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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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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새김질을 많이 하는 소가 살이 찔까, 안 하는 소가 살이 찔까? 새김질을 많이 하는 소가 살이 찐다. 소의 위는 4개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김질하라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김질함으로써 말씀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이, 그 영양가가 자기에게 진하게 들어온다.
밥을 먹을 때 몇 번 씹지 않고 삼키는 사람이 있다. 이러면 소화가 잘 안 된다. 음식을 차근차근 씹어야 치아도 튼튼해지고 뼈도 튼튼해진다. 음식물을 잘 씹지 못하면 영양섭취가 잘되지 않기 때문에 영양부족이 되고, 이러면 잇몸도 녹아내린다. 이런 상태에서는 임플란트도 못 심는다고 한다. 많이 씹을수록 두뇌도 좋아진다.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치의 말씀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정신과 사상이 교정된다. 반면에 잘못된 말씀을 먹거나, 자기가 옳은 말씀을 안 먹거나, 거짓 종을 만나면 자기의 정신 면과 신앙 면이 망가지고 세상위주로 되어버린다. 이러면 부끄러운 구원, 불탈 구원으로 들어간다. 믿는 사람이 불에 안 탈 사람으로, 진노에 안 걸릴 사람으로 되면 주님을 닮은 거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과 지식과 지혜가 주님을 닮아야 한다. 안 그러면 세상을 심판할 때 불사름에 놓여진다. 믿는 사람의 영은 죽지 않지만 고통의 심판을 당한다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물질에 소원 목적이 되어있으면 이 사람은 물질에 변동이 오면 근심 걱정에 잠을 못 잔다. 그러나 이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두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살면 하늘이 내려앉아도 땅이 꺼져도 염려 걱정이 없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를 믿는 사람도 다 여러 가지 사건을 겪는데, 예수를 믿는다면 이런 것에 자기 마음이 변동 변질이 없어야 하겠는데 자기 몸 밖의 것이 요동하면 그만 무서워하고 두려워한다면 이 사람은 여전히 물질에 매여 사는 거다.
하나님은 물질과 상관이 없는 분이니 우리가 이 하나님을 잡고 있으면 세상의 움직임과 상관이 없이 평강을 누리게 된다. 물질은 하나님에게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다 우리의 구원에 이용 활용하라고 만들어 놓은 거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과 기쁨을 누린다고 해도 세상에는 영원하고 참된 행복과 기쁨이 없다.
사람이 부자로 살건 가난하게 살건 이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을 머리로 하고 살아야 할 인간이 큰 죄를 짓지 않더라도 정신과 사상이 물질 밑에 들어갔다면 이것은 물질을 자기 머리에 이고 사는 셈이라서 고통스러운 거다.
이 세상에는 생명과를 먹고 나온 지식과 선악과를 먹고 나온 두 가지의 지식이 있다. 창:의 에덴동산에서 이게 나온다. 하나님께서 생명과와 일반과는 먹으라고 했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했는데, 일반과는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물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세상을 주격으로 살지 말라는 거다. 즉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을 기준으로 세워놓고 사는 것은 선악과를 먹는 거다. 이러면 생명과는 못 먹는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생명과를 먹으면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게 해준다고 한 것은 존귀 영광자, 행복자로 만들어준다는 것인데 인간들이 생명과 대신 선악과를 먹으니, 즉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의 기준으로 세워놓고 사니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게 안 되고 세상에 매여서 살게 된 거다. 인간은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야 지혜가 나오는 거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살면 사람이 무지해진다.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세우고 내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아름답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나의 겉모양을 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은 마음에서 아름다움이 나온다. 아가서의 솔로몬의 노래가 이런 거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세계에서 거의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외모는 시간 속에서 변질되고 변모된다. 우리는 인격 면이 참사람으로 만들어졌으면 되는 거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따르는 양심을 보시고 은혜도 내리고, 왕도 세우고, 두령도 세운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중심을 가지지 못하면 자기 속에는 그만큼 세상 것이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사를 세상기준으로 판단하게 되고, 이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게 된다.
