세상축복 운운’ 하는 것은 악령이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히 되어지는 역사를 하신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성경에 보면 누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느냐? 모세다. 인간이 직접 하나님을 보게 되면 인간의 표현으로 그 자리에서 녹아버린다. 그런데도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게 무슨 뜻이냐? 모세에게 자기가 본 하나님을 그리라고 하면 어떻게 그리겠느냐? 해처럼 그리겠느냐, 불덩어리처럼 그리겠느냐?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모양을 직접 본 게 아니라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보았다는 거다.
하나님의 뒤를 봤다는 말씀도 있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뒷모습을 직접 봤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본 것을 말하는 거다. 그리고 입맞춤도 있는데, 이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신앙적으로 말을 하면 ‘네 마음과 내 마음이 똑같다’고 하는 의사단일을 의미한다. 성경의 표현을 액면적으로 그대로 해석을 하려고 하면 해석이 안 되고 이상한 말이 되어 버린다. 뜻이 안 나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누가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정확히 알려줄 수 있겠느냐?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알려주는 게 제일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오시면 인간들이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당신을 알려주셨으니 이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걸 보면서 예수 믿는 우리는 자기의 믿는 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통해 천지만물을 만드셨고, 세상역사를 진행하시고, 궁극적인 구원목적을 위해 인간 자기를 태어나게 했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천군천사와 세상 모든 만물을 동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선악과 따먹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어떻게 궁극적인 구원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겠느냐?
19절: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세례요한이 요단강 동편 베다니에서 하는 일이 유대 종교인들로부터 허가를 받고 하는 거냐? 그들의 안수를 받고 하는 거냐? 오직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하는 거다. 주님의 일은 인간세계의 누구의 허가를 받고 하는 게 아니다. 주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는 거다.
만일 세례요한이 유대 종교인들로부터 허가를 받고 주의 일을 한다면 외식운동 마귀운동이 된다. 그런데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많은 교회 인도자들이 어디서 무엇을 배웠는지 도무지 분별을 하지 못한 채 세상적, 비진리적, 육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인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교권과 세권에 잘 보이려고 얼마나 아양을 떠는지? 세례요한의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29절에 밝히고 있지만 주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는 그 분만 높이는 증거를 하고, 그 분이 오시면 즉시 그 분을 알아본다.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르침은 모두가 거짓된 가르침이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유대백성들이 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요한에게 보낸 거냐? 보냄을 받은 이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요, 보수에 정통이요, 바리새인들은 숫자도 많기 때문에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데 세례요한이 이들에게 말 한 마디라도 잘못하면 죽이거나 출교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20절: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세례요한이 그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고 드러내어 당당히 말을 했다. 세례요한은 그들보다 더 높은 권세자이신 만능의 능력자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꿀릴 게 없다.
세례요한은 그들은 하지 않는 회개의 세례를 주었지만 그들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줄 수 없다. 지금도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인도자라야 회개의 세례를 줄 수도 있고 물세례를 줄 수도 있는 거다. 또한 지금도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게 된다. 질적으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신앙이 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을 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영접할 준비가 안 된 자가 많고, 이게 뭔지도 모르는 자가 많다.
예수를 믿는다면 최소한 자기를 인간으로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래야 다른 사람을 향해 ‘이단이니 삼단이니’ 정죄를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느냐? 자기가 이 세상에 왜 살고 있으며, 왜 예수를 믿는 것인지 그 목적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보고 ‘이단이니, 삼단이니, 참단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짓이다. 이단이다’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밝혀주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그래서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는 것은 성경을 보는 교회에서 할 말이지 세상은 이단을 전혀 모른다. 그럼에도 교회가 세상과 합세해서 어떤 사람을 향해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며 정죄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21절-23절: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이들은 세례요한에게 “모세가 신:18:15에서 말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라고 한 그 선지자냐?” 하고 물었고, 이에 대해 세례요한은 ‘나는 그 선지자가 아니다’ 라고 했고, 이에 대해 ‘그러면 네가 누구인지를 말을 하라’ 라고 하니까 세례요한이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주님이 오시면 빨리 맞이할 수 있게 하는 일을 한다’ 라고 했다. 이들은 세례요한으로부터 들은 말을 예루살렘에 가서 분명히 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은 자기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 자기가 사람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신격화하는 짓을 하면 안 된다. 자기를 잘 알고 자기의 소속과 입장과 삶의 태도가 분명해야 한다. 교파나 교단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천국복음인지, 세상복음인지’ 신앙의 정신 사상을 분명히 하라는 거다. 가룟유다처럼 살면서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
세례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고, 이 일을 하고 있다. 세례요한의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구약 때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거고, 주님을 만난 후에 세례요한에 대해 ‘주님이 보내신 사자가 분명하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다.