내가 지은 죄는 내가 그 결과를 못 피한다. 내가 죄를 지으면 징벌을 받을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다. 내가 어디로 도망을 가더라도 내가 받는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역사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임하게 된다. 이 역사가 서서히 된다면 깨닫기 쉽고, 회개하기 쉽고, 고치기 쉬운 건데 돌발적으로 갑자기 닥치면 회개할 시간마저도 없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전부가 선악과를 먹은 지식으로 산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산다. 예수를 믿는데도 선악과를 먹으면 고통과 번민과 고난과 걱정과 근심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적인 말씀을 듣지 않는다. 이러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구원이 없이 망한다. 율법이 없이 망하는 사람이 있고, 율법을 가지고도,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망하는 사람이 있다. 말씀이 자체화로 안 된 사람은 율법이 없이 죽는 사람과 소원 목적이 같기 때문에 같이 취급당한다.
이 세상은 생명과를 먹은 지식과 선악과를 지식 두 가지 지식이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좁혀서 자기 속에도 존재가 아닌 성분적으로 생명과를 먹는 새사람과, 선악과를 먹는 옛사람이 있다. 옛사람은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예수를 믿고, 새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천국을 바라보며 예수를 믿는다. 생명과를 먹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다. 부자건 가난이건 상관이 없다. 사건 환경에 넘어지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는 사람은 외부적인 보암직한 것을 기준 삼기 때문에 이게 넘어지면 자기도 넘어진다. 자살을 하는 사람이 이런 경우다.
세상은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사람을 죽여도 이런 사람 안에 들어있는 지식을 모른다. 그러니 무엇을 먹어야 고쳐지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은 감옥에 집어넣어도 안 고쳐진다. 왜냐? 무엇을 먹어야 고쳐지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감옥에 들어갈 때의 지식이나 감옥에서 나올 때 지식이 똑같은데 어떻게 고쳐지겠느냐? 그런데 성경은 사람의 지식을 바꾼다. 이건 신의 역사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지식으로 돌아선다면 이건 신의 역사가 임한 거다. 성령님의 역사가 임한 거다. 사람이 주님 앞에 바로 놓이면 찬송도 나오고 기쁘고 즐겁다. 이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최고의 것을 주신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을 닮은 거다.
생명과를 먹은 데서 나온 지식을 가진 사람의 소원 목적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라고 하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지식을 받아서 하나님의 진리지식의 정신을 가지고 이웃과 관계성을 짓는 거다. 이게 아가페 사랑이다. 이건 없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생각을 하면 근심 걱정이 떠날 날이 없다. 이걸 이길 수 있는 것은 진리지식의 사람이 되는 거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거다.
진리지식을 받고 이 지식이 나의 정신에 박혀서 나의 언행심사가 하나님 앞에 옳음으로 나오는 것은 생명적인 활동이다. 내가 생명과를 먹어야 생명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는 거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열심히 충성봉사를 해도 진리지식을 받지 못하면 생명과를 먹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곧 선악과를 먹는 거다.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로 살겠다고 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는 거다.
생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구별하고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의 진리지식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할 때 이것은 이치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가지면 자기의 상황에 따라 이 세 가지 중에 하나 이상으로 표현되어 나오게 된다. 이치가 아닌 것은 이렇게 유기적으로 엮어지지 않고 따로 논다.
교회에서 세상 소원 목적을 가지면 이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서 선악과를 먹은 지식이요, 저주다. 가인의 피 없는 제사요 저주받은 지식이다. 가인의 후손들은 아내도 많이 얻고, 노래를 불렀고, 사람을 많이 죽여놓고서 마누라 앞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자랑하며 영웅시했다. 이게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사람들의 정신이요 삶이다.
말세에는 노아홍수 때와 같고 소돔 고모라 때와 같다고 했으니 말세지말인 지금의 세상이 이 상태로 되어있다. 노아에게 핍박을 준 자들이 가인의 후손들이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자들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자들이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치수대로 방주를 지었는데, 이는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지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건설해 나가라는 거다. 이게 자기 구원이다. 다른 말로는 건설구원이다.
방주를 지을 때 사람마다 분야적으로 누구는 창문을 만들고, 누구는 배 옆에 나무판을 붙이고, 누구는 칠을 한 게 다 하나님의 척도대로 한 거다. 이렇게 척수대로 하니 홍수가 와도 배 안에 물이 안 들어오고 배가 물 위로 뜬다. 그러니 이 방주 안에 든 것은 전부가 보호요 보전이다. 그런데 말씀에서 빗나간 채 인본주의로 해놓으면 세상성이라서 물에 쓸려가고, 펑크가 나고, 썩고 한다. 이러면 깨진다. 이것이 인본주의 신앙의 결과다.
가인의 후손들은 눈으로 보기에 크고 아름다운 것을 취해 들어갔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에 놓여진다. 그때는 물로 쓸려 갔지만 앞으로는 불로 태워버린다. 그런데 진리생명을 가진 우리는 물속에서도 불속에서도 보전이 된다. 가령 예수님을 물이나 불에 집어넣으면 죽겠느냐? 물질세계를 지은 분이 물질에 속했을까, 물질 위에 계실까? 예수 믿는 것은 물질을 발로 밟고, 물질을 발아래 놓고 사는 거다. 사람은 땅을 밟아야 걷고 뛰고 활동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생명과를 먹는 지식과 선악과를 먹는 지식 두 가지 지식이 있다. 생명과를 먹는 것이란 진리말씀을 따라 사는 거고, 선악과를 먹는 것이란 세상목적으로 사는 거다. 세상지식이 들어가면 이 사람의 속은 마귀의 집이 되어버린다.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는 창세로부터 마지막 날까지 생명과를 먹은 지식과 선악과를 먹은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생명과를 먹은 지식을 가지고 사는 건지, 선악과를 먹은 지식으로 사는 건지 자기를 살펴야 한다.
믿는 우리는 생활 속에서 목숨이 달아나더라도 하나님 앞에 바로 해야 한다. 이게 생명과를 먹는 거다. 여기에는 물질 이해타산이 끼지 않는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목숨을 내어놓고 사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은 자기중심에 늘 하나님을 놓고 산다. ‘네 부모 형제와 처와 자녀보다 나를 귀히 여기라’는 것은 버리라는 게 아니라 선택을 바로 해서 하나님을 가지라는 거다.
우리가 가는 길은 하나님 앞에 있다. 나의 길은 하나님의 가슴에 들어있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았는지, 들지 않게 살았는지는 현재 내가 사는 삶에서 되어지는 거다. 이걸 알고 ‘내가 왜 진작에 마음을 가다듬지 못했던고’ 하고 회개를 하고 ‘앞으로는 과거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하는 각오와 결심을 한다면 여기에는 목숨을 내어놓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가는 게 나오게 된다.
목사는 교인들이 불 속에 들어가지 않게 가르쳐야 하는데 예수 덕으로 세상에서 부자가 되라고 가르친다면 이것은 성도를 불 속에 집어넣는 거다. 우리는 자기의 모든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이 죽음 저 너머에 내려져 있어야 한다. 자기의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이 죽음 저 너머에 내려져 있으면 세상을 다스리는 실력이 커진다. 왜냐? 말씀이 나를 다스리면 나는 영능의 실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게 말씀이 나를 다스리는 거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는 것도 올라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다. 그런데도 옳은 진리이치대로 사는 게 무서우냐?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하시는 건데 예수 믿으면서도 이걸 안 믿으니 말씀대로 사는 게 무서운 거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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