오늘날 교회 인도자들은 이 면을 생각하고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말하자면 목사님이 성경해석을 할 때 이걸 누가 인정해 주느냐? 물론 주님이 인정을 하셔야 하지만 이미 주님을 만나서 진리이치를 아는 사람은 ‘아, 저 목사님은 주님이 보낸 종이구나.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신앙 면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을 하거나 정죄를 할 때는 말씀을 듣고 이치를 깨달아서 분별하고 구별하고 판단을 해야 한다. 자기가 정답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의 점수를 평가할 수는 없는 거다.
광야는 버림받은 곳이요,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곳이다. 그런데 이 광야에 사람이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느냐? 먹으라는 생명과는 안 먹고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광야다. 또 한 편으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 받은 백성들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과 연단을 받으며 천국에 들어가서 누리며 살 영능의 실력을 키우는 곳이 세상이다. 광야는 버림받은 곳,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훈련을 받는 곳이니 예수 믿으면서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은 주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안 만들어지면 훈련을 받은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즈음에 유대백성들은 이방인들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버려두고 갈 세상에, 끝내 심판 받을 세상에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세상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방 강대국의 속국이 되어서 섬기고 있었고, 신앙양심은 완전히 외식이요 질적으로 썩어 있었다. 세례요한은 이들에게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외쳤으나 그 때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회개할 줄 모른 채 여전히 외식운동 껍데기 운동을 해 나갔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셔서 영원히 죽지 않는 천국복음을 전하실 때 사람들이 대립 없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쳤고, 세상소원 목적에서 천국의 소원 목적으로 바꾸도록 가르쳤는데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백성들은 세례요한의 소리를 듣지 않고 대립적으로 나갔다. 그 때나, 지금이나, 노아 홍수 때나 마찬가지다.
세례요한의 소리는 광야의 소리다. 사람이 말을 하면 소리는 메아리만 남겨놓고 사라진다. 주님을 알려주는 소리, 주님을 만나라는 소리를 전해놓고 인간 자기는 사라지는 게 광야의 소리다. 주님의 종은 하나님의 의사만 남기고 인간 자기는 사라져야지 인간소리, 세상소리를 남기면 안 된다. 자기가 세상에서 받은 이력, 경력, 상, 장 자리 이런 걸 내세우는 건 인간소리다.
24절-25절: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세례요한은 주님이 먼저 보냈고, 지금 세례요한에게 와서 시비를 거는 이 자들은 유대인들이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다. 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거룩한 도시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어받았다’ 라고 하면서 큰 자부심으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외모 모양 형식이 거창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는 보수요 전통이요 정통이다. 우리교회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 우리교회 목사님은 박사증이 몇 개나 된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자들이 세례요한을 향해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라고 하는 것은 ‘너는 세상에서 유명하지도 않고, 정통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면서 왜 세례를 주느냐?’ 라고 하는 거다. ‘내세울 게 아무 것도 없는 네가 그럴 권이 있느냐?’ 라는 거다. 세례를 못하게 할 생각으로 이렇게 묻는 거다.
26-27절: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세례요한이 소개하는 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분’이라고 한다. 즉 ‘너희들은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그 분과 관계를 갖지 않고 있으니 너희가 그 분을 깨닫지 못하고 대립성을 띠고 있다’ 라는 거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그 분을 안다는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교권과 세권이 당당한 이 자들은 그 분을 모른다는 거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말하자면 ‘그만큼 훌륭한 분이 너희 가운데 계시는데 너희들은 그 분을 모르는구나’ 라는 건데, 이들이 왜 이렇게 된 거냐? 그 분과 관계성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이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지 못한다는 건데, 몸이 건강하면서 신발 끈을 못 푸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니까 영원 전서부터 설정된 우리의 구원을 실행하실 그 분의 걸음걸이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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